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예전에도 그랬어?
체스턴 보석상은 다른 보석상과는 차별 있는 세공 방식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을 법한 특별한 악세사리를 많이 만들어내고는 했다. 특히 섬세한 세공과 희귀한 보석과 색다른 디자인이 돋보이는 반지가 그 보석상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언니, 여기가 어디에요? 엄청 반짝반짝해요.”
보석상으로 들어서자마자 카렐리아는 진열된 보석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한 번씩 다 선물 받은 보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첼스턴 보석상만의 디자인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보석상의 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크게 놀라며 곧바로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희귀한 품목만을 골라 내 앞으로 늘여놓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보고 싶은 것은 어린아이가 달 만한 것인데.”
내가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어린 아이에게 집 한 채를 지을만한 보석을 달아주겠다니. 직원들이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지점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린아이가 달 만한 것이라 하면, 브로치와 머리핀, 팔찌 정도가 있는데, 오늘 새롭게 세공을 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머리핀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라. 나는 보석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카렐리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헬리오도르나, 다이아몬드로 맞춰주고 싶었다. 아니면, 암녹색 정도는 어떨까. 칼라일은 녹색도 참 잘 어울렸는데. 카렐리아도 그렇겠지?
그때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무어라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말다툼이라도 벌어졌나 싶어 자리를 옮기려는데 카렐리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한 번 고함소리가 들린 순간, 카렐리아는 내 드레스 자락을 꼭 쥔 채 계단 쪽을 손가락으로 마구 가리켰다.
“오빠가 저기 있어요.”
보석상에 들어왔을 때 칼라일이 보이지 않아서 벌써 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이층에 있었던 것인가, 이층은 귀빈실로 알고 있는데.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카렐리아의 손을 잡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쩐지 나를 안내해주는 직원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내 눈치를 보는 직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귀빈실에 도착한 순간 알 수 있었다.
“각하의 정부 말고, 내 정부가 되는 것은 어때?”
칼라일이 다른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방금 무엇을 들었는지, 저절로 찌푸려진 인상을 굳이 펴지 않은 채 칼라일에게 본인의 정부가 되라 말하는 귀부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각하는 일만 하시잖아? 일만 하는 게 뭐가 그리 재밌겠어. 듣자하니 사교 모임에도 안 나간다는데.”
다행인 것인지, 칼라일은 웃는 낯으로 귀부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저 귀부인, 최근 남편이 죽고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레인 후작 부인이었다.
나는 카렐리아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 귀를 막으라는 시늉을 하고는 그들의 대화를 마저 들었다. 칼라일은 레인 백작 부인의 말에 상냥한 어투로 대답했다.
“저는 로젤리아 가넷 대공의 정부입니다. 죄송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부인.”
상냥하면서 단호했다. 그러자 한 영애가 작게 비소를 흘렸다. 그러자 레인 후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아름다운 외모로 많은 남자들에게 대쉬를 받고는 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처럼 다른 이의 정부였다가 레인 백작 부인에게로 온 남자 정부나, 본처가 버젓이 있음에도 후작 부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지 후작부인은 단호한 칼라일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디 감히, 정부 따위가….”
“정부라고 불러주시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각하의 정부지 부인의 정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칼라일은 환하게 웃으며 곱게 미소를 지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 속 칼라일은 홀로 온화한 분위기를 지켜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칼라일 쪽으로 가있었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안 그래도 화려한 외모였다. 햇살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는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조각상이 걸어 다닌다’는 구시대적인 말들이 돌 정도였을까.
칼라일이 남녀노소 가라지 않고 고백이나 사랑편지가 많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길을 함께 걷다보면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칼라일에게 향할 정도로 그는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정부로 들어오라 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이혼한 여성의 정부는 그 여성의 재산을 노리고 들어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일까. 칼라일이 내 재산을 노리고 억지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나?
칼라일을 정부로 들이고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순간 레인 후작 부인이 칼라일을 향해 뜨거운 차를 뿌렸다. 물론 칼라일은 웃으며 가볍게 피했다. 빈 잔을 들고 한참을 씩씩대던 부인은 그대로 한 남자 옆에 가 앉았다. 그녀가 새롭게 들였다던 정부였다.
익숙하게 화난 부인을 달래던 정부는 코웃음을 치며 칼라일에게 말을 걸었다.
“각하의 정부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각하께서는 바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 혼자 나온 것입니다.”
“부인의 말대로 일중독이 맞나봅니다. 어디 그래서 밤은 잘 보내실지 모르겠군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같은 정부끼리 편히 말해봅시다. 보통 그런 사람이 밤에는 더 거칠게 행동한다고 하던데. 꽤나 고생 좀 하겠습니다?”
