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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61화 (61/170)

#61화, 너의 목숨 값

물건들이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 회수 목록에도 없던 물건들이었다. 심지어 지금 앉아있는 의자도 동물 가죽으로 만들었다. 가면을 쓴 상태인 게 얼마나 다행이고 또 다행인 건지…칼라일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팔을 끌어안고 뺨을 부볐다. 레베카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눈앞에서 고통 받는 것들을 보니 절로 눈가가 시큰거렸다.

눈 색이 특이하다 해서 잡혀 온 아이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남짓해 보였다. 그 옆에 앉아있는 여성은 피부 위에 수정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인어 하프? 다른 종족과 섞인 혼혈도 많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때렸는지 성한 곳이 없었다. 하나같이 어깨를 움츠리고 떨고 있다. 그중에 몸에 수정이 돋은 여성은 눈 색이 특이한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물건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아주세요.”

사자 가면을 쓴 남자가 다가와 제지했지만 나는 품에 있는 금화를 얼굴에 쓰레기 버리듯 내던졌다.

“비키지 않으면 그 금화를 목구멍에 쑤셔 넣을 거야. 비켜.”

아이의 엄마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에게 손을 뻗자 다른 사람들도 아이부터 감쌌다. 왜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이지? 이런 경우 공포에 휩싸여 자신부터 챙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눈 근처에 있는 생채기가 보였다. 도대체 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역시 부인은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

“그 아이, 릴의 마지막 후손이랍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마지막 남은 릴들이 정말 자살이었을까, 하는….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네. 어떻게 그러지?

어쩌면 진즉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플로트 가문은 그렇게 영향력이 없는 가문이었다. 이미 불법 밀수업으로 한번 무너졌었다. 그런 가문이 어느 날부터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이고 다른 귀족들이 떠받들어주기 시작했다. 몇몇은 일부러 아양을 떨면서 달라붙기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며 넘겼다.

블랙던, 스블루, 바올. 굳이 노예시장을 열 필요 없지. 직접 돈을 받고 구해다 줄 수 있었을 거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보석이든. 릴의 마지막 후손까지 잡아둔 마당에 뭘 못 구할까.

사람의 탐욕이란 게 끝이 없었을 텐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 플로트 가문이 왜 갑자기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이 자리 잡았는지.

그런 추잡한 짓으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으면서…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가져와 안에 있던 걸 모두 바닥에 쏟아냈다. 모두 천만 골드. 바닥에 쏟아진 거액에 피앙세…세르빈은 몸을 움찔거렸다. 여기 있는 물건들을 전부 팔아도 천만 골드 정도의 거액은 못 벌 테니까. 나는 골드를 발로 툭 치며 앞에 놓인 사람들과 물건들이 하나씩 가리켰다.

“전부 사가겠어. 여기 있는 물건 전부. 천만 골드면 되겠지?”

“그럼요, 부인.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짐짝 옮기듯 문밖으로 끌려 나갔다. 로젤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는 그들의 비명소리를 귓가에서 지웠다.

그 사이 세르빈은 내가 제시한 거액에 놀란 것일까. 천만 골드, 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아무리 희귀품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한 번에 통 크게 거액을 쓰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을 테니까.

세르빈과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몇 명의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사고판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인, 정말 희귀한 물품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때 세르빈이 손짓을 하자 무장을 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철컥, 하고 문이 잠겼다. 그러나 나와 칼라일 둘 다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을 기다렸다.

- “로젤리아님. 그들은 최상품으로 취급하는 걸 쉽게 내놓지 않을 거예요. 특히, 어린 나이임에도 마법사인 제 동생은요. 아마 카렐리아는 잡히기 전 도망치기 위해 마법을 썼을 거예요. 그리고 그걸 봤다면 아마 가장 희귀품목으로 취급하고 있겠죠. 레이몬드 제국에는 없는, 마법사니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귀족 부부에게 팔 거예요.”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 아이를 귀족에게 넘길 거다. 그럼 귀족 부부는 자신의 아이인 척 황실에 마법사가 태어났다고 말하겠지. 세르빈은 입을 다무는 대가로 돈을 받고.

“희귀한 물품?”

“네, 부인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거랍니다.”

칼라일도 마지막 희귀 물품이 카렐리아임을 눈치챈 것인지, 지금껏 띄우고 있던 미소는 싹 사라진 상태였다.

문이 열리고, 마치 동물 우리 같은 철장으로 가로막힌, 작은 상자가 들어왔다. 그 안에는…카렐리아가 있었다.

“마법사 아이랍니다. 부인.”

