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네가 왜 거기에.
“내가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해주길 원하느냐?”
페르소나는 고개를 축 숙인 채 죄책감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해줄 수 있으십니까?”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 말만 하거라.”
원하는 거? 그런 걸 들어준다고 뭐가 달라질까? 소문은 무성히 커져 칼날로 날아와 박힐 테고, 그렇게 걸러내야 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겠지. 소문이 점점 심해질 때쯤, 또다시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찍어 누르고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겠지. 그냥 배후를 빨리 찾아내줬으면 하는데.
“누가 시녀에게 그런 짓을 시켰는지 찾아봐주십시오. 분명 혼자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샤를로테와 저, 둘 다 노린 게 분명합니다. 건국제도 얼마 안 남았는데 사건 빨리 종결시키고 잠잠하게 만들어야지 않겠습니까? 외국 귀빈들의 귀에 들어가면 괜히 제국의 이미지만 나빠질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제국의 이미지를 신경 쓰는 것인가.”
열어둔 창문 사이로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샤를로테가 독을 먹은 것? 시녀가 배후로 나를 지목한 것? 하녀들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귀가 아렸다. 바로 옆에서 욕을 들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탑은 추우니까….”
“감옥도 추울 텐데요.”
“정말로 감옥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별궁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네가 정말 감옥으로 가는 것보다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더 신경 쓸 테니까. 그러니 일단은 내 방으로 가자.”
“또 무슨 말이 돌 줄 알고 방으로 가자는 겁니까? 여기 있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하십시오.”
“내 말 좀 들으시오, 대공.”
뭘 들으라는 거야. 이 일의 모든 원흉이면서
“폐하야 말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정부와 바람나서 이혼까지 한 전 남편이랑 같이 있는 게 더 불편합니다.”
어깨를 감싸던 손이 굳는 게 느껴졌다.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페르소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다시 침묵이 허공 사이로 떠돌았다.
차라리 전남편 페르소나를 마주하는 것보다 황제 페르소나를 마주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럼 나도 대공의 작위를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제 본분을 다할 수 있으니까. 그게 더 편했다.
페르소나는 충격 받은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괴로웠어? 이혼을 선언할 정도로? 그렇게나 아팠어?
그 말에 문득 세실리아의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대공처럼 괴로웠지만 당당히 이혼 선언을 하지 못한 분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 제국에서 이혼을 한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며 홀로 죽어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황후가 이혼한 지 며칠 만에 다른 가문에서 깔보고 비웃으러 직접 찾아오는 것을 보면 그랬다. 이렇게 작위를 이어받는 경우는 정말 희귀한 경우겠지. 만약 내가 가넷 가문이 아닌 어디 흔한 가문의 여식이었다면? 사교계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고 쫓겨났을 거야,
“괴로웠냐고요?”
“….”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까?”
네가 정부를 안 들였으면, 그날 샤를로테를 치료만 해주고 내보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그래도 나는 샤를로테에게 잘 대해주려고 했어. 그랬어! 그런데 너는 내가 샤를로테를 시기한다고 생각했지. 그녀가 나에게 한 행동보다, 네 행동의 모든 행태가 꼴 보기 싫었어. 네가 가장 미웠어. 샤를로테보다, 네가 더 원망스럽다고!
꾹꾹 눌러놓은 말들이 칼날이 되어 온몸으로 날아들었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분명 넌 나와 오래 지냈을 텐데. 샤를로테 보다도 더 오래 지냈는데. 일 때문에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지. 그래서 이혼한 거야. 하지만 너는 이혼한 후에도 내 사람을 괴롭혔어.
그래, 칼라일. 그에게 채운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과, 샹들리에.
“칼라일은 건들지 마세요.”
“뭐?”
“더 이상 제 사람을 건들지 마시라는 겁니다.”
못을 박듯 그에게 단호하게 말하자 페르소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 정부 놈이 그렇게 소중한가?”
“….”
“네가 원하는 것들 모두 들어주려 했어. 보석이나, 구두. 드레스. 금 광산이라도 주려고 했다. 배후를 찾아주는 건 당연히 해주려고 했고. 그런데 원하는 게 정부 놈을 건들지 말라고?”
“칼라일에게 정부 놈이니 뭐니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제가 언제 샤를로테를 정부 년이라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까?”
칼라일 얘기가 나오니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 놈이라는 칭호를 함부로 붙이는 그가 점점 싫어졌다. 악감정이 쌓이고 쌓였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 마저도 사라져버리는 듯했다.
