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대를 사랑해도 좋다는 허락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심지어 등도 욱신거렸다. 아, 그래. 등, 독이 묻은 검이 박혔었지. 몸을 살짝 움직였다. 독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탓인지 뼈가 부서진 것 마냥 아팠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보자. 검에 맞은 뒤로 기억나는 건 거의 없었다. 세르빈과 대치하던 칼라일, 어찌어찌 밖으로 나온 것 같았는데. 그때 칼라일의 표정이 슬퍼보였지. 그 뒤 황궁의에게 안겨 해독치료를 받던 게 기억이 난다. 시종들이 몸을 씻겨주던 것도….
‘…칼라일은 어디 있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등과 복부에 난 상처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누군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누구 손인가 싶던 찰나 칼라일이 의자에 앉은 채 잠든 게 보였다.
저런 불편한 자세로도 자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가에 상처가 있었다. 붕대가 안 감긴 곳이 없었다. 나를 지키려다 이렇게 다친 건가 싶어 속상한 마음이 들던 찰나 칼라일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로젤리아님….”
“내가 깨웠나요?”
“아니에요…깨우지 않았어요.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칼라일은요?”
대답 대신 칼라일은 내 손에 뺨을 얹었다.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상처가 많은데 괜찮냐는 물음은 좀 이상했나 싶었던 순간 칼라일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손목에는 마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손목.”
“네?”
“손목, 어떻게 된 거에요? 이제 괜찮아요?”
그렇게 칼라일을 괴롭게 하던 손목이 사라져있었다. 놀란 눈으로 칼라일을 바라보자 그의 눈가가 곱게 휘었다. 풀렸어요. 그 한마디에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지만 그건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수갑이 풀렸다. 그를 그토록 괴롭히던 수갑이! 칼라일의 손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행이에요.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대 덕분이에요.”
“아, 카렐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루치아노에게 치료를 맡겼어요. 그것도 그대의 덕분이죠.”
칼라일의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로젤리아의 손 위를 가볍게 뛰어놀았다. 온몸을 욱신거리게 만들던 통증이 차츰 가라앉았다.
“마력이 돌아오고 있는 상태라 당장의 치유 마법을 무리지만 통증은 줄여줄 수 있어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죠.”
그대 덕분에 소중한 젓을 전부 찾았는걸요.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는지 알았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칼라일을 끌어안았다. 축하해요.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웃어보였다.
동생을 얼마나 찾고 싶어 했는지 나는 안다. 그렇게 아끼던 동생인데. 얼마나 찾아주고 싶었는데. 좀 더 빨리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었다.
“…그대를 만난 게 얼마나 축복 같은지.”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뺨을 콕 찌르자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짜에요. 그대를 만나서 너무 다행이야.”
“그래요?”
“나한테 이렇게 조건 없이 아껴준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고 그대가 처음이거든요.”
“무슨 소리에요?”
“가문 사람들을 전부 다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내 품으로 파고들며 칼라일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못됐다니. 그에게 들었을 때는 자유롭게 평온한 분위기를 가진 가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등을 토닥여주자 칼라일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가문 내에서 변종과 비슷했어요. 진즉에 대마법사가 되었어야 하는 마력을 품었으면서도 몸이 약한 탓에 제대로 쓰지 못했죠. 모든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몸에 곧바로 무리가 오는 탓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조차 없었죠. 집안사람들은 괜찮다, 괜찮다 해줬지만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마법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 하니까요.”
“나는 잘 몰라요. 마법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큰 문제인가요?”
“제 가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황실에서 일하는 귀족 몇 명만 우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죠. 황실과 이어져 있었고, 돈은 황실에서 꾸준히 받고 있었으니까요. 마법사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잖아요? 그렇기에 황실은 최대한 우리에게 모든 걸 맞춰주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무척이나 싫어했죠. 흠을 잡아내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든 깎아내려고 했죠.”
등을 두드려주던 손이 우뚝 멈췄다. 칼라일은 그런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는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조금…외로웠습니다.”
“그럼 내 사람이 필요했겠군요.”
“네?”
“내 말이 맞죠? 부모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했죠? 온전히 내 편을 들어줄 사람, 그게 동생이었고, 루치아노였나요? 샤를로테를 찌르지 못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요? 한때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칼라일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였다. 아이 달래듯 칼라일을 위로했다.
원치 않게 예비 황후가 되어 어릴 때 사교계에 입성한 나, 가문에서 변종 취급받았던 칼라일, 참으로 비슷했다. 내 사람을 얼마나 원했는지 잘 안다. 내 사람만큼 소중한 건 없었다. 사방이 적인 사람에게 순수한 호의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 모든 걸 내줘도 모자란 기분일 것이다.
칼라일도 그랬겠지. 루치아노가 소중했겠고. 카렐리아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한때 샤를로테도 그랬겠지. 그런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니….
“그대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내 이야기를 해줘야겠네요.”
“어떤 이야기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대에서 작은 장미색 보석함을 가져와 칼라일에게 건넸다. 보석함과 로젤리아를 번갈아 바라본 칼라일은 조심히 보석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아주 화려한 샹들리에 귀걸이가 들어있었다. 물방울 보양의 보석과 섬세하게 조각한 금빛 보석이 장식으로 달려있는 것.
