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화장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밀어내는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침대로 가 밀어 넘어트리고는 그의 위로 올라가 앉았다. 시트 위로 그가 몸뚱이가 꺾인 꽃처럼 쓰러졌다. 시트 위로 금색 머리카락이 흩뿌려지듯 흩어졌다. 칼라일,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라일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로젤리아님….”
뺨을 쓰다듬자 칼라일은 살짝 미소 지으며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홍조를 띄운 뺨이 사랑스러웠다. 조용히 손을 움직여 그의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칼라일은 내 팔을 꾹 잡았지만 멈추지 않고 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남자 가슴도 생각보다 크구나, 하며 손가락으로 훑었다.
“자, 잠깐만요….”
달뜬 숨을 내뱉는 모습이 참 야했다. 정말로 색정적이었다. 닿는 부위마다 뜨거웠다, 칼라일,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라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손등에 입을 맞추고 진득하게 바라보던 모습은 어디 가고? 뺨에 입을 맞추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잇새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좋아? 속삭이듯 묻자 칼라일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리아님, 부탁이 있어요.”
살짝 상체를 일으킨 칼라일은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며 색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더 만져주세요.”
“…….”
“그대의 손길이라면, 죽어도 좋을 것 같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대로 그의 입을 맞추었다. 칼라일이 내 목을 감싸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아로젤리아님. 일어나셨어요?”
릴리가 밝은 목소리로 커튼을 젖히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경쾌한 아침 인사를 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더듬자 푹신한 베개가 만져졌다. 칼라일은 없었다. 그렇지, 있을 리가 없지.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이전과는 색다른 느낌이 자꾸만 울컥, 올라왔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심장 부근을 세게 두드렸다. 자꾸만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툭, 하고 어떤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쳤나 봐.”
“네?”
“미쳤어, 미쳤어!”
“로, 로젤리아님, 진정하세요!”
이를 악물고는 세게 베개를 내려쳤다. 베개가 터지면서 새하얀 깃털이 펑, 하고 터졌다. 릴리는 놀라 들고 있던 세숫물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깃털이 마치 눈처럼 내렸다.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침대가 순식간에 깃털로 뒤덮였다. 베개는 다 뜯어진 채 축 늘어졌다.
그런 꿈을 꾼다고? 왜? 무슨 이유로? 도대체, 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지금, 이 손으로 칼라일을 침대에 밀어 넘어트리고, 가슴을 더듬고, 입을 맞추고….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베개 하나가 더 찢어졌다. 깃털이 허공을 떠다녔다. 릴리가 비명을 지른다. 칼라일의 붉어진 얼굴이, 달뜬 신음이, 내게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 이불을 팡팡 내려쳤다. 깃털이 바람에 날아다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왜 그런 꿈을 꿔서, 왜!
“로젤리아님?”
지금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고개를 드니, 물에 흠뻑 젖은 칼라일이 보였다. 셔츠가 젖은 탓에 안이 전부 비쳤다.
릴리는 울며 깃털을 줍다가 흠뻑 젖은 칼라일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었다. 그의 손에는 빨래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최근에 하녀들의 일감을 도와준다던데…하지만 지금은 빨래바구니니, 하녀의 일감을 도와주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갈아입어요.”
“아, 갈아입으러 가던 중….”
“안 갈아입으면 다시는 안 볼 거예요.”
“네?”
***
“폐하께서 로젤리아님이 깨어나자마자 칼라일님과 함께 황궁으로 오라고 명하셨어요.”
“….”
“저는 오늘 함께 못 가요. 깃털을 정리해야 할 하녀들을 다독여줘야 해서…이거 수선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천인데….”
릴리는 깃털을 쓸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으며 릴리를 돌아보았다. 미안해, 릴리. 하지만 베개라도 찢지 않으면 대공저를 뛰쳐나갔을 거야….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응시했다. 그러다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귀걸이가 보였다. 아. 시녀가 귀걸이를 보더니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나 내 귀에는 감탄사 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귀걸이를 안 빼고 잤나 싶어 빼려던 순간, 또다시 머릿속이 칼라일로 가득 찼다.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기껏 꾸몄던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졌다. 시녀가 울었다. 릴리도 울었다. 하녀도 울고, 나도 울었다.
