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60화 (60/170)

#60화, 피앙세와 피오나

“폐하. 로웬 경께서 지금 당장 만나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로웬 경’이라는 말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로웬 경? 되묻자 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서류를 밀어두고는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쌓인 업무에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로웬이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로젤리아와 이혼한 이후 나만 보면 붉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으니까.

혹시 로젤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초조해졌다. 그때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후 로젤리아가 대공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계속 걱정이 되었다. 편지를 보내도 답하지 않고….

“폐하.”

“그래, 로웬 경. 이 밤에 무슨 일이지?”

재촉하듯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로젤리아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일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로웬은 그저 말없이 서류 몇 장을 건넸다.

글씨가 빼곡한 게 기사 보고서라고 생각하며 아주 잠깐 안도했다. 그러나….

‘노예시장?’

십몇 년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노예시장이 제국의 수도 내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그것도, 오늘 밤? 그럴 리가 없다. 선대 황제 때에도 잡아들이고, 황제에 즉위 후 한 번 더 잡아들였었다.

두 번이나 잡아들였는데…바올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노예시장을 열리고 있다니, 그것도 저번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이것을 왜 지금 와서 알린 거지?”

“폐하께서 그러셨죠. 만약을 대비해 기사들 중 몇 명을 정부 길드에 넣어두고 감시하라고.”

“그랬지.”

“길드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기사가 말하길, 바올은 꽤나 전부터 거의 소문처럼 떠도는 정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실체 없이 떠도는 소문이었죠. 그러다 정보를 입수하기 며칠 전 길드장의 방에 어쩐지 높아 보이는 귀족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듣게 된 얘기가 바로 바올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몰락 귀족이나 돈은 많지만 힘없는 귀족, 비리로 돈을 쓸어 모았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모든 귀족들의 리스트를 거액의 돈을 주고 사갔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올의 초대장을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어느 날부터 제국에 세력을 뻗고 있는 정보 길드에 대한 걸 들었다.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세력을 키우는 게 이상해서 감시도 할 겸 기사들을 넣어둔 것인데, 이런 추잡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당연히 잡아두었겠지?”

“여기로 오기 전, 기사들을 보내 길드장과 전원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또 다른 것을?”

“사실 바올은 좀 더 조사 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노예시장이란 게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제 누이인 가넷 대공이 쓰러졌습니다. 기사단장의 일과 대공 업무를 병행한 탓에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알아낸 거라고는 바올이 열리는 곳이 보라색 벨벳 천이 뒤덮인 긴 복도가 있고, 철장으로 막힌 방이 있었고, 복도 끝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방이 쇠사슬로 막혀있었다는 것과 함께, 바올이 열리는 날이 바로 오늘 밤이라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전서조를 통해 정보를 받았는데, 전서조를 보낸 기사는 지금 며칠 째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연락이 끊긴 거면, 잡힌 것인가? 페르소나는 서류를 넘겼다. 그러다 제국 내 지도에 표시된 곳을 보았다. 지하실이었다. 골목에 지하실이 있다고? 페르소나는 최근 제국 수도 내 지어진 건물들과 더불어 지하실 설치 서류를 떠올렸다. 이번에 받은 지하실 설치와 관련된 서류는 단 두 장밖에 없었다. 그것도 전부 개인 저택에 설치하는 거였고.

“이건 뭐지? 제국의 수도 한 가운데, 동서쪽에 위치한 골목 지하실이라는 건?”

“바올이 열리는 정확한 위치입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가면을 쓴 귀족들 몇 명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폐하, 지금 당장 이 주변의 통로를 모두 차단하고, 기사들을 투입시켜야 합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현재 대공과 그의 정부인 칼라일이 위장신분으로 바올에 잠입 했습니다

“뭐라고, 로젤리아…아니. 대공이?”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당장이라도 기사들을 바올 안으로 투입시키라 하고 싶었다. 로젤리아가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검을 쓰는 실력이 기사단장인 그녀의 오빠와 비슷한 수준이라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괜찮을까? 그래도 정부 놈이 마법사니! 아니지, 젠장. 마력 제어 수갑을 채웠었다. 수갑을 푼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마법을 제대로 못 쓰던 것 같던데.

‘정부 놈에게 수갑을 채운 게 후회되는 날이 올 줄이야.’

