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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62화 (62/170)

#62화,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목구멍이 먼지로 뒤덮인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불바다였다. 보라색 벨벳 천에 불이 붙은 채 타오르고 있었다.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살짝 움직였다.

몸은 바윗돌이 내려앉은 것 마냥 무거웠다. 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땅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지만…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얼굴 근처에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칼라일이 나를 안고 있다, 머리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카, 칼라일….”

“로젤리아님, 미안해요, 출구 찾으려는데, 출구가 막혀서…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줄래요?”

한쪽 눈을 다치기라도 했는지 왼쪽 눈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놀라 칼라일의 뺨을 부여잡았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입구가 무너진 천장 부산물로 막혀 있었다. 부산물 밑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무너지던 천장 사이로 새어나오던 불길이 떠올랐다. 칼라일이 감싸 안았지. 품 안에서 누군가가 계속 꿈틀거렸다. 카렐리아였다. 정신을 잃은 카렐리아의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있었다. 나는 카렐리아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세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칼라일이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아윽, 아.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보니 어깨 부분이 피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칼라일, 나를 내려줘요. 어서!”

“싫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둘 다, 지킬 것입니다.”

그 말에 카렐리아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칼라일은 문을 부수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불이 점점 치솟았다. 어서 나가야 하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칼라일은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법을 쓰기도 전에 주저앉았다. 손목이 잘려나갈 것처럼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주변으로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칼라일.”

“젠장, 도대체…왜!”

“칼라일, 그만, 진정해요! 이런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어요!”

손목이 잘려나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계속 마법을 쓰려고 했다. 눈에 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되고 있었다.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손목 주위로 긴 상처가 생겨났다. 피가 배어나오는 걸 본 순간, 나는 칼라일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팔을 꾹 누른 채 살짝 떨었다.

“윽!”

그때 내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복부가 욱신거렸다. 겉옷을 들추니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혀있었다. 욱신거렸다.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며 쇳조각을 빼냈다.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몰려왔다. 칼라일은 다급하게 치유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아요, 그만해요. 괜찮아.”

“…왜 나는, 도움이 안 되는 건지. 이딴 마법 때문에!”

칼라일은 자신의 손목을 뜯어냈다. 마법을 지워내려는 듯 손톱으로 손목을 긁어냈다.

피가 흐르는데도 계속 긁었다. 그런 칼라일을 말리려고 애를 썼지만 칼라일의 눈은 서글프다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 때문이잖아요. 손목이 잘려나갈지도 몰라, 그만해. 칼라일 제발!”

“그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입니다!”

“왜 나를 지키려는 건데요?”

“그대는 지금껏 나를 지켰잖아요.”

눈에서 피가 흐른다. 피가 섞인 눈물을 흐른다.

“나만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

“더 이상 나로 인해 그대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칼라일을 끌어안던 손이 멈췄다. 칼라일은 나를 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에 흐르는 피가 시야를 붉게 물드는데도 그의 은빛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무어라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치솟는 불길이 크게 일렁였다. 불이 꼭 핏빛이었다. 꼭 나를 지킬 필요가 있어? 그럴 필요 없어. 왜 그렇게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이유가 뭐야? 재가루가 눈앞으로 지나갔다. 왜 그래? 도대체 왜? 입술을 꾹 물었다.

그 순간 불길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갈라졌다. 무언가 그의 등 뒤로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칼라일의 손이 더 빨랐다.

세르빈이다. 검을 들고 온 세르빈의 눈은 이성을 완전히 잃은 짐승처럼 보였다.

세르빈이 내리친 검은 칼라일의 팔에 박혀있었다. 나를 향해 내려친 검을 제 몸으로 받아친 것이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칼라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로 검을 쳐냈다.

“너만큼은.”

“…….”

