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앞으로 두 달
칼라일과 약혼을 하면서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다. 희미하지만 어쨌든 선천적인 마력. 마법사. 그 덕분에 황녀 생활도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천한 신분 출신인데 마법사라고 괴롭힘은 더 심해졌지만 그나마 대우가 달라졌다. 시녀도 붙여주고, 세숫물도 먼지 가득한 물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로 가져다 줬으니까.
그곳에서는 내가 마법사라는 신분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제국에서는 아니었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면서 선대 황후들 보다 한참이나 못 미치는 업무 능력에 질타를 받고, 정부였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당하며, 슬슬 내 출신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들이 늘어났다. 시녀를 통해 들어보니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내 신분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고 하던데….
미법사라는 것을 숨긴 것은 또 다른 의문을 만들어낼까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굳이 밝힐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리고 마법이라고는 정신계열의 마법 밖에 쓰지 못하니까 숨겨도 상관없다 믿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 이후, 페르소나가 생각보다 마법 연구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든 숨기자고 마음먹었다.
분명 황후로서의 내 업무를 줄여주고 남은 시간을 제 연구를 도와 달라 할 텐데. 마법사 황후라는 칭호는 꽤나 끌렸지만 나는 이름뿐인 마법사였다. 내게 거는 기대가 상당할 텐데.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사흘 내내 방에만 있었다. 페르소나가 찾아와도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피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칼라일이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할 때 배워둘 것을.
“황후 폐하.”
“….”
“폐하, 밖에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무도회 이후 나를 찾아오지 않는 페르소나를 보며 초조했었다. 직접 침실로 찾아왔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웠다.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도 그냥 몸이 아프시다 전할까요?”
“아니다…들어오시라 해라.”
피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낫겠지.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꾸미지 않은 얼굴로 페르소나를 마주했다. 그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따스한 눈길…그러나 그 눈빛을 본 순간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다들 나가 있거라.”
페르소나는 시종들을 전부 내보낸 뒤에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떻지? 괜찮은가, 샤를로테.”
이름으로 불렀다. 이혼한 이후 이름은커녕 단둘이 있을 때도 황후라고만 불렀던 페르소나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그래, 괜찮다면 다행이구나. 일단은…네게 상의도 없이 칼라일을 마력연구관 자리에 앉힌 것부터 사과하마. 독살 사건도 있었고, 정신적으로 힘든데 갑자기 너를 위협한 자가 황궁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페르소나가 천천히 내 손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했지만 그럴수록 목덜미 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왜 사과를 하는 거지? 무슨 말을 하려고, 아냐. 페르소나는 내가 칼라일을 위협했다는 것을 믿고 있어. 봐, 사과까지 했잖아?
“그때 네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단다. 네가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사흘 내내 앓을 줄도 몰랐고.”
사흘 내내 앓지는 않았다. 궁의를 매수한 것뿐이니까. 나는 일부러 아픈 척을 하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아니에요. 폐하께서 칼라일을 마력연구관 자리를 내주었다는 서류를 보내셨죠. 진즉에 보지 않은 제 탓이죠. 업무에 너무 바빠서….”
“그래, 최근 공부와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최근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고. 평판도 좋고.”
마법 연구를 돕지 않아도 될까, 그러면 그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일도 없고, 실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 평판도 더 떨어질 일도 없고, 이름뿐인 마법사라며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샤를로테.”
“네, 폐하.”
“북쪽에 있는 탑을 허물고, 너를 위해 마법연구소를 따로 지을 생각이다.”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되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는 게 들키지 않았기를. 당황하지 않은 척,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좋지 않은 상황들이 발끝에서부터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폐, 폐하. 저,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마법사인 것도 몰랐고, 괜히 제가 연구를 더 망치는 것은 아닐지!”
“괜찮다, 샤를로테. 늦어도 좋아. 네가 지금껏 해온 것을 보면 마법 지식도 충분히 읽힐 수 있을 테지. 마법도 찬찬히 시도해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칼라일과 마주치지 않게 네 주변의 호위를 늘려주마.”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간절한 희망이 보였다. 마법 연구로 골머리를 앓던 페르소나. 마법 연구와 관한 일이라면 잠들다가도 일어나서 곧바로 연구원들이 전달한 보고서를 읽어 내렸다.
내가 여기서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도회 이후 그가 다시 정부 시절처럼 따스하게 대해주는데. 내가 거절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여기서 페르소나의 애정마저 사라진다면, 총애 받지 못하는 황후인 나는….
“하, 할게요.”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제국의 황후로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래, 샤를로테. 그리고 이제 슬슬, 결혼식을 올리자구나.”
…결혼식?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알려야지. 최초의 마법사 황후 샤를로테. 그리고 내가 듣자하니, 슬슬 제국민들 사이에서 네 신분에 대한 말이 다시 돌고 있다더구나. 여론이 커지기 전에 네 출신도 밝히고. 마법사인 것도 밝히자구나.”
안 돼, 그걸 밝힌다고?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럼 멸망한 황실의 1황녀라는 거짓말을 제국민들에게 해버리는 셈이잖아. 칼라일과 나는 도망칠 때 가까운 레이몬드 제국으로 도망쳤어.
이 제국에는 안케도니아 제국 사람이 과연 없을까? 그리고 칼라일이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밝힌 것처럼, 내가 13황녀라는 것도 밝히면 어쩌지?
“네 출신은 네가 마법사라는 것으로 충분히 덮어질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건국제까지 두 달 정도가 남았으니 그 전에….”
“아니요, 폐하.”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건국제 바로 전날에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죠.”
