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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72화 (72/170)

#72화, 생각보다 아이답지 않은.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지자 저택 사용인들 중에서 감기에 걸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감기에 걸린 이들과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 치료비용을 따로 지급한 뒤 일주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릴리도 열이 있는 듯해 곧바로 휴가를 주고 내보냈다. 안 가겠다고 하는 것을 겨우 설득해 마차에 태우고 돌아오는데 카렐리아가 콜록거리는 게 보였다.

“카렐리아.”

“언니!”

카렐리아가 낮 동안 뛰어다니는 정원은 유독 바람이 많이 불던 곳이었다. 옷을 따뜻하게 입히기는 했지만…더 따뜻하게 입혀야겠다는 생각에 내 쪽으로 달려오는 카렐리아를 안아들었다.

“언니이, 이거 카렐리아가 만들었어요.”

카렐리아의 손에 들린 것은 노란 꽃으로 만든 화관이었다. 카렐리아가 내 머리 위에 화관을 씌우더니 예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귀엽다,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카렐리아를 끌어안았다.

카렐리아의 사슴 같은 눈망울은 칼라일을 닮아서 그런가, 더 귀엽다. 나는 카렐리아의 볼을 꾹 눌렀다. 복숭아 같은 뺨은 말랑말랑했다. 카렐리아의 뺨을 꾹꾹 누르자 카렐리아는 뺨을 갸웃거리며 고양이처럼 뺨을 비볐다. 칼라일만 그러는 게 아니었구나.

“카렐리아. 케이크 먹으러 갈까?”

“케이크! 좋아요, 카렐리아 케이크 엄청 좋아해요!”

너무 사랑스럽다. 그대로 안아들고 식사실로 내려왔다. 주방장에게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새하얀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에 온갖 과일들과 초콜릿으로 장식했다. 카렐리아는 그 케이크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크림을 뺨에 묻혀가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맛있니?”

“맛있어요! 언니는 매일 이런 거 먹어요?”

“나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지만 이렇게 같이 먹어줄 수는 있단다.”

달달한 것을 좋아하지만 매일 먹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칼라일은 잘 먹지 않았나.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 특히 초콜릿! 내가 선물로 준 초콜릿을 하나씩 녹여먹는 모습이 카렐리아와 많이 닮았다. 아니지, 카렐리아가 칼라일을 닮은 것이려나.

“칼라일 오빠는 케이크를 잘 만들어요!”

“그래?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구나.”

“진짜 맛있어요! 엄마 아빠도 맛있다고 했어요! 사실 엄마 아빠 두 분 모두 요리를 잘 못 해서 칼라일 오빠가 다 했어요!”

엄마, 아빠.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우뚝 손이 멈췄다.

그리고 보니 칼라일이 카렐리아를 잃어버린 것은 그의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암살자들을 피해 다니던 도중에 생긴 일이었다.

…카렐리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을까? 아직 어려서 칼라일이 말하지 않은 것인가? 칼라일이 암살자들에게 도망치던 모습을 보았을 텐데.

바올에 잡혀있던 것치고는 어쩐지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위협당하고, 얻어맞고, 아팠을 텐데.

“카렐리아. 괜찮니?”

“네?”

“아…바올에 잡혀있었을 때 말이야. 무섭지 않았어?”

카렐리아는 작은 손으로 포크를 꽉 쥔 채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깨끗한 은빛 눈동자를 보자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를 하려던 순간, 어리고 작은 아이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카렐리아는 괜찮아요! 많이 울었으니까, 이제는 울지 않을 거예요.”

크림 가득 묻은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환한 미소와 달리 나이에 맞지 않은 말 한마디가 울컥하게 만들었다. 알고 있구나. 카렐리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죽고, 칼라일이 검에 찔렸던 순간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카렐리아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카렐리아가 울고 있을 때 언니가 달래줬으니까 괜찮아요. 오빠도 밤새 나 안고 달래줬어요! 그러니까 카렐리아는 괜찮아요!”

차라리 울었다면 좋았을 텐데. 칼라일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나이에 맞지 않게 굴 때가 많아서 가끔 놀랄 정도라고, 지금은 다른 아이처럼 울어도 좋은데. 나는 카렐리아를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꿈속에서 만난 카렐리아는 칼라일을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단지 칼라일을 잘 따라서 그런 질문을 한 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라일의 부모님이 모두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때 내 품에 파고들며 사랑스럽게 웃던 카렐리아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언니. 오빠는요?”

칼라일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 카렐리아는 칼라일을 찾으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칼라일은 지금 황궁에 있단다. 슬슬 돌아올 시간이 되었으니…미리 마중을 나가도록 할까?”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카렐리아의 뺨에 묻은 크림을 닦아줬다. 바닥에 내려주려는데 카렐리아가 내 목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요! 계속 안아주면 안 돼요?”

안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것마저 닮았다. 물론 칼라일은 칭얼거리지는 않지만,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꼭 닮았다. 나는 카렐리아를 품에 안은 채 저택 밖으로 나왔다. 칼라일도 어렸을 때는 이랬을까? 말없이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저택 바깥에 마차가 와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마차 안에 칼라일은 없었다. 빈 마차였다.

“칼라일님께서는 중간에 내리셨습니다.”

