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바올, 노예시장
끝도 없는 어둠이었다. 어둠 속을 한참 걷자 나온 건 보랏빛 벨벳 천으로 감싸져 있는 긴 복도가 나왔다. 긴 복도에는 철장으로 이어진 방이 쭉 깔려있었다. 그중 가장 큰 방, 그 방 안에 아이가 울고 있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아이의 울음소리에 홀린 듯 방으로 걸어갔다.
방 한가운데, 온갖 인형으로 둘러싸인 아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이의 몸에는 신기하게도 작은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흐윽, 흐아아앙, 무서워, 오빠….’
‘…카렐리아?’
‘오빠아, 칼라일 오빠, 으아아앙’
칼라일과 무척 닮은 아이가 나를 보더니 와앙, 울음을 터트린다. 외향만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쩜 우는 것도 이렇게 똑같은지, 칼라일의 여동생이 맞구나.
뒷걸음질을 치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이가 울자 나비들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인형을 들어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바람으로 인형의 팔다리를 움직였다. 눈앞에서 춤을 추는 인형을 본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괴했던 나비가 다시 평범하게 돌아갔다.
천천히 옅은 햇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은빛 눈동자가 오팔처럼 반짝였다.
‘아이야, 네가 카렐리아지?’
‘내 이름, 어떻게 알아요?’
‘칼라일은 나와 함께 있어. 칼라일과 함께 널 찾고 있었어.’
아이는 훌쩍이며 내 옷깃을 꼬옥, 잡았다.
‘흑, 오빠…칼라일 오빠…괜찮아요?’
‘괜찮냐니?’
울먹이며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오빠가 나대신 칼에 맞았어요. 다쳤을 거예요. 그 모습에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마음씨마저 칼라일을 닮았구나. 아가야, 걱정하지 마. 우리가 갈게. 너에게 갈게. 여기서 기다려야 해? 금방 찾으러 올게. 언니 믿지?’
‘진짜요?’
뺨을 톡톡 건들자 아이가 살짝 웃음을 터트린다. 통통한 볼이 발그레해졌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였다. 드레스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자 아이는 귀엽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 칼라일을 많이 닮았네. 어쩐지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팔을 살짝 벌리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품에 안겼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환하게 웃었다.
진정되었는지 아이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여전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원에 몸을 웅크린 채 노래를 부르던 칼라일. 이따금 눈가가 붉어진 채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부르던 모습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아이가 사라졌다.
놀라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주변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다시 한 번 깜빡였을 때, 나는 깨어났다.
“카렐리아?”
중얼거린 한마디에 바로 옆에 앉아있던 페르소나가 벌떡 일어났다. 궁의를 불러오라며 외치는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머리가 아팠다. 뭐지? 여기는 어디지? 그 방은 어디지? 카렐리아? 아이는 없었다.
“대공, 괜찮은 것인가? 드디어 깨어났군.”
보이는 것은 페르소나뿐이었다. 내 옆을 내내 지키고 있었던가, 옷깃이 전부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내 손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렸다. 짧은 두통과 함께 기절하기 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 기절했었다. 나는 기절했었다. 마력농축액을 한 번에 다량으로 흡수해서. 그리고…카렐리아를 보았어. 울고 있는 카렐리아를, 내가 찾아가겠다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말했어.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스치던 감각이 남아있었다. 내 품에 안긴 채 노래를 흥얼거렸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페르소나는 내 이마에 손을 댔다. 괜찮냐고 거듭 물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카렐리아에 대한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가야 해.”
“가야 한다니? 대공, 기다리거라.”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고꾸라지듯 넘어졌다. 어깨에 통증이 몰려왔다. 왜 이러지? 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거야? 이상했다. 이렇게 쓰러진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다리에 모든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대공, 그대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다.”
“이거 놔주십시오. 대공저로 가야합니다.”
“다량의 마력을 흡수했다고, 몸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몰라! 게다가 4일이나 쓰러져 있었어!”
4일이나 쓰러져 있었다고?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 4일 동안 의식은커녕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었다.”
“그게 무슨….”
4일. 4일이나 쓰러져 있었다고? 그래서 이렇게 몸에 힘이 없는 건가? 그럼 내가 본 카렐리아는? 모두 꿈인가? 헛것을 들은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쓰러지기 전에 들은 그 울음소리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안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품에 안겨 밝게 웃던 카렐리아.
그 순간 품 안에서 나비가 팔랑이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카렐리아의 근처에 날아다니던 나비였다. 나는 그 나비를 손안에 감싸 쥐었다. 꿈이 아니었어. 나비가 손안에서 작게 날갯짓을 했다. 페르소나는 나비를 못 본 듯했다.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칼라일에게 가야 했다.
칼라일, 네 동생을 봤어. 네 동생에게 찾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했어.
만약, 어떻게 만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방에서 카렐리아를 만난 후 4일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거라면? 카렐리아를 만나고 바로 깨어난 게 아니라, 4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어난 거라면?
서럽게 울던 카렐리아, 아직도 울고 있을지 몰라.
‘가야 해!’
문 쪽으로 박차고 달려갔다. 뒤에서 페르소나가 내 이름을 외치는 게 들렸다. 상관없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법진, 이상한 문양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복잡한 마법진. 루치아노가 급할 때 아니면 쓰지 말라고 했던 그 마법진!
괜찮을까? 저번처럼 피를 토하지 않을까? 실패하지 않을까?
