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어색함이 남아있는
황제와의 알현에 대리인을 두 번씩이나 보낼 수는 없었다. 애초에 병에 걸리거나 부득이하게 빠져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대리인을 보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다 페르소나가 선물로 보낸 브로치를 달아야 할지 아주 잠깐 고민했다.
황제가 보내준 것이니 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샹들리에 사건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알현만 아니었다면 계속 화장대 서랍 안쪽에 계속 넣어두었을 텐데.
예의상 한번은 착용해야겠지. 나는 가슴 윗부분에 브로치를 차며 문 너머로 칼라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로젤리아님.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는 칼라일을 방으로 들였다. 칼라일의 손에는 약이 들려 있었다.
“약이네요.”
“혹시 몰라서 로젤리아님을 치료했던 의사에게 더 받아왔어요.”
그러고 보니 새벽에 열이 다시 올랐었지. 몸도 아직 무겁고. 칼라일은 내 손에 약을 쥐어주며 허리를 살짝 숙여 이마를 맞댔다. 지그시 눈을 감은 모습이 참 예뻤다. 금빛 속눈썹도 나보다 훨씬 긴 것 같은데.
“열이 아직 남아있나…아프면 안 되는데.”
“그대의 이마가 더 뜨거운 것 같은데.”
“오늘 꼭 가야 합니까. 하루 더 쉴 수 없나요? 아니면, 좀 더 쉬다가… 너무 이르잖아요.”
“알현에 두 번씩이나 대리인을 보낼 수는 없죠. 그리고 아셀라와의 약속도 잡혀있어서 일찍 나가봐야 합니다.”
“아셀라 양은 왜요?”
“…아셀라 양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그 순간 칼라일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은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름다워요”
“네?”
“매번 볼 때마다 눈동자가 다이아몬드 같다고 생각했어요.”
은빛 눈동자는 워낙에 희귀하고 흔하지 않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손끝으로 눈가 주위를 더듬었다.
칼라일은 간지러운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현은 언제 끝나죠? 밤늦게 돌아옵니까?”
“원래는 황궁에 하룻밤 묵어야 하지만, 전남편과 하루 이상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아요. 밤늦게라도 돌아올 거예요.”
그때 칼라일의 시선이 브로치에 닿았다.
“못 보던 브로치네요. 브로치는 잘 안 하지 않았나요?”
“안 하죠, 불편하고 잃어버리기도 쉬워서. 하지만 예의상 한번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페르소나가 준 거니까요.”
브로치를 떼서 그의 손에 쥐어주자 칼라일은 브로치에 달린 보석으로 만든 꽃잎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겉은 가넷인데 꽃 안쪽에 박힌 보석이 에메랄드네요.”
“그렇죠.”
“황제 폐하의 눈동자 색과 똑같네요.”
“눈동자와 똑같다니요?”
어렴풋이 페르소나의 초록색 눈동자가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그래서 꽃 안쪽을 에메랄드로 장식했나? 아니야, 그럴 리 없지. 샤를로테가 저부로 들어오기 전에도 악세사리는 많이 선물했었지만 뭔가 의미가 담긴 물건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그 당시 페르소나가 황태자 시절부터 준비해온 일들을 시행하기 위해 잠잘 시간도 줄여가면서 일을 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의미 있는 선물을 챙길 시간도 없었겠지. 아니면 그냥 무신경했거나.
“아까 약을 받아오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석을 선물해주는 유행이 사교계에 돌고 있다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혹시나 해서요.”
그의 눈동자를 닮은 에메랄드를 장식한 브로치를 나에게 보냈다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브로치를 달았다. 페르소나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리가 없다. 애초에 나한테 그런 선물을 보낼 이유도 없고.
“한 번만 달고 말 브로치에요. 예의상이죠.”
“그럼 제가 선물한 브로치는요?”
“그대가 선물한 브로치 말인가요?”
“제가 선물한 브로치는…싫을까요?”
페르소나가 선물한 브로치가 그렇게도 싫었나. 약간 심통이 난 듯한 칼라일의 뺨을 살짝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브로치 기대할게요.”
“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황제 폐하께서 선물하신 브로치보다 훨씬 예쁘고, 잘 어울리며, 다이아몬드로 잔뜩 장식한 브로치로 준비할게요.”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브로치?
뺨을 쓰다듬던 손이 허공에서 머물렀다. 다이아몬드라고? 문득 내 시선이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로 향했다. 방금 본인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마음에 둔 사람에게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석을 선물하는 유행이 돌고 있다고. 그런데 나에게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브로치를 선물한다고? 설마…응?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칼라일이 나를…?’
방금 내가 칼라일의 눈동자가 다이아몬드 같다고 해서, 그래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브로치를 선물한다고 한 것이겠지.
잠시 혼란에 빠진 사이, 칼라일이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평소에도 자주 행동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진득하게 올려다보는 시선이 심장이 간지러웠다.
분명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녀오겠다는 평범한 문장을 말할 수 없었다.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
“아기의 상태는 어떻지?”
“아기는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
“그것 참 다행이네. 건강하게만 자란다면 상관없어.”
아주 잠깐의 산책을 제외하고는 며칠째 침대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혹여나 아이가 다칠까, 어디라도 잘못될까, 잘못 태어나는 게 아닌가, 다리가 붙거나 눈 한쪽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는 일도 있다던데, 그 불행한 경우가 내 아이에게 일어나면 어쩌나.
