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54화 (54/170)

#54화, 독살을 주도한 자

“이게 전부 샤를로테가 처리한 것들이라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폐하.”

페르소나는 샤를로테가 결제한 서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정말 샤를로테가 검토한 서류들이 맞나. 샤를로테는 업무를 볼 때면 꼭 한군데씩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가적인 서류를 제시해야 하는 절차를 건너뛴 채 결제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번 결제한 서류를 무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샤를로테가 지난 일주일 동안 맡은 업무의 양은 상당했고, 실수도 거의 없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었다.

교사들의 평도 아주 좋았다. 두 달이면 필요한 교육만 추린 황후 교육을 어느 정도 끝마칠 정도로 진도가 빠르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이대로 라면 정식 황후의 자리에 올라도 별다른 불편은 없겠지. 최근 구설수에 오르는 일도 줄었고, 그래. 다 좋았다, 좋은데….

‘왜 그렇게 기쁘지가 않은 거지.’

분명 잘했는데, 잘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샤를로테가 아직 로젤리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하긴, 이 정도 업무면 이틀이면 끝냈겠지. 미리 일을 끝내고 내 일을 도와준다거나. 진즉에 피곤한 것을 알아차리고 따로 조치를 취하 거나.

- “이제 그만 쉬세요.”

- “이 서류만 끝내고 쉬도록 하겠다.”

- “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 “황후는 일을 다 끝낸 것인가?”

- “ 폐하께서 황태자 시절부터 지금껏 인정하지 않은 것이 있지요. 바로 제가 폐하보다 일 처리 속도가 빠르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마무리 지을 테니, 침대에 누워 쉬도록 하세요.”

로젤리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알현하거나 국정 회의를 할 때, 또는 시종들의 앞에서는 그렇게 따스하면서도 냉정한 황후의 모습을 보여주던 로젤리아는 단둘이 남으면 그럼 황후의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았다.

“샤를로테가 처리한 업무들은 이대로 진행하라.”

“네, 그리고 슬슬 국정 회의를 위해 이동하셔야 합니다.”

“가넷 대공과의 알현까지 몇 시간 정도 남았지?”

“세 시간입니다, 폐하.”

세 시간이라, 그렇게 급한 안건도 몇 개 없으니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하겠지. 저번 알현 때는 로젤리아가 아닌 대리인이 왔었다. 자신이 맡은 일을 다른 사람이 하기를 싫어하는 성격인 탓에 대리인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오겠지.’

알현을 끝내고 바로 가려고 할까. 루벨라이트 대공은 황제가 먼저 알현을 주도할 경우, 언제나 황궁에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로젤리아도 그럴까? 새벽이 돼서야 끝날 텐데, 밤늦게라도 대공저로 돌아가겠다고 할 게 뻔했다.

“별궁을.”

“네?”

“별궁을 비워둬라.”

곧바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치워두라 지시하지 않았다. 페르소나는 로젤리아에게 선물한 브로치와 똑같은 디자인의 악세사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브로치만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목걸이와 귀걸이는 보내지 않았다. 분명 알현만 끝내고 가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이것을 명분으로 조금이라도 더 잡아둘 생각이었다.

“그럼 별궁을 치워두라 지시하겠습니다. 이제 회의장으로 이동하시지요.”

“지금 가도록 하지.”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 창문 너머로 샤를로테가 보였다. 정원의 나무 밑에서 누군가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임신한 이후 꼭 이 시간이면 산책을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은 태교에도 안 좋을 테고.

예전과 달리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샤를로테를 찾아가지도, 배를 쓰다듬어주지도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샤를로테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말없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순간 샤를로테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놀라서 창가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뭐지? 그 순간 풀 위로 붉은 액체가 흩뿌려졌다. 피였다. 곁에 서 있던 호위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샤를로테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진 샤를로테를 누군가 안아들었다. 익숙한 붉은빛 머리카락….

‘로젤리아?’

