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56화 (56/170)

#56화, 결국은 악랄한 대공이 될 텐데.

손목을 매만졌다. 처음보다 마력 컨트롤이 훨씬 좋아졌다. 조금만 더하면 마법을 완전히 해제할 수도 있겠지. 로젤리아에게 간만에 마법 좀 써볼까 싶어 정원으로 갔다. 최근 심란해서 정원에 가지 못했다.

정원에 갈 때마다 자꾸 로젤리아가 생각났다.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돌로 마법진을 그렸다. 범위가 넓은 마법은 좀 더 세세하게 마력을 펼쳐야 했다. 손끝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법진 위로 작은 제비꽃이 자라나더니 빠른 속도로 줄기를 뻗어 순식간에 정원 바닥을 뒤덮었다. 눈을 감았다. 마력을 실처럼 뽑아내 주변으로 퍼트렸다. 흐릿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슬쩍 눈을 뜨자 정원을 두르고 있던 장미 덤불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 정원의 장미 덤불은 헬리오도르 저택을 떠올리게 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숲속에 몸을 숨기는 그 저택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때 그 고요함을 이 저택에서 다시 느꼈다. 다시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칼라일. 그대가 피워내는 꽃은 하나같이 그대를 닮았어요. 따뜻하고, 예쁘고. 닿은 감촉조차 상냥하네요.’

그 목소리에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칼라일님! 칼라일님!”

“어, 어? 아!”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저택의 반을 뒤덮은 꽃이 보였다. 정원을 가득 채우고는 마당에서 저택까지 뻗어 나갔다. 가끔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저걸 뜯을 수도 없고, 어떡한담. 눈앞에서 손을 모은 채 발을 동동거리는 하녀…그래, 클로이였다. 클로이를 보며 꽃은 내가 정리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클로이는 울음을 와앙, 터트리며 울기 시작했다.

“릴리가, 릴리가 기사들을, 혼자 상대하러 갔어요!”

…기사?

“기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흐윽, 지금 저택 안에 기사들이 들이닥쳤어요. 로젤리아님이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고, 사용인들 전부를 잡아가겠다고, 그랬어요, 흐엉, 이제 어떡해요.”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고? 로젤리아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올곧은 사람이 독으로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로젤리아님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알고 있어요. 로젤리아님은 그럴 리가 없어요. 누가 누명을 씌웠거나, 일이 잘못된 거겠죠. 그래서 릴리가 검 하나 들고 기사들을 막으러 갔어요. 로웬님도 하필 급한 일 때문에 황궁으로 돌아가시고. 어쩜 좋아요.”

“황족이라면, 설마 황제 폐하를?”

“아니요, 현 황후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죽이려 했대요. 이건 전부 누군가 꾸민 일이 틀림없어요!”

현 황후, 샤를로테잖아. 샤를로테의 아이를 죽이려 했다고? 죽이려고 시도했더라도 아이가 아니라 샤를로테를 죽이려 했겠지. 아이는 건들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샤를로테가 이 일을 꾸민 건가? 샤를로테, 네가 기어코…!

정원에 있던 모든 꽃들이 한순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침착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로젤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릴리는? 저택으로 들어가자 기사와 대치하고 있는 릴리가 보였다. 보라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던 릴리는 순식간에 기사를 제압했다. 다른 기사들은 전부 기절해 있었다.

“칼라일님. 로젤리아님이….”

“사정을 전부 들었습니다. 로젤리아님은 누군가가 꾸민 일에 휘말렸을 게 분명합니다.”

가쁜 숨을 내쉬던 릴리는 천천히 검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갈 법한 눈빛에 말없이 릴리의 팔을 잡았다. 최대한 현명하게 생각해야 했다. 로젤리아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녀에게 씌워진 죄가 너무 중죄였다.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니.

“칼라일님이 로젤리아님을 빼올 수는 없나요?”

“빼올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어요. 일단은 마법을 써서 로젤리아님께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황궁으로 들어가서 마법을 이용하든 뭘 하든 로젤리아를 만나야 했다. 마법으로 사람 한둘 기절시키는 것쯤이야…. 천천히 손목을 쓸었다. 이 정도면 공격 마법을 써도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 텐데. 차라리 워프를 쓰자. 아직 워프 같은 난이도 있는 마법을 쓰는 것은 몸에 무리가 가겠지만 상관없었다.

“릴리 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저택에 남아있겠습니다. 저택을 지켜야 할 이는 있어야 하니까요.”

기사 한 명이 정신을 차리자 릴리는 칼등으로 기사의 목을 세게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공중으로 손을 뻗자 마법진 하나가 떠오르더니 사람 두 명 크기만큼 커졌다. 빛을 내며 일렁이던 마법진 속으로 손을 뻗었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서늘했다. 왜 서늘하지? 로젤리아에게 먹인 마력석이 있는 곳을 추적한 거니 아마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워프 될 텐데.

서늘하다고? 설마 감옥에라도 있는 건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마법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워프가 된 순간 몸에 칼이 박힌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순간 손목이 잘려나가는 줄 알았다. 숨을 겨우 들이마시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천이 만져졌다. 천? 손을 움직여 천을 걷어냈다. 그리고 마주한 사람은……로젤리아가 아니었다.

“누, 누, 누구세요?”

저 사람은….

***

탑은 냉기가 가득했다. 너무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얼어붙는 느낌에 절로 몸을 움츠러트렸다. 입에서 새하얀 김이 나왔다. 탑에는 뼈대만 남은 침대와 낡은 시트 한 장이 있었다. 커튼을 떼서 쓸까, 했지만 먼지가 너무 많았다.