침착하게 생각하자. 일단은 바올의 관계자와 모든 귀족들을 잡아들여야 해. 이번에는 정말 뿌리를 뽑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로젤리아가 다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바올 안에 기사들을 보낸다면 중요 인물들을 놓칠 위험도 있었다. 최대한 버티다가 한꺼번에 잡아들여야 해.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젤리아가 위험하지만, 개인을 신경 쓰다가는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사들을 그 주변에 전부 배치해. 통로가 보일만한 곳은 전부 막아라. 만약 반항을 하고 도망치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다리를 부러트려라. 다른 곳을 망가트려도 좋다. 숨만 붙여놓아라.”

“네,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웬을 보낸 후 시종을 시켜 검과 겉옷을 챙겨오도록 시켰다. 혹시 모르니 황궁의도 배치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창문 밖으로 떠오른 달에 시선이 닿았다.

달이 붉었다.

핏빛에 가까운 달을 본 순간, 어쩐지 불안함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

눈앞에서 사람들이 값이 매겨지고 강제적으로 끌려 나갔다. 눈앞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드레스 안쪽에 숨겨둔 검을 뽑아들고 싶은 충동에 팔을 꾹 눌렀다. 이제 30분이다. 지금쯤이면 이 근방에 기사들이 모든 통로를 차단하고 있을 테지만 정작 중요한 바올 중심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고통 받는데, 어서 풀어줘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막연히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칼라일이 조심히 손을 잡아왔다. 그의 손목에 걸린 수갑 너무나도 차가운 탓에 몸이 흠칫 떨렸다.

“내 사랑, 레베카?”

“…무슨 일이야, 레오?”

“레베카는…나를 믿지?”

이윽고 손등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칼라일은 마차 안에서처럼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나를 믿냐니, 가만히 눈을 바라보았다. 가면 사이로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 위로 내 얼굴이 비춰졌다.

그때 여성이 다가왔다. 여성의 뒤로는 남자 몇몇이 따라왔다. 칼라일은 웃으며 일어났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바올 중심부로 가는 게 중요했다.

여성을 따라 벽 안쪽에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이 충분히 깔리고도 남을 시간이니 저 귀족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올에 들어올 때보다 더 긴 복도. 복도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다. 도망칠 출구인가 싶던 찰나 칼라일이 발을 헛딛으면서 벽을 짚었다.

“레오, 괜찮아?”

“괜찮아. 어제 너를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던 애들을 매달아놓고 채찍질을 했거든.”

이 와중에서도 연기는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 네 시간 동안 나를 내버려뒀어.”

“너를 내버려둔 벌인가 봐, 다리가 너무 아파.”

칼라일의 말을 어느 정도 받아치는데 문득 문의 문고리가 보였다. 완전히 비틀린 문고리. 그러고 보니 발을 헛딛을 때 어디선가 뿌득 소리가 들렸다.

다른 문의 문고리도 전부 부서지거나 비틀려 있었다. 조용히 칼라일을 응시하자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감쌌다.

도착했습니다, 고급스런 조각이 새겨진 문 앞에 멈춘 여성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다.

바올의 중심부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치스럽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벽에는 온갖 동물의 박제품과 더불어 한번 볼까 말까한 보석으로 만든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벽에는 철장으로 막힌 방이 십여 개 정도 있었다.

“저번 수컷 인어보다, 더 아름다운…인어네.”

삼백만 골드라고 적힌 방에는 관 서너 개가 전시품처럼 놓여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관 같은 상자 속에는 인어들이 줄에 묶여있었다. 물은 갈아주지 않은 건지 거의 흙탕물처럼 탁했다.

게다가 인어들은 약이라도 먹인 건지 하나같이 눈이 풀려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칼라일도 놀란 것인지 인어들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었다.

하지만 곧 놀란 기색을 감추고는 다시 레오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불루 때 건강한 인어를 원했어. 삼십년은 두고 볼 수 있다고 했었지. 살아있는 장식품치고 백만 골드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반도 채 못 살았어.”

끌어안고 있는 팔이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지는데도, 목소리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레오가 얼마나 상심이 컸는데, 아끼던 애완 인어가 백만 골드 어치의 수명을 다 못 살고 죽었으니…이거, 못해도 이백만 골드는 족히 돌려받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이백만 골드라는 말에 여성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말이 쉽지 이백만 골드, 마력석을 수입하기 위해 매년 보내는 골드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인어는 바다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희귀 종족이며, 포획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인어는 그 인어의 눈물이라는 보석을 만들어냈다. 삼백만 골드는 분명 그 당시 인어를 경매로 내세웠을 때 나왔던 가장 높은 금액이겠지.

외모조차 아름다우니 그때 인어를 가지려고 하는 귀족들은 아마 집에 있는 전 재산을 털려고 들었을 거다. 그게 삼백만 골드. 그중에 이백만 골드를 돌려받는다는 건 상당한 손해일 것이다. 아니지, 인어를 잡아들이는 비용도 생각한다면 엄청난 손해지.