“중간에 내렸다니?”

“네, 내리셔서 첼스턴 보석상으로 가셨습니다.”

첼스턴 보석상이라면 수도에서 가장 큰 보석상이잖아. 희귀한 보석들만 다루는 곳이잖아. 진열된 보석들만 해도 상당한 가격이고. 웬만한 귀족들도 주문을 하려면 3개월을 기다린다고 해야 하던데.

“언니, 오빠는요…?”

“칼라일은 조금 늦게 돌아온다고 하는구나. 수도에 갔다는데.”

“수도? 카렐리아도 수도 가보고 싶어!”

“응?”

“카렐리아도 수도에 가면 안 돼? 응?”

칼라일의 기억 속에서는 카렐리아는 몸이 아파서 하루 종일 저택에만 있었다. 게다가 몸을 숨기고 있던 도중이니 수도를 돌아다니지 못했겠지. 나는 헝클어진 카렐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수도에 새로운 의상실이 생겼다고 했다.

원래 드레스에는 관심이 없었다. 화려한 드레스보다는 수수한 드레스가 좋았다. 레이스가 달리고 보석이 박힌 드레스보다는 깨끗하고 적당한 무늬가 있는 그런 깔끔한 디자인이 좋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상실은 화려하고 풍성한 드레스만 있으니 의상실에 가는 횟수는 다른 귀족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그러나 카렐리아가 입을 드레스라면 달랐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어떤 드레스가 안 어울릴까. 칼라일은 어떤 색이든 잘 어울렸다. 그것은 카렐리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를 사면, 악세사리나 새 구두도 필요하겠지?

날씨가 추워졌으니 드레스에 어울릴 망토나 겉옷도 필요할 테고.

나는 마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카렐리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첼스턴 보석상으로 가도록 하지.”

***

너무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로젤리아가, 유산을 했었다니.

입술을 꾹 물은 채 분노를 삼켰다.

황제 놈은 그것도 몰랐다가 로젤리아가 이혼을 선언할 때 처음 알았다고? 내가 들은 게 소문이 아니었어?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일부러 대공저가 아닌 밖에서 시벨을 불러냈다. 로젤리아의 호위기사로 일한지 5년이 다 되어가는 그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벨은 로웬의 끈질긴 부탁에 한참을 망설이다 모든 것을 토해냈다.

로젤리아는 유산을 했고, 그 일을 계기로 이혼을 제안했다는 것. 페르소나는 단순히 아이를 잃은 변심이라 생각하고 로젤리아의 이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샤를로테가 릴리의 뺨을 때리고, 페르소나가 릴리를 황궁 밖으로 내쫓으려 하자 화가 나 황궁을 박차고 나왔다는 것.

전해들은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기를 바랐다.

로젤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날마다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고 내렸다. 일일이 처리하기에는 끝이 없었고, 내가 손을 대면 로젤리아의 평만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무시하고 살았다. 거짓소문이 대부분이니 이번에는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로젤리아가 유산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페르소나는 그 이야기를 황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몰려왔다.

페르소나는 왜 그 얘기를 막았을까, 자신의 이미지가 떨어질까 봐? 정부에 빠져 황후가 임신한 것도, 유산한 것도 모르는 무책임한 황제로 낙인찍힐까 봐?

로젤리아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혼자서 얼마나 꾹꾹 참아왔을까. 어쩐지 군사지원을 끝내고 돌아온 이후, 다들 내 눈치를 보았다. 단지 로젤리아가 이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대공저로 돌아가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면 안 돼, 진정해. 로젤리아가 이럴까 봐, 나에게 이걸 숨겼겠지.

하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내 누이가, 황후가 되어 잘 지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안일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도 모르고 로젤리아에게 왜 이혼했냐고, 네가 아이를 가졌었다는 헛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후회가 되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 연구원이 말하길, 제국민들 사이에는 아직 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알고 있는 사람은 황궁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다들 그 사실을 쉬쉬했다. 하녀, 시녀, 시종, 비서, 연구원들, 심지어 기사들까지도. 특히 내 앞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로젤리아가 왜 유산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군사지원을 나가는 것을 언제나 명예롭게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나는, 로젤리아의 오빠인 나는, 아무리 자세한 얘기를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칼라일이 떠올랐다. 로젤리아의 정부인, 그는 알고 있지 않을까. 릴리에게 물어본다 한들, 얘기해주지 않겠지. 로젤리아도 마찬가지고.

칼라일은 로젤리아의 유산을 알고 있을까.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치 누군가 옥죈 것 마냥, 살갗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심장 부근을 꾹 누른 채 휘청거렸다.

하지만 로젤리아의 유산에 대한 사실을 물어보려 칼라일이 일하고 있는 연구소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 생경한 고통에 헛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왜 하필 이럴 때….

최근 들어 계속 이런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의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기간 짧은 진통제만을 권유해주고 있었다.

로웬은 주머니를 뒤져 약을 찾았지만 어제 다 먹어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는 수 없이 대공저로 돌아가야 했다.

억지로 고통을 억누른 채 술을 몰아쉬며 미리 대기시켜둔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마차에 다른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꽤나 늦으셨군요.”

로웬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저자가 왜 마차를 타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웬은 통증에 작게 신음을 흘리다 크게 비틀거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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