철장에는 가시가 달려있었다. 카렐리아는 그 안에서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떨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팔 이곳저곳에는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철장 바닥은 피투성이였다. 아예 움직이지 말고 전시품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듯, 가시는 카렐리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순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처럼 보였지만, 겨우 버티고 있었다.

“마법사 아이만 있으면 돈, 명예 바로 잡을 수 있지요. 정말 희귀품이랍니다. 부인. 자신의 아이인 척 황실에 알려 돈을 뜯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마법을 부리게 함으로서 관광용으로 쓰이게 할 수도 있죠. 저희도 이 아이에게 재롱을 부리게끔 하려 했지만 얼마나 말을 안 듣던지.”

철장의 문이 열리자 카렐리아는 도망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세르빈은 그런 카렐리아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라일은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이거 놔, 이 마녀야!”

“성질은 조금 더럽지만 충분히 길들일 수 있습니다.”

“놔, 언니가 데려오기로 했어! 나한테 손대지마 이 거지야!”

카렐리아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면서 세르빈의 얼굴을 할퀴기 시작했다. 가면이 벗겨지려 하자 세르빈은 카렐리아의 금색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카렐리아는 그 순간에도 눈물 한 방울은커녕 오히려 세르빈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언니가 누군데. 데리러 온다면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안 데리러 왔잖아.”

“데리러 올 거야! 데리러 온다고 그랬어!”

그 순간 카렐리아의 손끝이 살짝 빛나더니 손등 위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을 쓰려는 건가 싶던 찰나, 바닥으로 피가 떨어졌다. 카렐리아의 손목에서 피가 한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카렐리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마법도 쓰지 못한 채 주저앉아서 울었다. 아프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력 제어 수갑 때문에 마법을 못 쓴 거야. 카렐리아는 손목을 꼭 쥐고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애가 우는데도 세르빈은 시끄럽게 우는 벌레를 보는 것처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마력 제어 수갑을 채웠어?”

“네?”

“애한테 마력 제어 수갑을 채운 거냐고 묻잖아.”

이를 갈았다. 칼라일의 손에 채워진 마력 제어 수갑과는 달라보였다. 저걸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에게, 그것도 이제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고 싶었어?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고 싶었냐고.

“마력 제어 수갑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십니까? 정말 어려웠어요. 이 제국에는 아시다시피 마법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마력연구원에게 거액을 주고 제작했답니다.”

“이제 일곱 살한테?”

“어차피 팔 물건인데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요, 부인. 고분고분하게 만들어놓으면 그만인걸.”

팔 물건이라…작게 중얼거리자 세르빈은 곧바로 오천만 골드를 제시했다. 오천만 골드, 만약 그저 희귀품이었다면 혀를 내두르면 사지 않았을 테지만, 카렐리아는 마법사 아이였다.

아마 이 자리에 나와 칼라일이 없고 다른 귀족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집을 팔아서라도 사겠지. 그리고 제 말을 듣도록 카렐리아를 학대했을 거야.

우리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카렐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채찍으로 맞고, 발로 채이고, 그렇게 칼라일을 찾으며 울겠지. 죽었을지도 몰라. 이제 일곱 살이잖아. 그 모진 학대를 견디지 못했을 거야. 아니면 또다시 저 철장에 갇혀 이리저리 물건처럼 옮겨 다녔을 테지.

“다시 제시해.”

“…레오.”

“가격, 다시 부르라고.”

끔찍한 상상에 식은땀이 흐를 때쯤, 칼라일이 카렐리아에게 다가가 뺨을 쓸어주며 말했다.

“오, 오천만 골드 이하로는 절대 못 넘겨드립니다.”

칼라일이 뺨을 쓸어주자 카렐리아는 울음을 뚝 그친 채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굵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오, 오빠? 가면을 썼음에도 제 오빠인 걸 알아본 것일까? 칼라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울음을 터트리며 칼라일에게 안겼다.

“내가 지금 카렐리아의 가격을 제시하라고 한 것 같아?”

“그게, 무슨….”

“내가 지금 부르라고 한 건 네 목숨 값이야.”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올 곳도 없는데. 그때 칼라일 바로 옆에 서있던 남자가 자신의 허리에 있던 검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검을 빼들지도 못한 채 고함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목이 완전히 뒤틀린 채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비명과 뒤섞였다.

세르빈은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는, 자신의 동생을 뒤로 숨긴 채 공격을 지시했다. 하지만 내 검이 더 빨랐다.