“나는 레베카가 마음에 들어요. 비록 위장 신분이었지만, 좋았어요, 자유롭잖아요. 레베카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이 샹들리에 귀걸이가 정말 잘 어울렸을 거예요.”
“귀걸이가 참 예쁘네요.”
“맞아요. 예쁘죠. 한 번도 차보지 못했죠.”
“왜요?”
“내가 이 귀걸이를 받은 건 황후가 되기 1년 전이었거든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죠?”
황후는 1년 전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교계에 나가되 흠이 잡힐만한 걸 만들면 안 되고, 언제나 우아한 몸짓과 기품을 유지해야 한다.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고 남자와 닿는 것은 절대로 금한다. 황후는 황제를 보필하고 황자를 낳아야 할 몸이니.
“사치스럽다고 소문이 나죠. 몸가짐을 단정히 못 하고,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 떠돌죠.”
“….”
“내 집무실에 있는 역사서를 읽은 적 있죠? 우리 가넷 가문은 가장 먼저 태어나는 여자아이가 다음 세대의 황후가 되어요. 어릴 때부터 황후 교육을 시키죠. 제대로 못 하면 크게 혼이 났어요.”
치마를 살짝 들추자 왼쪽 발의 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잘하지 못한 탓에 크게 혼이 났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도망친 곳은 하녀들의 부엌이었다. 숨을 곳을 찾다가 끓는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엎은 탓에 발에 화상을 입었다. 화상 치료 후 어떻게 되었더라? 아, 혼났지. 우아하게 걸어야 하는데 다 큰 개 마냥 뛰어다녔다고.
“그러니 레베카가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
“레베카는 몰락한 귀족이지만 몰락하든 말든 신경을 안 써요. 명예는 중요하지 않죠. 자유롭게 사는 것만 중요해요. 그러면서 일도 잘해서 재산도 풍족해요.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조금 미쳤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고요.”
샹들리에 귀걸이를 매만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이 귀걸이를 차면 분명 소문이 돌 거예요. 어떤 소문이 돌까요? 일단 사치스러운 여성이라는 단어는 무조건 붙겠죠. 그 뒤로 가문을 깎아내린다는 말을 듣고, 수치라는 말도 듣겠죠. 나는 레베카처럼 그들을 무시할 수 없어요. 나는 황후였지만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았거든요.”
샹들리에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집어든 칼라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그대를 레베카로 만들어줄게요.”
레베카로 만들어준다니?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그는 샹들리에 귀걸이를 천천히 그녀의 귀에 걸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귀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예쁘다.”
“!”
“잘 어울리네요.”
귓가에서 찰랑거리는 귀걸이를 매만졌다. 잘 어울려요? 작게 묻자 칼라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볼래요? 그는 나를 안아들어 화장대 앞에 앉혔다. 귀걸이에 달린 파란 빛의 보석이 부딪혀 청아한 소리를 냈다.
거울에 비치는 귀걸이를 만졌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생각보다 붉은 머리카락과 참 잘 어울리는 그런 귀걸이였다.
“레베카는 아름다웠죠. 그리고 일도 잘해요. 돈도 잘 벌고. 로젤리아씨와 똑같네요. 로젤리아님이 명예를 중시한다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 괜찮아요. 이제 남은 것은….”
“레오는요?”
“!”
“레오는 어떻게 할 거에요? 내가 레베카면, 그대가 레오인가요? 레오가 되어줄래요?”
농담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레베카를 죽도록 사랑하는 레오. 레오도 자유롭죠. 오만한 것은 조금 그렇지만 아내를 내 부인, 내 사랑이라고 부르면서 레베카가 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사랑하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내가 레오를 해주죠, 라며 웃으며 되받아칠 줄 알았다.
거울에 비친 칼라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어디가 불편한가 싶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으려던 순간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이 보였다.
“레오여도 괜찮아요?”
“네?”
“제가 정말, 그대의 레오여도 괜찮아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은빛 눈동자가 어쩐지 무언의 욕망에 젖어든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어쩐지 목덜미가 더웠다. 그 순간,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페르소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을 정말로 사랑해?’
왜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거지?
얼굴이 새빨개질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칼라일을 마주하기가 버거워졌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로젤리아님.”
평소에 수십 번도 더 듣는 이름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레오는 레베카만을 사랑해요.”
“칼라일.”
“내가 레오가 되려면, 나는 그대를 사랑해야 해요.”
“자, 잠깐.”
“레오가 되어줄 거냐고 물었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뺨에, 입술에 닿았다.
나는 입술에 닿은 감촉을 매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다시 한 번 나에게 입을 맞췄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칼라일이 가까이 다가왔다. 손이 닿고,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등에 화장대가 닿았다. 화장품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팔에 기댄 채 나도 모르게 달뜬 숨을 내뱉었다.
“레오가 되어줄게요. 그러니까….”
그의 입술이 닿는 부위가 너무 뜨거웠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이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