문을 열었다. 마법진을 통과하고 칼이 목을 관통하는 고통이 온몸을 덮쳐온 순간….
“로젤리아님?”
칼라일의 품에 안겼다. 떠올랐던 마법진이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보였다. 워프가 성공한 거야.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 못한 채 나비를 품에 안았다. 목이 아파, 살을 도려낸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치유 마법을 쓸 때보다는 덜했다.
목을 꾹 누른 채 주변을 둘러보자 루치아노와 릴리가 보였다. 더불어 로웬도 있었다. 왜 모여 있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칼라일에게 카렐리아를 만났다는 걸 말해야 했다.
칼라일의 옷깃을 꽉 부여잡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칼라일은 내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탓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로, 로젤리아님. 이게 무슨, 어떻게 된 거에요, 황궁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의식이 없어서….”
칼라일은 놀라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흐릿하게 남아있는 마법진을 보고는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설마 워프를 쓴 겁니까?”
“워프는 또 뭐야, 로젤리아. 괜찮아? 너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이, 일단 의사를 불러와야…!”
당황한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지만 힘이 없었다. 마력의 대부분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게 느껴졌다. 워프는 치유 마법과 비교도 못할 정도로 상당한 마력을 요구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고통이 뒤따른다는 걸 알았지만 할 수 없었다.
말없이 손을 펼쳤다. 나비가 힘 있게 날아올랐다. 나비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렐리아의 목소리.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카렐리아를, 만났어요.”
“…어, 어디서, 카렐리아를.”
“내가 봤어요. 우는 것을 내가 달래줬어요.”
나를 끌어안고 있던 칼라일의 팔이 떨렸다. 나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일이 나비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나비는 칼라일의 손가락 위에 앉았다. 그 순간 칼라일의 눈동자에서 잠시 환하게 빛을 내다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카렐리아.”
중얼거리듯 카렐리아의 이름을 부르자 나비가 새하얗게 빛났다. 마치 칼라일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팔랑이던 나비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작은 새의 모습이었다가 다람쥐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변한 건 토끼였다. 토끼는 내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는 것 마냥 조용히 눈을 감고 몸을 눕혔다.
“로젤리아님.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정확히 어디서 봤습니까?”
루치아노가 다가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이 나비가 카렐리아를 찾는 중요한 단서라도 되는 건가?
“카렐리아님이 가장 잘하는 마법은 몸을 숨기는 거예요. 몸을 숨기기 위한 마법을 거의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역시, 카렐리아 그 아이의 것이 맞았군요. 나비를 보자마자 오기는 했지만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혹여나, 카렐리아의 것이 아닐까 봐.”
루치아노가 토끼를 쓰다듬자 하얀색 가루가 되었다.
“수도 한 가운데에 있는 분수. 그 근처에 있는 골목 쪽에 지하실이 있었어요. 그 지하실 안에, 카렐리아가 있었어요.”
“골목 안쪽에 지하실이 있었다고요?”
급하게 수건과 물을 담은 그릇을 가져온 릴리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어왔다.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럴 리 없다며 중얼거렸다.
“골목 안에는 지하실이 만들어질 수 없어요. 레이몬드 제국의 법이 그렇잖아요. 혹시 모를 재산을 숨겨두거나, 사람을 납치해두는 일이 벌어지니까 지하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만들어두죠. 부득이하게 골목 같이 구석진 곳, 심지어 집 안에 지하실을 만들 경우 그에 따른 서류를 제출하고요.”
“맞아. 특히 멜던 백작 영애 사건이 그랬지. 좋아하던 남자를 납치해 지하실에 가둬놓았던….”
“아니. 잠깐만.”
그때 가만히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로웬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끊었다.
지하실…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까만색 종이 위에 써진 붉은 글씨가 보였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종이에는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초대장인가?
“지금 당장 네가 본 지하실을 찾아야 해. 어디에 있었어? 정확하게 기억나?”
“이게 뭔데?”
“원래는 좀 더 조사하고 난 뒤에 기사들과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말없이 종이를 펼쳤다. ‘레베카 아이하나’와 ‘레오 아이하라’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써진 거액, 그리고 21번. 레베카? 레오? 몰락 귀족…문란하게 놀아나는 부부라고?
“일종의 위장 신분이야. 카렐리아라 했나? 들어보니 칼라일, 네 동생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로웬은 나에게 준 초대장을 톡톡 건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애를 찾으려면 지금이 기회일 거다. 아마도 내일이 아니면 더 이상 못 찾을지도 모르겠군.”
“…지금, 그걸 말이라고.”
칼라일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평소 집안 하녀들이나 집사에게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유지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사나운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혹시라도 로웬의 멱살이라도 잡을까 칼라일의 팔을 꾹 붙들었다. 진정하라는 의미인 줄 알아차렸는지 칼라일은 입을 꾹 다문 채 로웬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말해.”
“보랏빛 벨벳이었지? 긴 복도에 방 여러 개 있었는데 전부 다 창살로 막혀있었고. 지하실 계단 내려가자마자 이어져 있었을 거야. 내 말 맞지?”
그의 말이 맞았다. 꿈속에서 본 풍경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었다. 보라색 벨벳 천으로 둘러싸인 복도에 창살로 막힌 방.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웬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명칭은 없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번에는 ‘바올’이라고 불리는 것 같던데. 흔히…노예 시장이지.”
칼라일의 눈이 커다래졌다.
“카렐리아, 그 아이가 노예시장에 잡혀있을 확률이 아주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