“로젤리아님.”
“!”
“오늘따라 더 예쁘네요.”
방에서 나오자 제복을 갖춰 입은 제복을 보며 다시 문을 닫을까 생각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칼라일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생각한 거지만, 참 잘생겼다. 정말 잘생겼다. 상처가 나도 잘생겼구나. 어디 하나 망가진 곳이 없어. 보통 흠이 있기 마련인데 얘는 흠 하나하나까지 모두 예술이야.
‘왜 이렇게 잘생겨서…!’
그 사이, 칼라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신의 뺨을 감싼 내 손에 뺨을 부볐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타난 칼라일처럼. 손끝에 입을 맞춘 칼라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밑에 마차가 와 있습니다. 어서 가요.”
마차에 타는 내내 영혼이 살짝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꿈이니까, 꿈이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마. 그때 방에서 나온 릴리가 칼라일을 불러 세웠다.
“칼라일님, 잠시만 이쪽으로….”
칼라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릴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갸웃거리는 것도 귀엽다. 아, 왜 이러지…어제 일 때문이야…아….
칼라일을 피해 다닐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일단은 칼라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면서 먼저 마차에 가 앉아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기억을 없애는 마법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쯤 마차 문을 열었다.
“아직 안 가셨군요. 다행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루치아노?”
“이걸 드린다면서 깜빡해서요.”
그의 손에는 수정으로 만든 병을 들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이건 마력 회복용으로 만든 겁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드세요.”
“얼굴이 피곤해 보이네요.”
“밤을 새서 그런 것 같아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루치아노는 고개를 돌린 채 어서 마시라 재촉했다.
“마력 회복용이란 게 뭔가요?”
“마력 농축액, 들어보니 말 그대로 마력을 날것으로 농축해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마력의 흐름을 다시 바로 잡아주는 약입니다. 어서 드세요.”
루치아노는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되도록 빨리 마셔야 했어요. 마력의 흐름이 계속 흐트러진 상태로 있으면 마력 컨트롤에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마력 농축액이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천연 마력석을 이용해 이론만으로 그런 물건을 만들어 내다니, 그야말로 천재군요. 실험과정을 더 거쳐야겠지만.”
조용히 병 안에 든 걸 마셨다. 살면서 이렇게 쓴 건 처음 먹어본다. 하지만 다 마신 순간 마력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또다시 마력농축액을 섭취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루치아노가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날것의 마력이 로젤리아님의 몸에 적응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너무 어지러우면 말씀하세요.”
지난번처럼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숨쉬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심지어 저번보다 보는 범위가 넓어진 것 같았다. 루치아노는 몸을 받혀주며 등을 토닥였다. 마력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돌고 있었다. 대공저에서 황실까지, 다시 수도 한 가운데에서, 집으로….
루치아노를 따라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통증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쩐지 시야가 더 또렷해진 느낌이었다.
“로젤리아님의 마력은 현재 저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대와 비슷한 수준이라고요?”
“네. 그러니 마법을 쓰시게 될 경우,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루치아노와 비슷한 수준이라니. 얼마나 많은 마력을 섭취했던 거지? 그때 방에서 흐릿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력이 많아진 탓에 마력의 기운까지 느낄 수 있게 된 건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뭔가 몸 안에 다른 무언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루치아노.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군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로젤리아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게 참 많거든요.”
“나는 그대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는데.”
그 말에 루치아노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순간, 루치아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슬퍼 보이면서도 한없이 기뻐보였다. 꽤나 눈부시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루치아노를 만난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로젤리아님, 루치아노.”
칼라일이 마차로 다가왔다. 루치아노는 잠시 지었던 미소를 빠르게 지워버렸다.
