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저게 왜 여기에.
그날 왜 페르소나의 부탁을 받아들였을까.
건국제가 진행될수록 나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건국제 때는 워낙 특이한 외국 귀빈을 많이 만났다.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치대는 놈은 또 처음 봤다.
짙은 보라색 머리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손목을 훑는 손이 진득했다. 드레스 소매를 톡톡 건들며 손가락으로 살갗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얽혀온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카니엘 대공….’
그러고 보니 건국제에 온 여성 귀족들이 전부 이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잘생기기는 했다. 잘생기기는 했지만, 이런 행동은 보통 유혹으로 보는데. 유혹…하는 것인가? 나를?
“지금 유혹하는 건가요?”
“그렇게 보이나요? 다들 그러시는군요. 제가, 유혹을 한다고. 원하신다면 유혹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카니엘 대공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또다시 손목 안쪽을 훑는다. 그때 남자에게서 칼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필 입을 맞춰도 칼라일이 한 곳에 하는 것인지.
“필요 없습니다. 친하지도 않은데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칼라일과 비슷한 말투라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손을 쳐내자 남자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놀란 눈치인데.
“뭐……그런 겁니까? 아까 대공의 옆에 있는 남자가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현 황후 폐하이신 샤를로테 레이몬드에 대해서요. 샤를로테는 원래 정부였다. 전대 황후가 이혼을 하면서, 정부가 황후 자리를 꿰차는 꽤나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고.”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나는 이혼한 황후고요. 그래서 어디 한번 넘어오나 해볼까.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면 안타깝군요. 나는 이미 정부도 두었고, 돈도 많고. 남자가 아쉽지 않은 몸이라.”
“그대. 제 말을 먼저….”
“그대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카니엘 대공. 예의를 갖춰주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오해가 되는 행동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죠.”
참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이래서 건국제 때 오고 싶지 않았다. 외국 귀족들은 이혼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다른 황실의 이혼 소식을 알겠어. 내가 대공이 된 것은 더더욱 모르겠지. 그 사건도 있었고 하니까.
외국 귀족들의 눈에 이혼한 황후, 애매한 위치의 귀족처럼 보이겠지. 이혼한 여성은 대부분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니 이렇게 쓰레기 같은 게 꼬일 걸 알고 있었지만…막상 겪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로젤리아 영애.”
“대공.”
“!”
“가넷 대공입니다. 내가 이혼한 것만 들었나 봅니다.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은 건 모르고.”
그의 눈이 커졌다. 여성이 대공씩이나 되는 작위를 물려받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를 지나치려는데 대공이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시선으로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자 조심스레 손목을 놔주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니까 곧바로 사과하는군요.”
“아닙니다,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대공. 제 모국에는 이런 가벼운 스킨쉽이 인사로 취급되었습니다. 손목을 훑는 듯한 행동도요. 이 제국에서는 유혹으로 보일 수 있겠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어느 정도 예절을 배웠어야 했는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대공의 나라가 스킨쉽에 생각보다 개방적인 나라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는 자중했어야지. 그리고 단지 행동만이 기분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칼라일에게 한 행동, 태도. 비꼬는 말. 그 모든 게 기분이 나빴다.
“그럼 꿇어보시겠습니까?”
“네?”
“본인 입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꿇어서라도 사과하겠다고. 못하시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구두로 그의 무릎 안쪽으로 걷어차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란 건지 그 자세를 유지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젤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분노나 살기는 없었다. 감히, 라는 표정도 없었다. 다만, 희열에 차 있었다. 그의 턱을 잡고 올렸다. 충분히 모욕을 주는 행동이었음에도 대공은 오히려 황홀한 듯한 눈빛이었다.
“이 이상의 무례를 저지르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한쪽도 꿇겠습니다. 대공.”
어이가 없어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대공이 살짝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는 처음 보는군요.”
릴리가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더라. 아, 기억났다.
미친놈, 이 남자는 미친놈이었다.
***
바올 사건이 있고 일주일이 바쁘게 흘러갔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슬슬 다가오는 건국제 준비에 새 사업을 추진했다. 릴리에게 상단주 교육을 시키고 여러 파티에 데려가기도 했고,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후 시절보다는 나았다.
건국제 때만 되면 외국 귀빈들에게 초청을 보내고, 건국제 기획안을 짜느라 바빴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언니 이것 봐! 화관이다!”
적어도 이렇게 카렐리아와 놀아줄 시간이나.
“역시 마법사가 있으니까 마법 연구가 걷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황궁으로 가 칼라일이 일하는 모습을 볼 여유가 생겼다.
칼라일은 나와 마찬가지로 쉴 틈 없이 곧바로 마력연구소에 관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페르소나가 괴롭히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칼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못 가 그게 사실임을 알아차렸다. 칼라일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러 황실에 갔는데. 어쩐지 샤를로테를 모시던 시녀 한 명이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아기가 잘못된 건가 싶어 가만히 응시했는데 갑자기 나를 향해 도와달라며 다가왔다.