“그 후에?”
“지금은 이미 예산 분배가 모두 끝난 상태 아닙니까?”
칼라일에게는 이제 마력연구관 자리와 로젤리아라는 커다란 뒷배가 있어. 그가 검을 들었으니, 나도 검을 들어야 해. 내가 먼저 그를 처야 해.
“레이몬드 제국은 새롭게 한 해가 시작되는 날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건국제와 신년회를 공동으로 주최하죠. 그렇기에 한 해가 끝나기 며칠 전, 그때 예산 분배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다.”
“갑작스러운 큰 지출은 재정에 어려움일 끼치는 법이죠. 그러니 차라리 결혼식과 마력연구소 건설, 건국제와 신년회에 들어가는 예산을 한꺼번에 측정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면 이번 해에 들어갈 예산 측정 안을 수정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선대 황제들도 일부러 결혼식과 건국제를 연이어 한 사례가 있었지. 그래, 그렇게 하자구나.”
그들은 내가 결혼식 때 분명 내가 한 거짓말들을 모두 공개할 가능성이 크다. 미리 대처하거나, 먼저 쳐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필요했다.
페르소나가 나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불안함은 점점 공포로 변했다.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나는 갈 곳이 없다.
황녀 시절보다 더 못한 삶을 살지도 몰라. 어떻게든 이 자리를 지켜야 해.
나는 미소 짓는 페르소나를 향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두 달 남았다. 앞으로, 두 달….
***
“단장님.”
“….”
“단장님?”
로웬은 며칠째 통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손질하다 말고 멍을 때리질 않나 식사하던 도중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벽에 포크를 날리지 않나. 게다가 최근 검술 대련에서 세 번 연속 진 것만 보아도 그의 상태가 불량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로웬은 다른 사람의 만류로 생각보다 일찍 대공저에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공저에 가면 릴리의 얼굴을 다시 봐야 했다. 요 며칠간 릴리는 로웬과 눈이 마주치면 들고 있던 서류를 공중에 던진 채 도망을 쳤다. 로웬의 머리카락조차 보지 않으려 계속 그를 피해 다녔다. 로웬은 릴리가 자신을 피해 다니고 있음을 잘 알았다.
피해 다니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다는 것도.
결국 대공저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집을 따로 구해야 하나.’
릴리를 볼 때마다 그 어색한 상황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던 그 순간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릴리는 그 후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너무 당황해서 한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묻고 싶어도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도망치니….
결국 황궁 주변을 맴돌다 다시 훈련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고 옷에 먼지가 가득 묻은 채 모여 있는 마력연구원 몇 명이 보였다.
그리고 보니 칼라일이 마력연구관이 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바올을 잡아들이는데 큰 기여를 했으니 이해하면서도 온 신경을 쏟아 붓는 마력연구관 자리에 로젤리아의 정부를 앉힌 페르소나의 심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자업자득, 로웬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 누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정부로 둔 페르소나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그러게 왜 로젤리아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펴? 황후의 자리에 보란 듯이 정부를 앉혀?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이혼한 아내의 정부가 황제의 모든 총애와 관심을 받는 마력연구관이 되었다니.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황후 폐하께서 마법사라니! 그게 진짜일까?”
생각보다 통쾌한 기분에 조용히 웃고 있는데 문득 들려오는 말에 로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 누가 마법사야? 황후 폐하? 로젤리아가 이혼하게 만든, 그 정부?
“진짜겠지, 연구관님께서 거짓말을 하셨겠어?”
“맞아, 연구관님 마법 사용하시는 거 못 봤어? 나는 연구관님 덕분에 5년 동안 연구하던 것을 드디어 끝냈어. 그런 사람이 마법사도 못 알아볼까.”
지금 정부가 마법사라고 한 거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사랑스러운 누이를 괴롭게 만든 그 정부,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찼다.
샤를로테가 마법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로젤리아는?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말로 또다시 로젤리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텐데, 로젤리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것을 밝힌 사람이, 칼라일 그 놈이야? 로젤리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뭔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왜 밝혀도 샤를로테가 마법사인 것을 밝힌 거야!
로웬은 또다시 사교계의 먹잇감이 될 자신의 사랑스러운 누이를 떠올렸다.
“그럼 칭제 이후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는 최초의 마법사 황후이신 거네.”
“그런 셈이지, 이럴 때보면 로젤리아 황후가 가엾다니까.”
“가엾다니? 이혼은 했지만 지금은 대공이고, 무역 상단으로 돈을 쓸어 모으지, 그리고 마력연구관님께서 대공 각하의 정부라며? 연구관님 얼굴 봐 얼마나 잘생기셨어. 그 정도면 세상 다 가지신 거지.”
“맞아, 나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다. 무슨 조각상인 줄 알았다고.”
“그래. 그렇게 잘생긴 정부까지 두었는데. 뭐가 가엾나?”
로젤리아가 가엾다고 말한 연구원이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이 이혼이지 황제 폐하의 총애를 못 받으니까 못 버티고 먼저 나가겠다고 한 거잖아? 그리고…너희들도 알잖아. 유산한 거.”
연구원은 주변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유산이라는 단어는 로웬의 귀에 그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연구원이 유산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로웬은 그 연구원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유산?”
로웬의 눈은 거대한 분노로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산이라고, 누가. 로젤리아가?”
유산과 관련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나? 부풀려진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정말로 아이를 잃었다고?
주먹을 세게 쥔 탓에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던져버린 연구원의 목덜미를 비틀어 쥐었다,
“아는 대로 다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네 목을 꺾어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