“황궁에 가서 사고 치지 마세요, 마법 쓰지 말고요. 아시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당연한 걸 자꾸 물으십니다. 정말 피곤해 죽겠네요. 나이는 먹었으면서 하는 짓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정말.”
고개를 젓는 루치아노는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못했다. 순간 희미하게 지었던 그 미소가 뭘 뜻하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기뻐 보인다 하기에는 슬픈 얼굴이었고, 한편으로는 괴로워 보였다. 내가 뭘 해줬지? 칼라일을 만나게 해준 것? 카렐리아를 찾아준 것? 그밖에 한 것은 없는데.
그때 옆에 칼라일이 앉았다. 맞은편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마차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에 둘만 남자, 다시금 꿈이 떠올랐다. 문득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빠르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마력회복용 약을 먹었습니다.”
“아, 그랬나요? 다행이에요. 루치아노가 만드는 약은 효과가 좋죠.”
“그런데 내가 마력농축액을 마신 것은 어떻게 안 걸까요.”
“제가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루치아노가 마력회복용 약을 만든 것입니다.”
“칼라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바올에서 빠져나온 날, 황제 폐하에게 들었거든요.”
최대한 칼라일과 닿지 않게 몸을 돌리려다, 황제 폐하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 아니. 페르소나를 만났나요?”
“사이좋게 얘기도 했습니다. 황실에서 있었던 일도 모두 들었고요. 그리고 제가 한 행동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습니다. 로젤리아님이 그때 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셔서 주변을 못 보셨나 보네요. 제가 그때 마법으로 지하실 전체를 땅 위로 끌어올리고 주변 건물까지 모두 없애버렸거든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독 때문에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루치아노가 가서 사고 치지 말라는 말을 했구나. 괜히 걱정하던 게 아니었어.”
“….”
“그래서, 페르소나와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예요? 페르소나가 나 말고 그대까지 부른 거, 바올 때문만이 아니죠? 마법 때문에 부른 거예요?”
마차가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칼라일의 표정이 물에 젖은 강아지 마냥 변해있었다.
“왜 자꾸 루치아노와 그 망할 페르소, 아니 황제 얘기만 꺼내요….”
“칼라일이 저지른 일의 규모가 너무 커서?”
“…그, 그래도 저와 있을 때는 그 두 사람 얘기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 순간 칼라일이 가까이 나의 몸과 닿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얽히듯 감싸 쥐는 손길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제가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칼라일, 잠깐.”
“어제 그랬잖아요. 제가 레오가 되어드린다고요.”
그제야 꿈과 함께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눈앞으로 스치기 시작했다. 레오가 되어준다고, 그러니 사랑해도 되냐고 물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그런 달빛을 등진 칼라일이 너무 아름다워서. 칼라일의 대한 내 마음을 인정해서, 그때, 나는.
“그대를 사랑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였었다.
“자꾸 다른 남자 얘기를 하면 제가 너무 속상합니다.”
“….”
“차라리 혼내세요. 어떤 방식으로 혼내도 좋으니까.”
살짝 웃는 표정이 무척이나 야했다.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워한다고, 수줍어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홍조를 띄운 얼굴이 너무 야했다. 꿈속에서 밑에 깔린 채 숨을 내뱉던 모습과 겹쳐졌다. 마차 안은 좁고, 숨결은 그대로 느껴졌다.
품에 파고들며 떨리는 숨을 내뱉는 칼라일을…눕히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충동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밀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 자, 잠깐……로, 로젤리아님?”
등 뒤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고개를 다시 칼라일 쪽으로 돌렸다. 칼라일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내 손은…칼라일의…가슴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흐읏.”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잡자 칼라일은 고른 숨을 내쉬었다. 아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대공?”
마차 문이 열렸다. 문제는 문을 연 사람은, 마부가 아니라 페르소나였다.
언제 도착한 거지? 왜 네가 거기서 나와. 페르소나, 너 황제잖아. 어떤 황제가 직접 마차 문을 열어.
그 순간 마부를 붙잡고 묻고 싶어졌다.
이 근처에 뛰어내릴 만한 곳이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