“하나만 묻지.”
페르소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무엇을 물으려고 이렇게 떠는 거야.
“정부 놈, 아니. 칼라일을.”
“….”
“정말로 사랑하고 있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칼라일을 사랑하냐고? 내가, 칼라일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칼라일을 사랑하고 있냐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칼라일을 사랑할 리가, 내가 그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칼라일은 단순히 동정심에 의해 구해준 것이었다. 샤를로테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그가 가엾어서. 처음에는, 분명 그랬는데…지금은?
‘로젤리아님. 좋아해요. 이 말만큼은 진심일 거예요.’
내가 칼라일을 사랑하고 있었나? 페르소나의 말을 들은 순간 아무렇지 않게 듣고 흘려버린 칼라일의 모든 말들이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무겁게 뛰고 아파왔다. 내가 칼라일을 사랑하고 있었어? 도대체 언제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거지?
처음에는 나를 황후가 아닌 로젤리아로 봐주는 게 좋았다. 황후의 자리가 작았다고, 내 능력을 인정해주는 그 말이. 그렇게 애정을 쏟아부어주는 게, 단순히 좋을 뿐이었는데….
“대공?”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가 칼라일을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는….”
칼라일의 이름을 내뱉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예전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닌 듯합니다.”
숨을 내뱉듯 겨우 말하자 페르소나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황후가 그러던데, 그 놈이 자신을 위협했다고 하던데. 그런 놈이랑 같이 있고 싶나? 샤를로테의 전 약혼자였다는 건 아는 가?”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라일은 황후 폐하를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직접 그렇게 말했나? 그것을 어떻게 믿지?
“그럼 제가 샤를로테의 말을 믿겠습니까?”
내가 끝까지 칼라일의 편을 들자 페르소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망설임 없이 칼라일을 믿는다는 듯한 말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문 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폐, 폐하?”
로젤리아와 페르소나의 고개가 동시에 문 쪽을 향했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민 남자. 목에 레이몬드 황실 문양이 그려진 펜던트가 달린 것이 보였다. 마력연구원이 왜 여기에?
“무슨 일이냐.”
“그, 헤레이스 왕국 무역 보고서에 도움을 주신 대공께, 얻고자 하는 조언이 몇 개가 더 있어 마력연구실로 와주실 수 있을까…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연구원의 간곡한 눈빛에 페르소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함께 마법연구실에 가지. 가서 대공이 보고서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도 해줬으면 하네. 의견을 낸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
방금 전까지의 표정은 사라지고 침착한 분위기만 남았다. 바로 몇 초 전만 해도 말다툼을 하며 서운한 티를 팍팍 내던 그는 어느 샌가 없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일은 일이니까. 페르소나와 다투면서 격해졌던 감정이 차츰 가라앉았다. 다만 칼라일을 생각하니 그가 몹시 그리웠다.
칼라일을 사랑하냐는 황제의 물음이 머릿속을 계속 떠돌았다. 잊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났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빠른 발걸음으로 탑을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칼라일이 걸어준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
“인공 마력석이라니! 저희도 잊고 있었던 것을!”
“이런 식으로 공식을 조합하는 거라면 그간 만들어두었던 결과물들 중 쓸모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폐하,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대공, 이 공식은 어떤지 봐주십시오!”
보고서에 대한 총 설명을 끝내자 마력연구원들은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마지막에 덧붙였던 ‘어쩌면 기존보다 더 많은 마력석을 수입해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흥분하며 페르소나와 로젤리아에게 그간의 결과물들을 가져와 보여주기 시작했다.
백작은 성과가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하나씩 훑어보니 의외로 좋은 결과물이 많았다. 다만 연구를 더 하지 못해 중단한 것들과 부작용을 가진 것들 대부분이었다. 마력석의 정해진 양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법사가 아니니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이론만으로 이 정도라니. 마력석을 아낌없이 지원해줄 수 있었다면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텐데.’
못내 안타까웠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페르소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마력연구원들이 건네준 보고서를 빠른 속도로 읽는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때, 이번에 마력연구원으로 들어온 세실리아의 오빠, 서번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번은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쥐고 있는 무언가 빼곡하게 써진 종이와, 이상한 빛을 내는 액체가 담긴 병을 쥐고 있었다.
“대, 대공, 각하, 이것을 좀 봐주, 세요.”
서번이 건넨 보고서는 마력농축액에 관한 내용이었다. 독단적으로 연구했다며 보여준 농축액은 놀랄 정도로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놀라 곧바로 페르소나에게 건네주니 그도 똑같이 눈을 크게 떴다.
