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70화 (70/170)

#70화, 길들여진 마수

“마수네요.”

“마수는 오랜만이지?”

“칼라일님도 제 잔소리 안 들은 지 꽤 오래되셨죠.”

칼라일은 미소를 지으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루치아노의 시선을 피했다. 하긴, 갑자기 지하실에서 끌려 나왔는데 마당에 커다란 고양이 형태의 괴수가 있었으니까.

“헬리오도르 저택에 마수가 자주 출몰했으니 별말은 안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저택으로 데려오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루치아노가 저택에 있을 때는 출몰하는 모든 마수들을 담당했잖아?”

루치아노는 칼라일을 향해 코웃음을 한번 치고는 검은색 장갑을 꼈다. 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자 마수는 딱 손 크기로 변해 루치아노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마수가 왜 이렇게 사람을 잘 따릅니까?”

손가락으로 마수의 머리를 쓰다듬자 금세 배를 까고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루치아노는 꽤나 당황한 눈빛으로 손끝으로 조심스레 마수의 털을 고르고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야생의 마수가 아닌 것 같은데…마수가 이렇게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수는 페르소나에게 했던 것처럼 루치아노의 손을 깨문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장난치는 것처럼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루치아노의 손가락을 약하게 깨물었다.

“누군가 길러온 마수라는 소리인가요?”

“이 제국에만 마법사가 없으니 당연히 마수를 담당하는 자들도 없겠죠. 그리고 마수가 이렇게 쉽게 길들여질 리가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마수가 침입했을 때 마수에 눈에 천 같은 게 씌워져 있었죠. 이거 말이에요.”

마수의 눈에는 까만 천이 씌워져 있었다. 피가 묻고 꽤나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천을 루치아노에게 건네자 갑자기 마수가 털을 세운 채 이빨을 드러냈다.

“그냥 피가 묻은 천 같은데요, 그다지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루치아노가 천을 가까이 대자 마수는 몸을 다시 크게 부풀리고는 거대한 발톱을 세워서 천을 갈기갈기 찢었다. 사납게 울부짖으며 작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숨겨질 거라고 생각했나?

마수를 말없이 쳐다보던 칼라일은 마수의 몸에 난 칼자국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바올에 있던 물품 중 하나인 건가….”

돈만 된다면 가릴 것 없이 팔던 놈들이니 마수도 거래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아직 바올에 대한 사건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거래 품목에 마수가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까지 루치아노가 맡아줄 수 있나요?”

“네, 그러겠습니다. 재신 지하실의 공간이 생각보다 적어서…뒤뜰에 따로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러도록 해요.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해요.”

내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칼라일이 꽤나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루치아노를 가만히 응시했다.

“뭡니까, 그 물에 젖은 강아지 같은 눈빛은?”

“내가 부탁했을 때는 잔소리니 뭐니, 사람 귀찮은데 뭘 시키느냐, 그렇게 온갖 짜증은 다 냈으면서….”“제가요?”

“기억 안 나는 척 하지 마, 루치아노.”

“안 그랬어요, 칼라일님. 괜히 투정부리지 마세요.”

칼라일은 냉정하게 받아치는 루치아노와 억울하다는 듯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둘이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라일이 루치아노의 이마에 가볍게 딱 밤을 때리자 루치아노가 ‘미쳤습니까?’ 하며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다, 사실은 정말 형제일지도 몰랐다. 루치아노는 사실 샤를로테와 쌍둥이가 아니라 칼라일의 이란성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리에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 샌가 평범한 고양이 크기로 변한 마수는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내 품에 안겼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지? 정말로 바올에 잡혀있었나? 아팠을 것 같은 상처에 입으로 살짝 바람을 부는 데 문득 박혀있는 낙인하나가 보였다.

굉장히 특이한 무늬의 낙인이었다. 눈에 익숙했지만 어디서 본 것인지는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

역사서에는 안케도니아 황실에 대한 정보가 세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페르소나는 수북하게 쌓인 서적을 덮으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물론 자세하게 적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더욱 황녀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적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안케도니아 제국에는 다른 제국에 비해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나라였으니까.

1황녀에게 부여된 정치권도 말이 정치권이었다. 황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실제로 황녀가 정치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런데 폐하, 왜 갑자기 역사서는 들여다보시는 겁니까.”

