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넷대공으로 처음 맞이하는 생일
“디자인은 이것으로 하지.”
디자인 리스트를 가볍게 훑어보다가 카렐리아에게 잘 어울릴만한 귀여운 디자인을 골랐다.
카렐리아는 칼라일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에 들었다. 한층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은 칼라일뿐이었다.
가차 없이 사람의 다리를 발로 밟은 사람치고는 표정이 온화했다. 칼라일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되도록 밖에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라일님께 전해들은 대로, 이 일이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점장에게 새어나가지 않게끔 부탁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큰 보석상에서 그런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가게에도 큰 타격이 올 테니까. 그래서 처음에 고른 것 중에서 추가로 몇 개 더 주문하려고 했는데….
칼라일에게 전해 들었다고? 뭐를?
칼라일은 지점장에게서 뭔가를 건네받고 있었다. 작은 케이스 안에 든 것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더니 이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라일. 볼일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갈까?”
“아, 너무 기다리게 했나? 미안해.”
“아니야. 사야 할 것은 다 샀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칼라일은 한 손으로는 잠든 카렐리아를 안아 들고, 다른 한 손은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손을 잡으며 카렐리아와 칼라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둘이 이렇게 붙어있으니 정말 똑 닮았다. 보통 남매가 이렇게 닮을 수 있나, 부모와 자식이라면 몰라도.
그때 지점장이 나와 칼라일을 보더니 작게 감탄을 흘리며 인자하게 웃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부부 같으십니다.”
부부…?
지점장의 말에 칼라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칼라일도 그의 말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칼라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더니 ‘부부….’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덩달아 나도 속으로 부부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칼라일과 내가 부부라니. 그렇게 보였나? 물론 서로 좋아하는 상태인 것은 맞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칼라일과 내가 결혼을 한다고? 문득 새하얀 정장을 입은 칼라일이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자 어쩐지 맞잡은 손이 뜨거워졌다. 약지 손가락에 새하얗게 남은 반지 자국이 유독 또렷한 형태로 눈에 들어왔다. 칼라일과의 결혼, 그와의 아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에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칼라일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칼라일은 대답 대신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갈까, 여보?”
그의 돌발행동에 꾹꾹 눌러놓았던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갔다.
나는 그대로 칼라일의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보석상을 빠져나왔다. 붉어진 내 얼굴에 호위 기사들이 괜찮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여보’라는 말에 차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뒤에서 칼라일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대공저로 돌아오자 클로이가 달려와 세실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다.
이렇게 기별도 없이? 물론 세실리아는 그날 이후로 많이 친해졌던 터라 와도 상관은 없었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유순하지만, 예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기별도 없이 온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세실리아 양이라면, 그때 그 티파티를 주최한 영애 아닌가?”
“맞아. 갑자기 무슨 일이지?”
“…혹시, 플로트 가 때문인가.”
플로트 가문의 일원은 이미 타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설마 보복이라도 해왔나?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귀빈실로 향했다. 귀빈실로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고 있는 세실리아가 보였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세실리아 양,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각하.”
“괜찮아요, 세실리아 양은 언제든 와도 좋으니까요.”
세실리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옆에는 편지 같은 것이 가득 쌓여있었다.
수줍게 웃던 세실리아는 칼라일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다가 문득 그의 품에 안겨있는 카렐리아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 아이는…?”
“아, 제 동생입니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칼라일님과 똑 닮았네요.”
세실리아는 카렐리아의 볼을 꾹 누르더니 순수하게 감탄만 담긴 얼굴로 손뼉을 쳤다.
“이렇게 세 분이서 서 있으니 부부와 자식 같아 보여요!”
부부에 ‘자식’이라는 단어까지 붙었다. 정말로 부부 같아 보이나? 지점장도 그러고, 세실리아도 그러고…나는 곁눈질로 칼라일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의 귀가 살짝 붉었다. 나는 칼라일의 입에서 또다시 ‘여보’라는 말이 나올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세실리아 양?”
“아, 오늘은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원래는 미리 기별을 드리고 오려 했지만, 아시다시피 하루가 급한 상황이니까요.”
상의라니? 혹시 헤레이스 왕국과의 마력석 무역 때문인가? 마력석을 수입해오는 것은 전적으로 바르셀민 가문의 담당이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세실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이번 생일 파티는 저희 저택 정원에서 이뤄지고, 드레스와 악세사리는 아셀라 양이 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식자재 재료와 요리는….”
“잠깐, 생일 파티라니요? 누구의 생일 파티죠?”
“네? 당연히 자넷 각하의 생일 파티죠!”
옆에서 차를 마시던 칼라일이 사례가 들렸는지 크게 기침을 하며 입을 막았다. 내가 놀라 손수건을 건네주려 했으나, 칼라일은 기침을 하는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생일, 콜록, 이라니, 그게 무슨…!”
나는 세실리아와 칼라일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들이 말하는 생일을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생일까지 삼일 정도가 남았다. 그래서 세실리아가 찾아온 거였구나.
레이몬드 제국에는 특이한 관례가 있었다. 한 가문의 영애가 생일을 맞이하는 날이 오면, 주변의 가문들이 각각 파티 장소, 요리, 드레스, 그 밖의 것들을 각각 가문이 담당해서 준비한다. 그리고 ‘생일 축하 파티’ 자체를 당사자에게 선물해주는 관례였다.
세실리아는 크게 놀라며 편지 뭉치를 나에게 내밀었다. 전부 초대장이었다.
“아무래도 각하께서는 이번에 가넷대공이 된 후 처음 맞는 생일이시니까…초대장을 보낼 가문에 대해 상의 드리려 했지요.”