샤를로테가 귀빈 초청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귀빈들의 이름을 잘못 적어서 보냈다고 한다. 그것도 중간에 오타가 있었으면 모른다. 예를 들어 ‘에스텔 이벨란체’와 ‘로아 세헤라자데’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샤를로테가 에스텔 세헤라자데와 로아 이벨란체로 썼다고 한다.
이게 별일 아닌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큰 문제였다. 흔히 말하는 ‘성의’가 없었다. 보낼 때 아무도 확인을 안 한 것인가? 황후 일이 처음이면 누군가 옆에서 봐줘야지, 심지어 샤를로테가 임신 중이라 황후가 해야 할 업무가 계속 밀리고 있었다.
한참 시녀의 말을 듣는데 문득 칼라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일하면서 잠깐 봤는데 황제 얼굴 볼만 하던데요.’
‘어땠는데?’
‘어….’
잠시 뜸을 들이던 칼라일은 말없이 카렐리아가 뭉개놓은 불쌍한 꽃병의 꽃을 가리켰다.
‘불쌍해 보였다고?’
‘아뇨, 죽어가던데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치아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래서 황후 폐하는 지금 어쩌고 계시니?”
“일은 하시는데…울면서 하세요.”
“그래, 도와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도와주던 이가 있기는 했는데 몸이 아파 쉬면서 홀로 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혼자 하는 게 맞는데, 잠시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끙끙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도 포기할 줄 알았는데 혼자 하겠다고 하는 게 용하면서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내가 쓰던 집무실에 건국제 때마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한 게 있다. 그중에서 외국 귀빈들의 리스트도 있지. 가서 보여드리렴.”
“네, 얼른 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 제국의 이미지라는 게 있었다. 그래도 전 황후였는데 가만 놔두기에는 뭔가 좀 그랬다.
그 후 어쩐지 시종들이 계속 나를 붙잡았다. 이제 곧 건국제고, 이제 슬슬 샤를로테가 빠르게 기획안을 작성하고 결제했어야 했는데 아직 다 끝내지 못해서 늦춰진다고…황실에 온 게 잘못이었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다 내려가 있었다. 실수가 한두 번이 아니었나보다.
이러니 아무도 칼라일을 건드리지 않았지. 숨 쉴 틈도 없이 바쁘니까.
“대공 각하.”
“아, 서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혹시 연구관님을 보러 오신 건가요?”
“한번 봐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칼라일은 어딨죠?”
“연구관님은 새롭게 만든 연구품목을 시험 중입니다.”
연구품목을 시험 중이라고? 누구한테?
“연구품목을 사용해 볼 실험체가 있었나요?”
“아….”
“혹시 칼라일이 자신한테 시험해보는 건 아니죠?”
“저는…팔을 붙들어가며 말렸습니다, 각하.”
서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서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칼라일을 떠올렸다. 그렇지, 보통 연구품목을 자신의 신체에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나를 곁눈질로 살폈다. 서던은 마치 살아있는 얼음 인간을 마주하는 것 마냥 떨기 시작했다.
칼라일에게 분명 말했는데, 다칠 만한 짓은 하면 안 돼. 연구물은 자기 몸에 실험하지 마. 위험하게 혼자 나서지 마. 다 같이 하려고 해. 혼자 하지 마. 그때마다 꼬박꼬박 알겠다며 대답해서 안심했는데…뭐? 연구품목을 몸에 직접 실험을 해?
마력연구소니 크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위험한 짓을 하나 안 하나 감시할 생각이었다.
마력연구소는 총 두 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지상 밖에 설치된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연구, 나머지 하나는 실제로 만든 것을 시험하는 공간.
서던을 따라 지하실 쪽으로 내려가는 찰나, 안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매연으로 뒤덮였다. 순간 바올에 있었던 그 화재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칼라일!”
뭐가 터졌지? 뭐지? 불 마법인가? 치솟는 불길에 서던이 팔을 뻗어 나를 보호하려 했다.
“칼라일! 칼라일!”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 몸이 굳었다. 선대 황제를 처음 알현할 때도 이렇게 굳은 적은 없었다. 소름 끼치는 마력의 기운. 까만 눈동자에 보랏빛이 도는 딱딱한 피부 껍질, 그리고 마력 연구원들을 공격하는 저 괴물은….
“가, 각하, 위험 합니, 히익!”
“서던, 뒤로 물러나세요.”
칼라일이 괴물의 앞을 막아선 채 대치하고 있었다. 잘못된 연구로 인하여 일어난 폭발 따위가 아니었다. 뭐지? 어쩌면 우려했을 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넘겼던 것이 저 앞에 있었다.
왜 저게,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나? 그 순간 괴물의 머리 위로 여러 마법진이 떠올랐다. 얼음 마법이었다.
날카로운 얼음송곳 같은 것이 괴물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기이한 비명을 내며 괴물은 더 날뛰었지만 칼라일이 찔러 넣은 얼음송곳에 의해 피를 흘리며 축 늘어졌다.
바닥으로 붉은색이 아닌, 검은 피가 떨어졌다.
검은 피를 본 순간,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괴물, 마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