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53화 (53/170)

#53화, 샤를로테가 쓰러졌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

“그동안 잘 지냈나요?”

한가로이 황궁 안을 돌아다니던 찰나 샤를로테가 말을 걸어왔다. 좀 일찍 오기도 했고, 국정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여 잠시 산책도 좀 할 겸 나왔는데…그냥 집무실에서 기다릴 걸 그랬나?

나는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진 샤를로테를 향해 예의상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항상 화려하게 차려입던 드레스나, 과하게 달던 장신구도 없고. 그리고 저 눈빛. 사람을 관찰하는 눈빛이다. 뭐지? 사람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배가 많이 불렀군요, 아이는 잘 자라고 있나요?”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대공.”

“건강한 황자가 태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라겠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황후다워졌다. 감정을 절제하고, 언제나 기품 있게 타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샤를로테가, 무도회에 있었던 일이 계기라도 된 것일까.

“대공, 혹 지금 시간이 있다면 나와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 없습니까?”

“불러주신다면야 저야 영광이죠.”

미소를 지으며 샤를로테와 눈을 마주쳤다. 분위기가 달라진 샤를로테, 지금까지의 행동을 바꾸고 조금씩 칼을 갈고 있는 거라면 미리 상대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샤를로테가 웃으며 안내한 곳은 황실 정원이었다. 마법으로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나무가 심어진 바로 그곳, 내가 페르소나에게 이혼을 선언한 바로 그곳.

샤를로테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로웠다. 사람의 속을 긁어놓으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부른 것인가?

“꽃이 매우 아름답지 않은가요, 대공?”

“네, 그렇습니다. 이 나무는 9대 황제 폐하께서 선대 황후 폐하께 드린 25번째 생일 선물이었죠.”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이혼을 선언한 장소에 오면, 기분이라도 안 좋아질 줄 알았나. 나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분들은 서로 금술이 좋았습니다. 결혼식 날 얼굴을 처음 보았는데, 글쎄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황제와 황후의 반지 교환식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답니다. 애처가였던 9대 황제 폐하께서는 정부를 단 한 명도, 들이지 않으셨다더군요.”

이 정도야 사교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9살 때부터 사교계를 뛰어다녔다. 사람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샤를로테보다 내가 더 능숙했다. 샤를로테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빠르게 숨기고는 내 말에 긍정했다.

“9대 황제 폐하께서는 금술이 좋았던 만큼 자신의 자식들도 많이 아끼셨죠. 낳은 자식은 모두 다섯. 황녀 넷, 그리고 황자 한 명. 황자는 그 중 가장 막내였습니다. 보통 황자를 황태자로 임명하는데 9대 황제 폐하께서는 1황녀를 황제로 세우려 하셨죠. 하지만 황자가 자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고, 이를 알고 있던 1황녀가 자신보다 황제 자질이 있다며 황자를 내세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후 10대 황제 폐하께서는 교육 방식을 바꿨죠. 황녀와 황자 모두 황제가 될 수 있도록 황제 교육을 동등하게 받게끔 하셨습니다.”

싱긋 웃으며 샤를로테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솔직히 말하면, 놀랐다. 다른 학문은커녕 역사에 대한 지식조차 없던 샤를로테가 이 정도의 대답을 한다고? 처음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샤를로테의 옆에 서있던 켈빈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샤를로테의 눈치를 보던 켈빈은 샤를로테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장 자리를 비켰다.

이것도 조금 놀라웠다. 보통 같았으면 내 시녀에게 함부로 명령하지 말아 달라면서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을 텐데.

“왜 이렇게 달라지셨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저한테 하고픈 말이 있으시면 돌리는 것 없이 그냥 말씀해주시죠, 황후 폐하.”

내가 돌리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묻자 샤를로테의 눈동자 위로 차가운 빛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나를 부른 이유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아아, 별거 없습니다. 그냥…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황후로서 귀족들을 살펴야 하죠. 그리고 괜찮은지도 묻고 싶었고요.”

“무엇을 말이죠?”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

찻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마물용 제어 수갑. 한순간 머릿속으로 마물용 제어 수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칼라일의 모습이 스쳤다. 지금은 수갑을 떼어냈지만 여전히 그의 마력을 억압하는 마법이 흉터처럼 그의 손목에 남아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 그래도 그 점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타국의 마법사가 레이몬드 제국에 머물 경우 일시적으로 제한한다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법인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제국에는 마법사가 없잖아요? 그런데 마법사가 정부로 있다니, 그것도 대공의 정부로. 황제 폐하의 입장에서는 걱정되시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대공이, 마법사인 정부를 이용하여 황실에 해가 되는 일을 저지를지?”

“제가 반역이라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건가요?”

“어머, 그런 무서운 말을. 대공. 말은 가려서 하도록 하죠? 이 황궁에서 반역이라는 단어를 꺼내다니요.”

짧게 숨을 토해냈다. 정말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구나. 샤를로테가 이 정도로 많이 바뀌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마법사가 대공인 저의 정부이고, 이 제국에 마법사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법을 제정하고, 마력 제어 수갑을 채웠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맞습니다. 제 말을 알아들었다니 다행이네요.”

“그걸 핑계로 황제 폐하께 바람을 넣은 것은 아니고요?”

멈출 줄 모르고 치솟던 샤를로테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대공?”

“칼라일은 타국의 마법사. 그것도 멸망한 제국의 마법사. 뒷조사를 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을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는 형형하게 빛나는 샤를로테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13황녀지만 황녀는 황녀셨잖아요?”