“너만큼은, 죽일 거야, 로젤리아 가넷. 무조건 너 죽일 거야. 나는 후계자 자리도 잃었고 사랑하는 동생이 가문에서 버려지는 걸 눈앞에서 지켜봤어. 바올도 망쳤으니 이제 나도 버려지겠지. 그러니 너라도 죽일 거야. 너라도…!”

세르빈이 검을 퍽퍽 내려쳤다. 칼라일은 계속 팔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피 묻은 살점이 바닥으로 튀었지만 칼라일은 검의 칼날을 손으로 움켜쥔 채 세르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지?”

“이거 안 놔? 한낱 정부가…!”

“바올이고 뭐고, 그럴 거면 더 확실히 했어야지. 안 그래? 그렇게 후계자 자리가 중요하고, 사랑하는 네 동생을 다시 거둬들이고 싶었다면 더 확실하게 했어야지.”

“확실하게? 하, 그래. 확실하게 말이지. 그래도 확실하게 한 건 하나 있어.”

칼라일의 손에서 검을 빼내려 애를 쓰던 세르빈은 사납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품속에서 검을 꺼내 나에게 던졌다. 정확히는 내가 안고 있는 카렐리아를 향해. 평소였다면 칼을 피하거나 쳐냈겠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몸을 돌려 카렐리아를 끌어안았다. 등에 검이 박혔다.

“윽…!”

“그 검에 독이 묻어있어. 나를 죽이는 게 빠를까, 독으로 죽어가는 로젤리아의 최후를 보는 게 빠를까?”

뜨거운 고통에, 숨이 막혔다. 칼라일은 이를 으득 갈며 칼날은 꽉 움켜쥔 채 세르빈을 벽으로 밀쳤다.

“너도 참 멍청하네.”

“….”

“너 마법사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누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네. 나도 모든 걸 망쳤지만 너도 똑같아. 제 사람 하나 못 지키는 꼴하고는!”

“….”

“심지어 네 동생이라는 저 애는 저 년이 지켰네? 네가 아니라.”

칼라일에게 세르빈의 말 따위 듣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독 때문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빠오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몸이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진동이.

“…그래, 네 말이 맞아.”

“!”

“이깟 마법이 뭐라고. 겨우 이 정도의 마법이 뭐라고.”

바닥에 무늬가 떠올랐다.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마법진.

“손목이 잘려나가는 고통이 뭐가 어때서.”

땅이 흔들렸다. 땅이 흔들리다 못해 갈라졌다.

“로젤리아님을 위해서라면 손목이 잘려나가는 것 따위,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세르빈은 몸을 크게 휘청거리며 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세르빈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땅이 이렇게 흔들릴 리가 없잖아. 이 커다란 마법진은 뭔데? 세피노가 보여준 마법 서적에서도 이렇게 큰 걸 본 적 없었다. 이렇게 복잡한 문양도!

“내가 멍청했어. 이 따위 고통, 이미 많이 겪어왔는데….”

손목을 매만지자 시퍼런 마력에 손목뿐만 아니라 온몸을 옭아맨 것이 보였다. 마법을 쓴 탓에 거의 다 해체했던 마법이 강해져 칼라일을 옥죄고 있었다. 살갗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로젤리아님을 위해서라면, 손목 같은 것은, 직접 잘라낼 수도 있어.”

그 순간 엄청난 중력이 세 사람을 찍어 눌렀다. 세르빈은 그대로 무너져 주저앉았다. 겨우 고개를 들어 칼라일을 보았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런 표정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라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라일은 느릿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칼라일은 죽을 것 같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괜찮아. 숨이 쉬어지지 않고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폐가 찔리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괜찮아, 라고.

“맞아요. 괜찮아요.”

“….”

“이제, 괜찮을 거예요.”

몸이 으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굉음이 들려왔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에 몸을 압박하는 무언가가 사라지자마자 세르빈은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그 굉음 이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르빈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기사들이 있었다. 로웬과, 페르소나도.

