#75화, 샤를로테를 끌어내릴 계획
“켈빈 부인이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니?”
샤를로테는 놀라 찻잔을 떨어트렸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파돈을 이용한 독살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독을 넣었다고 자백한 켈빈 부인의 뒷조사를 보고 받던 중이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을 겨우 벌었다.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던 도중,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부터 골라내기로 했다. 일을 벌여도, 어떤 일을 시키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고 꿋꿋하게 수행해줄, 그런 사람들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켈빈 부인이었다.
켈빈 부인은 내가 황후가 되자마자 충성을 바치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충성스러워 의심스럽고, 그래서 계속 하녀 대하듯 다뤘는데, 그녀는 끝까지 복종에 가까운 태도를 내게 보여주었다. 믿음이 생겨 전속 시녀로 가까이 두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돌변한 것인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기뻐했으면서 감히 독이 든 쿠키를 먹여?
소름끼치고 역겨웠다. 그래서 일부러 따로 사람을 시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의외의 사실을 알아 버렸다.
샤를로테가 정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시녀 사건.
시녀 하나가 드레스에 차를 흘려 본보기로 삼을 겸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붙여 시녀 하나를 내쫓았었다.
그 열다섯 살의 시녀, 라벨이 바로 켈빈 부인의 동생이었다.
라벨 켈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쩐지 너무 사근거린다 했어. 의심했어야 했는데, 잡일을 시켜도 말없이 하여 곁에 두었는데.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였다니.
“하….”
방금까지 먹고 있던 과자가 순식간에 쓰게 느껴졌다. 목 안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샤를로테는 과자가 담긴 그릇을 멀리 치워두었다. 소름이 끼쳤다. 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시녀로 지원했다는 것 자체가. 그럼 동생의 복수를 위해 나를 죽이려 하고, 로젤리아에게 덮어씌우려 했나?
근데 왜 로젤리아에게? 쫓아낸 시녀가 로젤리아를 잘 따랐던 것 같은데?
“지하 감옥으로 가자. 가서 내가 직접 그 년의 면전에 대고 어떤 벌을 내릴지 말하겠다.”
팔을 마구 문질렀다. 뭐가 되었든, 샤를로테의 머릿속에는 이를 명분 삼아 켈빈 부인에게 벌을 내리고 다시는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쫓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를 듣고 있던 루아 남작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루아 남작부인의 오랜 친구였던 켈빈 부인은 과부였다. 그리고 부모님도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가족이라고는 늦둥이 동생인 라벨뿐이었다. 자신의 늦둥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시녀로 지원했다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손목을 자르라는 처벌을 받았을 텐데, 또 어떤 잔인한 벌을 내리려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함부로 나섰다가 큰일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옥으로 내려가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켈빈 부인이 보였다. 걸레짝이 되어서 신음만 흘리고 있는 모습이 가여웠지만 그걸 바라보는 샤를로테의 눈은 무심하기만 했다.
루아 남작부인은 켈빈 부인이 잘못했다고 빌기를 바랐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라고 속으로 거듭 외쳤다.
“네까짓 게 여길 어디라고 와.”
켈빈 부인은 샤를로테를 보자마자 비소를 흘렸다. 반쯤 미쳐버린 것인지. 루아 남작부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루아 남작 부인은 알고 있었다. 라벨은 드레스 제작 기술이 뛰어났지만 손톱이 뽑힌 것 때문인지 손 떨림이 왔다고 들었다. 드레스 제작은커녕 식사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로젤리아가 사교계 복귀를 도와줬지만, 이리저리 휘둘리다 사랑하는 약혼자에게 버려진 뒤 강에 몸을 던졌다고.
죽지는 않았지만 실어증에 걸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소중한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고 온 건데…결과가 너무 처참했다.
“너는 나와 내 아기를 죽이려 했다. 황족 시해 미수죄라고.”
“….”
“그래도 내가 특별히 네 동생은 죽이지 않고 살려두지 않았느냐. 손목만 자르라 지시했을 뿐.”
“…잔인한 년.”
켈빈 부인이 샤를로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마다 루아 남작부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빌어도 모자란 판에…!
“네가 실성한 것이냐, 지금 누구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지?”
“내가 실성한 것으로 보여? 아쉽지만 나는 제정신이야. 왜, 한 번 더 말해줘? 이 잔인한 년, 잔인하고 악독한 년! 천벌을 받을 년!”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거늘, 너는 황제의 아이를 죽이려 했어. 이렇게 살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이 말이야!”
모든 걸 다 잃은 듯한 켈빈 부인과 악마같이 웃는 샤를로테는 너무 대조되어 있었다. 샤를로테의 살짝 부른 배를 바라보던 켈빈 부인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깔깔거리다 철장에 머리를 쾅 막았다. 정신이 나가버린 건지 철장에 몇 번 더 머리를 박더니 샤를로테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네 뱃속에서 태어날 아이가 불쌍하네.”
“뭐라고?”