“그러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여성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아마 관계자로는 모자라겠지. 바올의 주최자를 직접 데려와야 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 더 못 박는 게 좋겠지?

“레오. 이번 바올은 너무 실망인 것 같아. 괜히 천만 골드를 가져왔네. 이렇게 예의도 뭣도 없는 곳에 돈 쓰기는 싫어.”

“어쩜 좋지, 너를 기쁘게 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내 사랑.”

천만 골드. 놓칠 수 없는 금액이지? 그래, 절대 놓을 수 없는 금액일 거야. 무려 천만 골드라고.

그러자 뒤에서 비명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보라색 드레스에 까마귀 머리가 박제된 채 달려있는 가면, 게다가…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다. 뭐지? 왜 익숙한 거지?

“부인, 제 동생이 처음이다 보니 실수를 저질렀나 봅니다. 그 대가로 저 인어들을 부인의 집에 보내드리죠. 이번에는 정말 신선한 인어랍니다.”

“그때도 신선하다고 말했는데.”

까마귀 가면을 쓴 여성은 부인, 하면서 로젤리아의 팔에 매달렸다. 교태가 섞인 목소리가 징그러웠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나타난 순간 이 공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저 비늘 가면을 쓴 여성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제 입으로 ‘인어 세 마리를 모두 보내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세 마리나 보내드리는 거예요. 한 번만 더 믿어주시죠, 부인?”

“남의 부인에게 매달리지 말지? 더럽게.”

“더럽다니요. 여기서 예술이랍시고 학살과 피비린내를 사고파는 돈보다야 더러운 게 어디 있다고요.”

심지어 칼라일의 말을 받아치고 비꼬기까지 한다.

이 여자가 바올의 주최자구나.

“나는 레베카 아이하라에요. 몰락 귀족이지만 재산만큼은 몰락하지 않았죠. 명예가 뭐가 중요합니까, 어차피 남는 건 돈과 다이아몬드. 나를 사랑해주는 광기 어린 사자 한 마리뿐이죠.”

“아이하라 부인이라, 블랙던과 스불루 때는 다른 이름으로 오셨나 봐요. 저희가 보낸 리스트에는…아이하라, 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는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먹잇감을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레베카와 내가 잡히지 않은 이유지. 초대장이라도 보여줘? 너도 알 텐데.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짜 이름이란 없다는 걸.”

“당신의 이름은 뭐죠? 보아하니 이 바올의 주최자 같은데. 서로 인사부터 하고 물건을 보죠. 저희 부부는 이번에 천만 골드 어치의 물건을…희귀하고 감히 손댈 수 없는 것만 구하고 싶거든요.”

가면에 가려져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목소리가 정말 익숙한데…어디서 들었지? 나와 일면식이 있는 귀족인가? 이런 짓을 해온 귀족을 내가 못 알아차릴 리가….

“나는 피앙세에요. 저 아이는 피오나에요. 사랑스러운 나의 여동생이죠. 이 거래의 증명인이 되 줄 겁니다.”

피앙세, 피앙세?

“…그래요. 피앙세, 이제, 물건들을 볼까요?”

하마터면 검을 꺼낼 뻔했다. 이 바올이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게 다행이라며 이를 갈았다.

아니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게 그대로 드러났을 테니까.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걸까.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귀족은 단 한 가문밖에 없을 텐데.

‘어머, 피앙세라니, 세에라 영애가 언니를 참 귀여운 애칭으로 부르는군요.’

‘피앙세는 세에라가 키우는 파란새의 이름인데 저를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종종 제가 키우는 푸른 새의 이름으로 세에라를 부르곤 한답니다. 피오나, 라고 말이죠.’

예전에 바올과 비슷한 행위를 했다가 들킨 가문이 있었다.

지원금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겨우 운영하고 있던 고아원을 후원해준다는 명목으로 매일 아이들을 학대하는 가학적인 행위를 저지른 놈들. 그러나 매번 빈번히 빠져나가 꽤나 오랫동안 확실한 증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물증을 잡아냈고, 못해도 작위 박탈의 수준의 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로테 그 멍청한 것이, 플로트 가문의 죄를 덮기 위해 올린 고아원 후원 중단 제도를 명목으로 한 선처 서류에 사인을 해 넘겨버렸고, 그 가문이 해왔던 끔찍한 일들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도 않은 채 묻혀버렸다.

그래, 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하다 했어.

뒤에서는 이딴 일을 벌여놓고서는 앞에서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다니.

‘세르빈 플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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