저 사람들이 왜 여기 있지? 분명 불길이 솟구친 공간에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은 이미 꺼져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보라색 벨벳 천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칼라일은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거대한 지하실을 통째로 땅 위로 끌어올렸다. 아예 공간 자체를,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하게, 그리고 땅 위에 있던 주변 건물을….

“로젤리아님.”

전부 없앴다.

“이제야 도움이 되어서 미안해요.”

살포시 웃는 칼라일의 손목에서 밝은 빛 하나가 형형히 빛을 내다가 사라졌다. 그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소름끼치는 마력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

기사들은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는 귀족들과 도망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로웬의 지휘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잡혀있던 사람들도 모두 구해냈다. 정말 희귀 종족에, 불법적으로 갈취한 보석들. 심해에 사는 인어들까지….

황궁의를 불러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게 치료실로 보냈다. 회수 목록을 작성하고 잡힌 귀족들의 가면을 벗기고 곧바로 신상을 확인했다. 이미 몰락한 귀족들부터 사교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황실에서 종종 본 이들도 있었다.

페르소나는 직접 지하실로 들어가 잡힌 사람들의 쇠사슬을 풀고 부축했다. 돕는 내내 심장이 아려왔다. 좀 더 신경 썼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다 못나서 그런 거야. 내가 일을 좀 더 잘했다면, 더 신경 썼다면….

“폐하!”

날카로운 음성에 뒤를 돌았다. 잡혀있던 이들 중 한 명이 기사들을 제치고는 벽에 걸려있던 등불을 벽으로 던졌다. 그 순간 벽에 불이 붙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들어올 때 느껴지던 이상한 냄새가 이 기름 냄새였나?

보라색 벨벳 천이 타닥, 소리를 내며 타자 안쪽에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안쪽에 있는 비밀 공간.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안쪽에까지 불이 붙었는데, 저 안에 누가 있을까? 주변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돕느라 잊고 있던 두 명이 떠올랐다.

설마, 로젤리아가 저 안에 있을까?

“로웬 경!”

“네, 폐하.”

“로젤리아는?”

로웬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불타버린 천 뒤로 드러난 공간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로젤리아!”

“폐하, 안됩니다. 불이 안쪽까지 전부 번졌습니다!”

당장이라도 불길로 뛰어들 듯한 그를 막아선 건 로웬이었다. 비키라는 황제의 명을 거절한 채 페르소나를 말렸다.

로젤리아에게 했던 바올의 중심부에 관한 얘기. 그렇다면 분명 로젤리아는 저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불길은 치솟고, 다른 사람들을 어서 밖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너의 누이가 저기 안에 있다, 비켜!”

“…죄송합니다, 폐하. 어서 폐하를 모셔라, 사람들을 대피시켜!”

이를 악물고 기사들에게 지시하던 순간, 땅이 흔들렸다. 누군가 일부러 땅을 뒤흔드는 듯한 느낌에, 서둘러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들려온 굉음에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그런데 문득 서늘함을 느꼈다. 주변이 너무 휑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도, 분수대도, 마치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그때 다시금 땅이 흔들리더니 갈라졌다. 갈라진 땅 속에서 나온 건, 네 면이 모두 가로막힌 커다란 박스였다. 그 순간 벽이 허물어졌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로젤리아를 끌어안고 있는 칼라일과 세르빈이었다.

“…로젤리아님. 이제야 도움이 되어서 미안해요.”

로젤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그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제야 칼라일이 마법으로 거대한 지하실 자체를 땅 위로 끌어올렸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칼라일밖에 없었다.

“황궁의를 불러주시겠습니까?”

가만히 서있는 로웬은 겨우 정신을 차리며 황궁의를 불렀다. 칼라일은 황궁의들에게 로젤리아를 안겨주고는 곧장 페르소나에게로 걸어왔다.

“폐하.”

“….”

“제가 지금부터 제안을 하나 하려 합니다.”

어쩐지 로젤리아를 닮은 듯한 그 미소에 페르소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디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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