“…확인해볼 것이 있다. 역사서는 이게 다 인가?”

“현재 황실 도서관에 있는 것은 그게 다입니다.”

역사서를 더 찾아오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어떤 역사서를 뒤져도 자신 원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마법사다. 황후가 마법사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것을 밝히는 사람이 칼라일이라는 점이었다.

칼라일은 샤를로테의 약혼자였고, 이 제국에 있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마법사를 알아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말 한대로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났다면…그 전부터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샤를로테를 위협할 정도로 싫어한다면 왜 모두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했지? 어찌되었든 샤를로테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을 칼라일이 직접 만든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칼라일의 입에서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칼라일이 위협했다지만 그렇게 무서워한다고? 그 전까지는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았잖아. 오히려 마력연구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논했지.

샤를로테는 이 제국의 최초 마법사 황후가 된다. 샤를로테도 그 정도는 알 텐데. 그 얼굴은 분명 공포였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그러다 문득 탑에서 로젤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위협한 게 아니라,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위협했다는 것.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리나 페르소나는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위협했다는 말을 끝내 믿기로 했다.

만약 샤를로테가 거짓말을 했다면? 로젤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보니 샤를로테에 대하여 아는 사실은, 그녀가 1황녀이고 칼라일과 약혼 관계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의 아는 사실은 없었다. 그래서 혹시 모르니 역사서를 찾아보았지만 나온 것은 없었다. 이상한 점은 바로 잡는 게 좋았지만,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몇 달 뒤면 건국제였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임신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독을 먹은 탓에 몸도 허약해졌는데 스트레스라도 받는다면 정말 유산할지도 몰랐다…아이를 두 번씩이나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따뜻하게 대해줘야겠군. 다시 잘 보듬어주고 그 뒤에 물어보는 게 좋겠어. 그리고….’

페르소나는 생각에 빠진 채 책을 덮었다.

알아낸 것 없이 괜히 기분만 안 좋아졌다. 특히 샤를로테 뱃속에 있을 아이를 떠올리니 더 괴로워졌다.

샤를로테가 아이를 가진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점점 불러오는 배를 볼 때마다 눈앞에 있는 대상이 샤를로테가 아니라 로젤리아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조금씩 머릿속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젤리아가 무덤덤하게 유산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로젤리아는 아이를 좋아했는데. 그것도 무척.

뒤늦게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그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차라리 임신했다는 사실이라도 알았다면 덜 아팠을 텐데. 아니지, 그때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페르소나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역사서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그때 비서가 서적과 함께 건국제 기획안을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폐하. 재무 관리 측에서 올려 보낸 건국제 기획안과 예산안입니다.”

“예산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측정하면 될 텐데.”

“네, 하지만 이번에는 황후 폐하와의 결혼식 예산까지 함께 측정해야 하니 페하께서 결제 전에 먼저 검토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결혼식?”

눈가를 누르던 페르소나는 꽤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일부러 피해왔던 것 중 하나였다.

샤를로테는 임시 황후였다. 정식 황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미룰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건국제는 다가오고, 샤를로테가 마법사라는 게 밝혀졌다. 게다가 황후 교육도 거의 끝마치고 아기까지 가졌으니, 미룰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폐하, 혹시 결혼을 거부하시는 것은 아니죠?”

”….”

”제국의 이미지를 생각해 주십시오. 이혼한 것도 이미 황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마당에 새 황후를 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

페르소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검토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비서를 내보냈다.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쉬고 싶었다. 아니면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거나. 페르소나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다 오늘은 이만 쉬자는 마음에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류를 치우다가 메리골드 고아원에서 보내온 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본다고 하면서 깜빡하고 미뤄둔 편지였다.

그는 편지를 하나씩 찬찬히 읽다가, 또 놀러와 달라는 구절을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잘됐다. 안 그래도 두통도 심하고 기분 전환을 하고 싶던 참이었다. 고아원에 방문 한지도 꽤 되었고, 페르소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다시 펜을 들었다. 질 좋은 종이를 서랍에서 꺼내 아이들이 보낸 편지에 일일이 정성껏 답장을 써주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며칠 이내로 들르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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