서번이 직접 만들어 낸 마력농축액은 마력의 양도 많고 인공마력석보다 훨씬 많으며 무엇보다 사람의 몸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실제로 자신의 몸에 실험이라도 한 건지, 농축액을 섭취했을 때의 변화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던 페르소나가 눈을 빛냈다.
“이걸 왜 지금 가지고 온 거지?”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서번, 왜 이걸 지금 가져온 겁니까.”
서번은 홀로 실험해보고 싶은 공식이 있었는데 차마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성공은 했는데, 몰래 마력석을 가져와 만든 이유로 고민 했다고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하는 서번에게 페르소나는 크게 칭찬을 했다. 마력석을 빼돌린 것은 중죄였다. 그러나 빼돌린 마력석으로 만든 마력농축액은 마법사 생산에 큰 기여를 할 것이 분명했다.
‘마력 농축액인가, 저게?’
오묘한 빛을 내는 마력농축액은 보석 오팔을 연상시켰다. 저걸 섭취한다면 마력을 왜 품을 수 있다는 건가? 서번이 말한 특유의 느낌…혈관 사이로 마력이 도는 그 느낌이 하루 이상 간다고 했지.
서번이 소량으로 나눠준 마력농축액에 손가락을 살짝 가져다댔다. 빛이 좀 더 밝아지는 듯하더니, 약간 차가운 느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이 농축액은 특이하게도 마력이 있는 사람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이걸 섭취했을 당시 가까이에 둔 농축액이 좀 더 환하게 빛났습니다. 직접 손을 댔을 때는 새하얗게 변했고요. 이걸로 선천적 마법사를 구별해 낼 수 있을지도……어?”
서번이 챙겨온 농축액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 병을 떨어트리자 액체가 병 밖으로 흘러내렸다. 빛을 내며 요상한 소리를 내던 농축액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서번, 이건 무슨 현상이지?”
“이, 이건 근처에 마법사가 있다는 건데, 이런 반응은 저도 처음입니다. 이렇게까지 환하게 빛나는 건 처음 봅니다.”
농축액은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더니 천천히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
자신에게 다가오는 농축액을 본 순간 루치아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꾸준히 마력석을 섭취하고 있던 터라 웬만한 마법사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아니, 마법사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고. 그것도 마력 함유량이 높은 칼라일의 마력석을 먹었으니까. 그 마력석을 오늘 아침에도 먹었었다.
“잠깐, 설마 대공 각하께 마력이?”
마력농축액에 살짝 손을 뻗자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다른 마력연구원이 웅성대는 사이, 마력 농축액이 손에 달라붙더니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에 농축액이 닿은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몸을 크게 비틀거리자 페르소나가 다가와 부축했다.
“대공? 서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다량의 농축액이 몸에 흡수된 듯싶습니다만 저도 잘….”
귓가에 들려오는 모든 대화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마력이 온몸을 돌고 도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돌고 도는 마력의 양이 너무 많았다. 서번이 가져온 농축액을 모두 흡수한 탓인지 다량의 마력이 한 번에 몸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황궁 너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지러웠다.
‘마력을 한꺼번에 먹으면 신경이 예민해진다고 했어, 그 범위가 몇 십 킬로미터까지 간다고 그랬는데…!’
황궁 근처에 서있는 기사들, 수도 근처의 상인들, 하늘이 보였다가, 제국 한 가운데 세워진 분수가 보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칼날이 내장을 베어내는 느낌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던 순간, 울음소리가 들렸다. 황궁 너머, 제국의 수도. 골목 깊숙한 곳,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자 보이는 문, 그 너머로 이어지는 복도.
잠깐, 복도?
‘흐윽, 무서워어, 깜깜해…흐엉, 으아아앙.’
누구의 울음소리지? 어린 여자아이 같은데? 어디지? 지하실에 이런 복도가? 눈을 감았다. 울음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왜 이렇게 우는 거지? 누구야?
‘히끅, 빨리 데리러 와, 나 무서워어. 오빠, 흐아앙’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탓에 펑, 하고 터질 것 같아,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겠어. 너무 많은 마력에 머리가 산산조각 날 것 같아. 몸이 축 늘어졌다. 페르소나가 계속 내 이름을 부르는 듯 했지만 이미 모든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진 후였다.
시야가 아득해지는 순간. 다시 한 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칼라일 오빠.’
“…!”
‘나 무서워, 얼른 데리러 와줘.’
카렐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