“황제의 아이 같은 소리하네! 황후의 자격도 없는 네 뱃속에서 태어날 아이가 가엾어! 네가 황후라고? 웃기지 마, 네가 어떻게 황후야. 세상에 어떤 황후가 드레스에 차를 쏟았다고 손톱을 뽑으라고 하지? 황궁에서 쫓겨난 시녀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면서!”
켈빈 부인의 눈은 핏줄이 다 터진 상태였다. 철장에 이마를 박으면서 피가 뚝뚝 흘렀다. 그 모습에 샤를로테는 몸을 굳혔다.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바닥을 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적의에 샤를로테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그렇게 고귀한 척, 우아한 척 다하더니. 그러면서 황후? 네 뱃속에 있는 애가 진짜 황족이겠어? 패전국 황족 출신의 피를 이어받은 애일뿐이야.”
“…뭐라고?”
그 말에 샤를로테는 당장이라도 찢어죽을 눈빛으로 철장을 꽉 움켜쥐었다. 켈빈 부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으득 갈며 외쳤다.
“결혼식도 안 올린 주제에, 황후? 임시 황후잖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임시 황후!”
“나는 이제 곧 이 제국의 진짜 황후가 될 몸이다! 어디 그딴 천박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지?”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피가 쏠리다 못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다, 곧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가 될 몸이었다. 나는, 나는! 겨우 시녀 따위에게 이딴 소리를 들어야 할 위치가 아니라고!
저 시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뺨을 내려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어떤 소문이 돌지 몰랐다. 침착하자, 황후의 자리를 약속받았고, 이제 겨우 페르소나의 마음을 돌렸다.
이 상황에서 다른 사고를 칠 수는 없었다.
이 시녀를 황궁 밖으로 내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내보내면? 밖에서 떠들어댈 텐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이 감옥에 죄수가 있나?”
“아, 아니요, 없습니다. 재판을 받으러 간 상태라…!”
“그럼 기사들은?”
“지금은 훈련 중인데, 왜,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루이 남작부인은 어쩐지 불길한 마음에 더듬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샤를로테는 악을 쓰는 켈빈 부인을 그대로 둔 채 돌아섰다. 그리고 황궁에서 가장 구석지고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으로 가, 드레스 소매 안에서 무언가 꺼냈다. 사탕? 새하얀 가루가 묻은 사탕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저 기고만장한 태도를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군.”
“화, 황후 폐하….”
“…루아 남작부인, 그대는 딸만 셋이라지?”
그 순간 온몸의 감각이 쭈뼛하고 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왜 물어보는 거지? 루차 남작부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샤를로테는 싱긋, 미소 지으며 후작부인의 어깨를 잡고 꾹 눌렀다.
“둘이 친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너에게만큼은 경계를 누그러트릴 거야.”
“네, 네?
”네가 약을 주는 척, 독을 먹여라. 마치 독을 먹고, 자살한 사람처럼 보이게….”
샤를로테는 일부러 말끝을 늘리며 부인을 훑어 내렸다. 그리고 그 시선에 루아 남작부인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을 잘 해결하고 입을 다문다면, 포상금을 주겠다. 네 딸을 좋은 가문과 연결시켜주마. 내가 알기로는 첫째는 사고로 얼굴에 흉이 생겼고, 둘째는 결혼할 나이가 한참 지났지? 막내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던데.”
공포를 뒤덮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루아 남작 부인은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러니 좋은 가문과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정부를 15명이나 두었다던 후작가의 영식이 막내딸에게 계속 치근대고 있었다.
포상금에 좋은 가문과 연결 시켜 준다니. 함께 자란 친구보다는 자식들이 더 중요했다.
독을 먹이면 된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리고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 살기 위해서였다. 살기 위해서, 그녀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을 수도 있잖아? 독을 먹고 살아난 사람도 있는데, 그래. 그럴 수도 있잖아. 머릿속에서 빠른 합리화가 이루어졌다.
“저, 정말 좋은 가문과 연결 시켜주시는 거죠?”
“그럼, 네가 내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다.”
샤를로테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말을 잘 듣는다면, 그에 따른 대우를 해주겠지만 허튼 생각을 한다면 곧바로 죄를 씌워 혀를 뽑을 생각이었다.
가여울 정도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루아 남작부인을 보며 샤를로테는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
켈빈 부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혀가 뽑힐까?
라벨의 손목을 자르라고 지시했다지만, 켈빈 부인은 이미 자신의 동생을 먼친척에게 보내 숨겨둔 상태였다.
켈빈 부인은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라벨을 숨겼다는 사실을 안다면, 샤를로테는 라벨이 아니라 자신의 손목을 자르라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생의 손목이 잘리는 것보다야 나았다. 매질로 다리가 부러졌다. 온몸에 멍이 들고, 눈이 부어 잘 떠지지 않는 게 뻔히 보이면서도, 그렇게 죄책감 하나 없는 눈빛으로 보다니.
라벨의 손톱을 뽑았을 때도 그랬을까. 샤를로테, 그녀가 과연 사람일까….
그때 켈빈 부인의 눈에 익숙한 형체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을 꼭 닮은 남자.
“네가 샤를로테의 시중을 들던 켈빈 부인인가?”
“!”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로웬 가넷, 그가 왜 여기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