“그래서 온 것이었군요.”
황후는 보통 황후를 제외한 남은 황실 사람이 주도적으로 준비하니까. 내 생일은 매번 페르소나가 준비한 탓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일이 많았던 탓에 생일을 생각하지도 못했고.
“…몰랐어.”
“응?”
“생일인 거, 몰랐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말 미안해.”
칼라일은 내 생일을 뒤늦게 알았다는 사실에 굉장히 미안한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생일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인데….
“나도 까먹고 있었어.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
나는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안한 티가 역력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세실리아가 가져다 준 초대장을 열었다. 초대장 안에는 익숙한 가문들과, 새로 작위를 부여받은 귀족들이 보였다.
그러다 문득 황실로 보내는 초대장에 손이 멈췄다.
세실리아가 이래서 상의하러 왔다고 한 거구나.
“황실로 초대장을 보내실 거예요, 각하?”
나는 초대장 가장 아래에 쓰여 있는 페르소나의 이름과 샤를로테의 이름을 보며 편지지의 끝을 매만졌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적인 파티지만, 상대는 황제와 황후였으니까.
“황실에도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정말이세요?”
“원하지 않는다면 오지 않겠죠. 아, 그리고 레인 후작가에는 초대장을 보내지 말아요, 세실리아 양.”
“네? 어째서요?”
아까 미처 표출하지 못한 내 분노를 담아 그대로 초대장을 벽난로에 던졌다. 타들어가는 초대장을 보며 부글거리는 속을 다듬었다.
“아, 그러고 보니 레인 후작 부인이 막대한 유산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인가요?”
“후작 부인께서 저를 부인의 정부로 심으려고 하더라고요.”
“네? 정말인가요? 칼라일님은 각하의 정부시잖아요.”
세실리아는 그제야 내가 왜 레인 후작가로 보내는 초대장을 찢어버렸지만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무례하네요.”
“네, 정말 무례하죠.”
칼라일은 가볍게 맞장구치며 몇 개의 초대장을 더 골라냈다.
“세실리아 양, 이 사람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가 골라낸 초대장은 나와 아무런 접견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왜? 라는 눈빛으로 보자 칼라일은 약간 화가 난 듯한 몸짓으로 초대장을 벽난로 안으로 집어던졌다.
“무례한 자들을 굳이 초대하고 싶지 않아.”
“?”
“이 가문도 제외 시켰으면 하는데.”
칼라일이 들어 보인 초대장은 후작 부인의 정부로 있던 남자의 가문이었다. 뭐지? 보석상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었나? 어떻게 소속된 가문까지 알고 있는 거지?
‘…혹시 보석상에 들른 게, 단순히 보석을 사려고 간 게 아니었나?’
그때 지점장이 말한 ‘칼라일님께 전해들은 대로’라는 말이 떠올랐다.
일부러 들어간 거구나.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니까, 일부러 경고를 날린 거야. 미리 보석상 사람들의 입을 막은 거였어.
마력연구관이 되기 전에는 저택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서 단순히 신문으로 접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십거리를 직접 마주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중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겠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가끔 저택으로 돌아오는 칼라일의 얼굴이 안 좋을 때가 많았다. 나를 꽈악 끌어안거나 제국 내 가문들에 대해 정리해둔 책을 빌려가고는 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세실리아도 대충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잠깐 칼라일의 눈치를 보며 그가 빼둔 초대장에 적인 가문의 이름을 확인했다.
“계속 제외를 해도 끝이 없군요.”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한 가문들을 모두 빼면, 바르셀민 가문 빼고는 몇 장 안 남을 거야.”
“왜 이렇게 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네.”
“황후였고, 대공이 되었고.”
“정부에서 황후가 된 샤를로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나는 정부까지 들였잖아.”
정부를 들인 여성은 언제나 가십거리였다. 정부가 아니라, 정부를 들인 여성에게 언제나 초점이 맞춰졌다.
칼라일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심각한 얼굴로 옆에 쌓은 초대장들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세실리아가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저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세실리아는 빠르게 ‘이상하게 듣지 마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칼라일님께서는 왜 계속 정부로 계신 거예요?”
“네?”
“아, 제 말은 마력연구관 자리를 정식으로 받으셨잖아요? 그럼 작위도 받으셨을 텐데, 왜 계속 정부로 계신 것인지, 정식으로 연인 관계라고 밝히시는 게 낫지 않나요?”
작위를 받았다고?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칼라일도 전혀 들은 바가 없는지 세실리아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력연구관은 연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 자리라,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력석 무역이나, 연구 동명 협정, 사절단 대표로도 나갑니다. 작위가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폐하께서 저희 아버지께 공작의 작위를 주신다고 하셨지만. 권력 싸움에 휘말리시는 것을 워낙 싫어하시는 터라 거절하셨죠.”
…세실리아의 말이 맞았다. 플로트 후작도 원래 백작이었지만 후작 작위를 받아서 플로트 후작이 되었다. 바르셀민 백작도 공작의 작위를 받으려 했지만 거절했다.
그런데 칼라일은 왜? 마력연구관 자리가 아니더라도 노예시장이라는 제국을 뒤흔들 정도로 큰 사건을 해결하는 거라면 남작 작위는 줘야 하는데?
카렐리아를 데려오고, 그의 손목에 걸려있던 마력 제어 마법이 풀렸다는 사실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설마, 일부러 주지 않은 것인가.
“칼라일, 마력연구관 자리를 받을 때 네가 세운 공과 그에 따른 포상이 적힌 서류, 받았지?”
“아, 으응…바, 받았는데.”
“지금 당장 가져와.”
귀빈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