“!”

“헬리오도르 가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뒷조사를 통해 헬리오도르 가문이 마법사 가문이라는 걸 알아냈다고요? 말도 안 되죠. 하지만 그때 황제 폐하께서는 뒷조사를 통해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루치아노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마력 제어 수갑과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의 차이점을.

“그리고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샤를로테는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력 제어 수갑에 마법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에 있을까요?”

없다. 애초에 마법사 자체가 제국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마법을 걸 수 있을 리가. 마력 제어 수갑은 마력석으로 만들고, 마물용은 그 수갑에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을 걸어 만드는 방식이었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는 ‘칼라일 헬리오도르에게 마력 제어 수갑을 채워라.’라고 지시하셨나요? 마물용이 아니라?”

루치아노에게 ‘보통 수갑과는 달리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에는 따로 특별한 마법을 건다’라는 소리를 듣고 아셀라를 찾아갔었다. 그날 칼라일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페르소나와 샤를로테. 기사들. 그리고 아셀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샤를로테의 상태가 나빠 보였던 것과….

‘황제 폐하께서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을 채우라고 지시한 게 확실한가요?’

‘네? 마물용이요? 마물용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그냥 수갑을 채우라고만 하셨어요. 마력 제어…무슨 수갑이었는데. 어쨌든 마물용이라는 말은 없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아셀라? 확실하게 대답해주어야 합니다.’

‘네. 확실해요. 그때 당황해서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제국에 그런 마법을 걸만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상태가 나빠보였던 샤를로테. 그러니 마법을 걸어둔 사람은 샤를로테라는 소리였다.

“황후 폐하께서 독단적으로 진행하신 일인가요?”

“….”

“황제 폐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신가요?”

“….”

“말씀이 없으시네요, 황후 폐하.”

잘하면 황후가 대공의 정부를 시해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샤를로테의 죄를 고발할 수 있다.

그때 샤를로테가 크게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치려는 것인가 싶었다. 아니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샤를로테가 어떤 말을 할지 가만히 기다리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일이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아아….”

그 순간 샤를로테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배를 부여잡으며 식은땀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응시했다.

“배, 배가…아아!”

눈에서 눈물이 고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샤를로테는 짧은 비명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놀라 다가가려던 순간 샤를로테의 새하얀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피에 젖어 들어가는 드레스. 설마……?

“배가.”

“!”

“아아, 배가, 아, 배가 너무, 너, 너무 아파…….”

샤를로테는 다급하게 내 드레스를 부여잡았다. 부여잡으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몸이 굳었다. 샤를로테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통증이 심한 건지 내 드레스를 더 꽉 부여잡았다.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공포에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배가 너무 아파!’

샤를로테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붉게 물들어가는 자신의 드레스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조산? 조산이라 하기에도 너무 짧았다. 조산은 아니다. 그럼 뭐지? 출산일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배가 아프지? 샤를로테는 통증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바뀐 것인지 배를 더 세게 부여잡았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차에 뭐가 들었나? 아냐. 저 차는 샤를로테가 시녀에게 시켜 가져온 거잖아. 나는 멀쩡한데 왜 샤를로테가….

“쿠, 쿠키…쿠키에….”

“쿠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샤를로테는 덜덜 떨며 쿠키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그릇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파돈 향이다. 파돈은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하게끔 유도하는 성분이 있었다. 쿠키 그릇을 던지듯 놓고는 샤를로테의 드레스의 치마 부분을 들었다.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황후 폐하, 이 쿠키를 누가 가져왔습니까?”

“으윽, 으….”

“폐하, 폐하! 정신 차리세요!”

샤를로테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시녀를 부르고 하녀를 찾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 아냐, 침착해. 생각해보자, 아까 쿠키를 가져다 준 사람, 샤를로테의 전속 시녀라는 그 여자. 일단 그 켈빈이라는 시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야 해.

그때 샤를로테가 손을 뻗어 로젤리아를 힘없이 부여잡았다.

“아, 아이…아이부터, 제발….”

그 순간, 샤를로테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독을 먹고 일어나 울부짖던 모습, 시트를 부여잡고 울던 모습. 죽어버린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던 내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봐도 그때 약을 먹은 것은, 샤를로테가 주도한 일이었다. 쓰러지기 바로 직전 샤를로테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샤를로테의 잔에서는 극소량의 독이 나왔다. 먹어도 몸에 그렇게까지 많은 해를 주지 않는 양이었지만 그에 비해 내가 먹은 것은 아이를 죽이고 산모까지 죽일 양이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아이를 잃었음에도, 계속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황후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샤를로테를 도와주고 싶지 않다. 이 아이도 똑같이 겪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잃는 고통을, 그 고통에 몸부림치며 모든 걸 원망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모든 걸 제 손으로 부숴가기를 원했다.

너도 아파봐, 너도 고통스러워해.

‘하지만.’

입술을 짓이겼다. 싫다, 정말 싫다. 그러면서도 손은 이미 샤를로테를 안아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내 목을 끌어안아.”

“뭐, 라고……?”

“아이 살리고 싶으면 끌어안으라고!”

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샤를로테는 나를 보며 숨을 삼켰다. 목을 끌어안으라는 호통에 놀라 히끅, 소리를 내며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조금만 참아, 금방 궁의를 불러올 테니, 조금만 더 버텨.”

샤를로테는 내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유일한 동아줄인 마냥 끌어안았다. 힘겨운지 숨을 불규칙하게 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