페르소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때마침 회의장으로 오던 관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샤를로테가 쓰러지고, 그 옆에 로젤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관리들도 창문을 통해 보고 있었다.

그때 관리들 중 한 명이 시종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서 들려온 ‘대공’, ‘독살 시도’라는 두 단어가 페르소나의 귓가로 날아와 박혔다.

***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음에도 눈앞으로 짙고 강렬한 붉은빛이 일렁였다. 샤를로테는 괜찮을까, 걱정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식은땀 맺힌 샤를로테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래는 곧장 황궁의에게 갈 생각이었지만 복도 저 멀리에서 페르소나와 황궁의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페르소나가 왜 황궁의와 함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페르소나는 나와 샤를로테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샤를로테를 안아들었다.

그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아주 잠깐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아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대로 몸을 돌려서 궁의들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시녀가 가져다 준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코끝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는 잘못 없으니까….

심란한 마음에 드레스 자락만 만지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노크를 한 사람은 바르셀민 백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알현에 백작도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는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대공 각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독이라니요. 각하께서는 괜찮으신지요?”

“파돈을 먹은 건 황후 폐하뿐이십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상태가 어떻습니까?”

“안정된 상태입니다, 대공 각하께서 대처를 잘해주신 덕분이죠.”

“제가 한 건 없습니다. 아이도 무사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된 거다, 샤를로테도, 뭐. 괜찮다니 다행이네. 오묘한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눈앞에서 일렁이던 붉은빛이 차츰 사라지는 듯했다.

피비린내가 흐릿해지던 찰나, 갑자기 바르셀민 백작이 허리를 90도로 숙여왔다.

“그때, 저희 딸을 도와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마력석 광산을 찾게 도와 주셨다고 들었고요. 진즉에 찾아가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지만, 플로트 가와의 일이 어제 끝이 났습니다. 이제야 감사의 말씀을 드리네요.”

“감사 인사를 할 필요 없습니다. 바르셀민의 가문은 본래 선하고 신분을 논하지 않기로 이름을 널리 알린 가문이었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어도, 몰락할 위기에 이르러도 끝까지 선행을 포기하지 않던 가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선행을 되돌려 받았다고 생각해주세요, 백작.”

그때 바르셀민 백작의 품에서 서류 한 장이 떨어졌다. 알현 때 논의하기로 한 헤레이스 왕국 마력석 수입 독점권에 관한 내용이었다.

서류를 미리 읽어두려는 데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써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헤레이스 왕국이…마력석 수출을 끊겠다고 했습니까?”

물론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헤레이스 왕국에는 확실히 마력석 광산이 전 대륙을 포함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비록 마법사의 수는 적지만 개개인의 마력만 보자면 한 명의 마법사당 5명의 마력 역할을 했다. 마법사를 길러내는 아카데미가 마력석 광산 내부에 지어져 있는 탓이었다.

헤레이스 왕국은 분명 마법사 수를 더 늘리고 싶은 게 분명했다. 마력석도 많은데, 마력도 많고 강한 마법사를 많이 늘리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 마력석을 수입해가지만 정작 마법 연구에 대한 성과가 전혀 없는 레이몬드 제국에게 제한을 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이몬드 제국이 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군사력 때문이었다. 군사력만 따지자면 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제국으로 불렸지만…마법사가 없는 게 흠이었다. 군사력이 강해도 마법사 부대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르소나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마법 연구팀을 꾸리고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레이몬드 제국에서 마법 연구를 시행하고 있다는 걸 내세웠다. 군사력도 강하고 마법사 생성을 위해 힘쓰는 제국의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도 겨우 몇 년이었다.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마력석을 수입해 오는 나라와 무역 협정마저 끊긴다면….

레이몬드 제국에서 그동안 해주었던 지원들을 모두 끊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리한 것은 우리 쪽이었다.

“일단은 마법사 생성 연구에 대한 성과 말고 마법 물품의 제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왕국 쪽으로 보내세요.”