익숙한 희롱이다. 나는 혹시 몰라 작은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은 카렐리아의 손을 꾹 눌렀다. 나는 괜찮지만 카렐리아가 듣기에 너무 천박한 말이었다.
직원에게 카렐리아를 맡기고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로 칼라일이 그 정부로 벽으로 몰아붙인 채 정부의 목을 세게 압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세게 비튼 것인지 정부의 목에 시퍼런 멍이 들기 시작했다. 칼라일의 손톱이 파고들어 목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지껄여봐.”
“커흑, 윽! 이, 이거, 놔…!”
“그 천박하고 더러운 혀로 다시 지껄여보라고.”
켁켁거리며 숨도 쉬지 못한 채 버둥거리자 후작 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귀빈실에서 도망쳐 나오려 했다. 하지만 나를 본 순간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칼라일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만 보다면 동요 하나 없었지만, 손 위로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다른 귀족들을 제치고 귀빈실로 들어갔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칼라일은 이를 갈며 정부를 바닥을 내던졌다.
“감히 누구를 그 입에 담아.”
숨도 쉬지 못한 채 공포에 질린 정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칼라일의 압박은 멈추지 않았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시꺼먼 마력이 흘러나와 정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조차 함부로 못 담는 그 사람을 너 따위가….”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말려야 했다.
“칼라일. 그만해.”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이성이 날아간 칼라일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눈빛에 다시 한 번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로젤리아.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네가 첼스턴 보석상에 갔다고 들었어.”
“그랬어? 미안해, 먼저 연락 줬어야 했는데.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지, 밑에 내려가 있을래? 볼일만 보고 금방 갈게. 좋은 식당을 알고 있어.”
일부러 나를 귀빈실 밖으로 밀어내려는 듯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며 어깨 너머로 그가 내던진 정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리는 게 보였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후작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이 안 내려갈 거야?”
“응?”
“식사는 집에 가서 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원래 이럴 때는 경고만 주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칼라일도 이제 마력연구관이었다. 제국민들도 마력연구관의 자리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권력 남용이니 뭐니, 말 많아질 바에야 이 정도는….
“로젤리아, 혹시 내가 이러는 게 싫어?”
“!”
“싫으면 지금 당장 그만둘게.”
칼라일은 말갛게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적어도 다리 하나 부러트리겠다고 할 줄 알았다. 아니면 플로트 후작과 다른 귀족들이 왔을 때처럼 천장에 마법으로 매달아 놓던가. 순순히 물러나려는 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지는 않아.”
“그럼?”
“하지만 네가 나처럼 구설수에 오르는 게 싫어. 걱정돼.”
지금 이 순간은 통쾌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더 큰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니까. 게다가 첼스턴 보석상은 수도에서 가장 큰 보석상. 그러니 지금 이 일은 다른 곳보다 더 빨리 퍼질 것이다.
내 염려를 듣던 칼라일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뺨에 입을 맞추고는 작게 속삭였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응?”
“그때마다 이렇게, 참고 넘겼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어. 그리고 지금도 그러기를 원해, 나는.”
이런 일은 흔했고, 그때마다 대응하기에는 감정 소모만 심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경고만 주는 게 딱 적당했다. 나는 여전히 대답 대신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칼라일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후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작 부인은 내가 칼라일을 막아서자 한시름 놓인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물론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칼라일이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제지한 것이었다. 카렐리아도 있었고.
그때 칼라일이 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부인, 제가 알기로는 이번 유산 분배 과정에서 부인의 몫에 항구 우선 독점권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그, 그걸, 어, 어떻게….”
“8년 정도면, 오래 하셨죠?”
칼라일은 내게 눈짓하며 자연스레 내 팔을 자신의 팔위에 걸었다.
무역 상인이 주된 업인 레인 후작과 항구 우선 독점권 계약을 맺은 지 8년이었다. 그래서 이번 무례를 항구 우선 독점권을 빼앗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했었다.
당연히 후작가의 영식에게 갔을 거라 생각한 항구 우선 독점권이, 부인의 몫으로 갔다고? 칼라일은 그것을 어떻게 알지?
계약이 8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지?
“가, 각하! 제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독점권 계약은…!”
“어머, 실수라니요. 부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네, 네?”
“그런 것은 무례라고 하는 겁니다. 실수 같은 것이 아니라. 안 그래, 칼라일?”
“맞아, 로젤리아. 실수라는 것은….”
내가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자, 칼라일은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정부의 무릎을 세게 걷어찼다.
“이런 게 실수지.”
명백한 고의였음에도 칼라일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그를 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독기가 서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