침대 위에 시트를 깔고 위로 올라갔다. 닿는 곳마다 차가웠다. 얼음장을 만지는 기분에 몸을 웅크렸다.

춥다. 자진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그냥 감옥에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황궁에 딸린 탑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청소해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몸을 웅크린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릴리는 어쩌고 있을까. 대공저로 간 기사들은 괜찮을까? 릴리가 손힘이 강해서 전부 기절시켜 놓았을 것 같은데 어쩌지? 칼라일은? 루치아노는 아침부터 일찍 나갔고. 로웬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화를 낼 텐데. 침대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춥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하필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였다. 칼라일이 겉옷이라도 걸치고 가라 했는데, 말 좀 들을 걸 그랬다.

‘촛대?’

멍하니 탑을 둘러보는데 낡은 선반 위에 있는 금색 촛대 하나가 보였다.

그 옆에는 초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 중 괜찮은 초 하나를 촛대에 끼웠다. 촛불 근처에 손을 대면 그래도 언 손은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작 성냥이 없었다.

“…불 마법 어떻게 쓰더라.”

루치아노가 줬던 마법 서적에 불 마법 관련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손을 살짝 모았다. 손끝으로 마력을 흘려보내며 얼핏 보았던 그 마법진을 그려냈다. 그러자 작은 불꽃 형상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성공인가 싶어 불꽃을 촛불 심지에 옮기려던 찰나, 불꽃이 펑! 하는 소리에 함께 터졌다.

“!”

폭발하듯 터진 불길에 놀라 마력 컨트롤이 흐트러졌다. 선반에 불이 옮겨 붙었다. 마력 컨트롤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 지기까지는 불같은 위험한 마법은 쓰지 말라고 했었지…눈을 멀뚱히 뜨고 있자니 나무가 타들어 가는 냄새가 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물 마법으로 불을 끄자, 물 마법은 이제 쉽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 불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로젤리아!”

“황제 폐하?”

저놈이 왜 여기를 온 거지? 빨리 불을 꺼야 하는데! 불길이 선반을 타고 벽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페르소나는 들고 있던 담요로 선반의 불을 덮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기는 했지만 까만 매연이 탑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따가운 매연에 창문을 열었다.

창가에서 숨을 고르는데 어느새 페르소나가 내 뒤로 다가와 있었다. 내 드레스 소매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살갗을 보자 살짝 빨개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였길래 불이 붙는 거지?”

“탑이 추워서요. 촛불이라도 키려고 했습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탑 수리비용은, 청구비용은 저택으로 보내주시죠.”

차갑게 대답하자 페르소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상처받은 눈빛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더 꽉 잡으면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궁의를 불러줄 테니 팔부터, 치료 하거라.”

“화상 입은 것도 아닙니다. 살짝 빨개진 것뿐입니다. 놔주시죠.”

그럴수록 페르소나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다.

“…제가 탑으로 간 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감옥으로 끌고 가려고요?”

“그게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미, 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 팔을 놓아주고는 손을 감싸 쥐는 페르소나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워 보였다.

“미안하다고 하신 겁니까, 지금?”

“어쩔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너를 바로 잡아야 했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네가 범인이 아닌 걸 안다, 네가 독을 쓸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 나에게 왜 칼을 겨눈 겁니까?”

“회의장 근처에 있는 창문에서는 정원이 보이지. 다른 관리들이 샤를로테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 네가 있었던 것도.”

관리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그럼 더더욱 나를 잡을 필요가 없잖아.

“샤를로테는 황후다, 알지 않느냐. 황후는 쓰러졌고, 그 애를 데려온 건 너다. 심지어 낙태약의 성분이 섞인 독초를 먹어서 그렇게 된 거지. 그 상황에서 시녀는 배후로 너를 지목했다. 관리들 말이 많아졌다고! 특히 너를 시기하던 귀족들이 말이다.”

“….”

“만약 너를 그 자리에서 잡아들이지 않았다면, 관리들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다. 전 황후라 봐준 거라고. 황궁에 도는 말은 빠르고 그 말 한마디가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네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관리들의 반발….

그래. 페르소나의 말이 맞아. 여러 면에서 보자면, 페르소나는 나를 잡아들이는 게 이 이상의 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야. 뭐가 되었든 시녀가 나를 범인으로 주목했으니까.

지금 어떤 말이 돌고 있을까. 현 황후를 시기한 가넷 대공이 독을 먹이고 아기를 죽이려 했다. 소름 돋게도 시녀에게 독을 먹이라 지시하지 않은 척 쓰러진 황후를 안고 집무실로 왔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결국 시녀가 모든 걸 불었다. 대충 이렇게 떠돌겠지. 전 황후라고 봐준다는 말이 돌면 황실의 이미지도 깎일 테니, 어쩌면 알맞게 처우한 거지만….

날 잡아두고, 다음에는? 정말 배후를 밝히더라도 나에게 남는 것은?

페르소나는 황후를 아끼고 직접 진범을 박혀낸 황제라는 칭호를 얻겠지만 나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지 모르는데. 별 얘기가 다 돌 텐데.

정말 독을 먹이라고 시킨 게 아닐까? 혹시 알아? 진짜 범인은 대공인데 돈을 써서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내몬 거. 그런 거라면 정말 소름끼치겠다. 진짜 가넷 대공은 악랄하고 무섭다니까.

“그래서 저에게 사과하시는 겁니까?”

벌써부터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귓가로 들려오는 듯 했다.

“배후가 밝혀졌다 해도 결국 저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겁니다. 현 황후를 시기하는 대공, 악랄한 로젤리아 가넷. 진짜 범인인데 돈 주고 사람을 매수했다…뻔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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