“마력 물품 말씀이십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인공 마력석이지요. 다른 마력석 보다 2, 3배 많은 마력을 품은 그 마력석. 마법사 연구에 신경을 쏟느라 그대로 실험도 해보지 않고 방치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것 또한 좋은 결과물일 텐데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샤를로테가 쓰러졌던 것은 잠시 미뤄두고 정신없이 바르셀민 백작과 헤레이스 왕국과의 무역 협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백작과 함께 헤레이스 왕국으로 보낼 성과 보고서를 작성했다.

되도록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어차피 샤를로테가 쓰러진 이상 알현은 물 건너간 상태였다. 바르셀민 백작에게 하더라도 한밤중에 시작되겠지.

“마력연구원들이 작성한 문서는 폐하의 집무실에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집무실에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정말 급한 안건이었던 것인지, 백작의 손에는 집무실로 들어가는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집무실 열쇠를 직접 쥐어주다니. 나는 백작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았다. 즉위하자마자 모든 돈과 시간을 쏟아 부었던 마법 연구였으니 아마도 되도록 계속 이어나가고 싶겠지.

그 순간 집무실의 내부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황후 시절, 몇 번씩이나 드나들었던 집무실이었다. 대부분 어디에 뭐가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집무실 오른쪽에 비치된 선반, 그리고 가장 위 칸에 꽂혀있는 문서들….

‘기사 보고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사보고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특히 가넷 가문의 대공인 나는 더더욱. 하지만 때마침 페르소나도 없고, 헤레이스 왕국에 보낼 성과 보고서와 자료를 찾아보려 했다는 명분이 있었다. 자료를 찾는 척 기사 보고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당장 가죠, 백작.”

나는 빠르게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페르소나가 언제 올지 모른다. 아이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페르소나니까, 분명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올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마력 연구원이 보낼 자료를 찾는 척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잠시 백작을 흘겨보다 기사 보고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기사 보고서에는 날짜가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로웬의 심장 부근에 있는 상처는 루치아노가 입힌 상처였다. 그러니 그 상처를 입은 날이 아마도 헬리오드르 가문을 멸문시킨 날이겠지.

‘로웬이 심장 부근에 못 보던 상처가 생겼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 로웬은 편지를 쓰자마자 보내는 성격이고, 그 편지가 오기까지 이틀 정도가 걸렸을 테니까…편지 날짜로부터 대충 이틀 전….’

기사보고서를 빠르게 넘기며 그와 비슷한 날짜가 적힌 보고서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때 재질도 글씨체도 이상한 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보고서에 손을 댄 순간 녹슨 칼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게다가 어쩐지 끈적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진득한 마력이었다. 분명 로웬이 작성한 것일 텐데, 왜….

떨리는 손끝을 꽉 쥔 채 보고서를 읽으려던 순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나는 빠르게 기사 보고서를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거칠게 문을 연 사람을 보았다. 페르소나였다. 그가 왜, 아직 샤를로테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침착하게 예법을 갖춰 인사하려 했지만 페르소나는 내 말을 단박에 끊어내고는 근위 기사들에게 나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지금 당장 가넷 대공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기사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검을 꺼내들어 나에게 겨누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나에게 겨누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에게 검을 겨누다니.”

기사들 사이로 걸어 나오는 페르소나를 노려보았다.

“폐하. 제가 이 상황을 납득 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할 겁니다.”

“황후의 전속시녀였던 자가 전부 자백했다, 로젤리아 가넷이 쿠키에 파돈을 섞게 하라 지시했다고.”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고요?”

게다가 나에게는 묻지도 않고 이렇게 곧바로 기사들을 시켜 나를 감옥에 가두라 명령했다고? 시녀의 말만 믿고? 독살을 시도하려 했던 자가 곧바로 시킨 자가 누군지 자백할 리 없잖아. 그런데, 왜? 게다가 나는 샤를로테를 구해줬는데…?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겠다. 지금 당장 가넷 대공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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