칼라일에게 달려든 이들은 피를 흘리며 검을 떨어트렸다. 나는 가면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칠흙 같던 머리카락은 사라지고 붉은빛이 조명 빛에 부딪혀 반짝였다.

“움직이지 마, 지금 움직이는 놈들은 적어도 다리 하나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천천히 세르빈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칼라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라일은 여전히 울고 있는 카렐리아를 달래주고 있었지만 은빛 눈동자는 살기를 머금은 채 세르빈을 향해 있었다.

“여, 여기를, 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았는지 중요하지는 않아.”

로웬, 숨만 붙여놓으라 그랬어. 그럼 다리 한쪽, 팔 한 개, 손가락 다섯 개 정도는 부러트려도 되지 않을까. 내 작은 중얼거림에 세르빈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이내 눈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억울한 눈빛이었다. 나는 세르빈을 꽉 움켜쥐고는 세에라의 손으로 시선을 향했다.

“네 동생은 그렇게 소중한가 봐? 칼라일의 동생에게는 그렇게 뺨을 때리고, 벌레보다 못한 시선으로 보더니.”

“하, 내 동생이랑 정부 따위의 동생하고 같아? 정부 출신의 동생이 귀족 영애와 같을 것 같아? 웃기는 소리.”

“…뭐?”

어이없는 대답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 사이 세르빈의 눈은 점점 분노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플로트 가문의 후작 자리는 내 것이었어.”

“….”

“근데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로젤리아 가넷.”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

“너 때문에 그날 망신을 당했고, 내 동생 세피노는 가문에서 버려졌다고! 너 때문에, 네 정부 놈 때문에, 아버지는 플로트 가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을 했다며 하녀들 앞에서 우리를 매질했어!”

“….”

“아버지한테 빌고 빌었어. 그래서 이번 노예시장을 성공시키면 후계자 자리로 복귀시켜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네가 또 나를 방해해…?”

설마 세실리아의 티파티 사건 때문에 이러는 건가? 내가 세르빈에게 모욕을 줘서? 칼라일이 세피노를 마법으로 완전히 찍어 눌러서? 그래, 그 후 플로트 가문은 완전히 기세가 꺾였었다.

플로트 후작은 마력석을 빼돌린 대가로 최근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그랬지. 그것도 어마어마한 보석금을 주고 나서. 그 일 때문에 플로트 가의 후계자 자리를 잃었다는 건가?

세피노는 가문에서 버려지고?

“그래서?”

하지만 그건 전부 네 잘못이잖아.

검을 세르빈의 목에 갖다 댄 채 되물었다. 그래서?

“그럼 그딴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내 신경을 긁는 일도, 죄 없는 바르셀민 가문을 괴롭히고 그들의 소유인 마력석 광산을 빼앗아 오는 것도. 훔쳐온 마력석으로 마법사 실험을 하는 것 또한 하지 말았어야지.”

비소를 흘리며 검으로 세르빈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뭐? 이번 노예시장을 성공시키면 후계자 자리를 다시 얻을 수 있어? 그래서 이딴 잔인한 짓거리를 해? 네 눈에는 저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안 들려? 피를 흘리며 아파하는 게 안 보여?”

“뭐가 어때서? 어차피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

“억울하면 귀족으로 태어나던가, 아니면 잡히지 말던가.”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을 떨어트린 손은 세르빈의 옷깃을 콱 움켜쥐었다. 그래도, 곱게 데려가려고 했다. 그리고 벌을 받게 할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 할 그런 벌을 주고자 마음먹었다.

플로트 가에서 온갖 술수를 쓰더라도, 어떻게든 벌을 주리라 생각했는데….

“너는 정말 안 되겠다.”

세르빈의 가면을 벗겨 벽으로 던졌다. 피를 흘리며 쇠사슬에 묶여있던 사람들이 눈앞으로 스쳤다. 목을 틀어쥐려던 찰나, 세르빈의 시선이 천장을 향해 있는 걸 보았다.

그녀를 따라 고개가 천장으로 향했다. 그제야 뿌드득,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천장에 금이 가고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불길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십몇 년 전에 사고가 일어났었지? 건물이 불타는 일.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한…두 건의 사고들.”

그 순간 칼라일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문밖에는 자욱한 연기가 있었다. 벽에 곳곳에 불이 붙어있었다.

“노예시장의 흔적을 지우는데 방화만큼 좋은 게 없거든.”

굉음이 귓가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세르빈이 벽을 짚더니 세에라와 함께 벽 뒤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뜨거운 불길과 함께 천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지는 천장에 깔리기 직전, 칼라일이 카렐리아와 나를 감싸 안았다.

까만 연기가 시야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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