하지만 다행히도 의사는 아이가 멀쩡하다고 말했다. 부른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건강하다니 다행이었다. 계속 이대로만 자라줬으면 했다.
그럼 모든 명예와 축복을 안고 태어날 것이다. 이 제국을 이끌어갈 아이,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고귀한 생명으로 대접받겠지.
그리고 이 아이는 내가 황후의 자리에 계속 남아있게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 부디 건강하게 태어나야 한다, 아가.’
하녀를 시켜 창문을 열게 했다.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두꺼운 무역학 서적을 집어 들었다.
“황후 폐하, 너무 오랫동안 책을 보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수업도 다 끝났고, 이만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나는 괜찮으니 너는 가서 새 서적들을 더 가져 오거라.”
황후의 말투라는 게 꽤 어려웠다. 목소리의 높낮이, 단어, 숨을 쉬는 구간까지 모든 것을 신경 써야 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니까 괜찮아졌다.
노력은 빛을 발했다. 이제 막 페르소나의 정부가 되었을 때는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느끼지 못했다. 황제의 총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무도회 이후, 그런 생각을 모두 버렸다.
황후의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나는 정부나 다름없다고. 황후의 자리에 앉은 허울뿐인 황후.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정식 파티를 열었나? 아니! 페르소나는 나를 황후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황후의 자리에 앉았다고 모든 권력을 얻는 게 아니었다. 모든 권력을 얻으려면 그에 따른 지식과 태도, 예의와 인성. 그런 게 모두 받혀주어야 한다고.
로젤리아가 그랬지, 가넷 가문과 황실의 관계는 역사학 첫 장에 나온다고. 정말로 그랬다. 아마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내가 그런 창피를 당할 일도 없었겠지.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모든 권력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입을 놀린 내 잘못이었다.
더 철저히 공부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어야 했다.
약점을 파헤치고 명예를 떨어트릴 수 있게 칼을 갈아두었어야 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노력하게 무리한 만큼 대부분의 지식을 익혔다. 지금껏 로젤리아가 내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고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만큼 멍청하고 섣부른 행동을 해서다.
‘화나지만 인정하자. 인정해야 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지금까지 받은 수모를 그대로 돌려주겠어.
그때 창문 너머로 붉은 마차가 보였다. 저 문양은, 가넷 가문의 문양인데?
“…가넷 대공이 황궁에는 무슨 일이지?”
“알현 때문입니다.”
켈빈 백작부인은 샤를로테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며 말했다.
“들어보니까 헤레이스 왕국 간의 무역에 관해서 황제 폐하께서 직접 대공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부르셨다고 해요.”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황제가, 대공에게?”
관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황제를 봤어도 대공을 황궁으로 불러들여서 직접 조언을 듣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보통 황실과 비슷한 권력을 쥔 가문에게 선뜻 조언을 해 달라 부탁하나? 그리고 헤레이스 왕국…아, 그래 마력석이었어. 주로 마력석을 수입해 오는 왕국이었지.
“네, 전 대공께서도 황궁에 오셔서 황제 폐하께 무역에 관한 조언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통 대공 각하를 부르기 전에 황후 폐하와 먼저 얘기를 나누고, 그 다음 관리들과 논의를 합니다. 보통 그 과정에서 논의를 마치지만, 그때도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대공 각하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황제가 왜 황후와 국정을 논한다고? 황후는 황제를 보필하는 역할일 텐데, 국정까지 논한단 말인가?”
“레이몬드 제국에서는 황후의 교육을 받을 때 황제와 비슷한 교육을 함께 받습니다. 비록 보필하는 역할이지만 보다 완벽하게, 만약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실 경우 대신해 국정을 보살피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케도니아 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제는 정치를 하고, 황후는 그 뒤를 보필한다. 정치적 의견은 낼 수 있지만 그 공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게다가 황녀와 황자가 받는 교육은 그 차이가 정말 심했다. 질이나 수준 차이가 확실하게 달랐다.
‘샤를로테, 우리가 공부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황실 도서관의 모든 서적을 외웠지만, 며칠 뒤면 옆 나라 왕국의 왕비로 팔려갈 텐데. 이건 전부 부질없는 짓 이었어’
황녀가 이렇게 서적을 두고 공부하려고 하면 비웃음을 당할 뿐이었다.
“…황제 폐하도 너무하십니다.”
“어, 어?”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왜 황후 폐하에게는 조언을 구하시지 않고!”
아, 그거 때문에 아까부터 켈빈 부인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인가. 말없이 눈을 깜짝이며 옆에 쌓아둔 서적들을 쓸어내렸다.
이제 막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켈빈 부인의 말대로 조금 너무하네. 이번에 새 복지 정책에 대한 기획안을 페르소나에게 보냈는데, 보기는 했을까. 또 수석비서에게 넘기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그 기획안에 대해 로젤리아에게 조언을 구할지도 몰랐다.
샤를로테는 말없이 두꺼운 서적을 툭툭 두드렸다. 이혼을 했음에도 페르소나와 로젤리아 사이에 남아있는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황후의 왕관을 쥐고 있는 것은 샤를로테 본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넷 대공을 만나러 가야겠다.”
“네?”
“너는 가서 자리를 마련해주렴.”
계속 이런 상태일 수는 없었다. 슬슬 갈아둔 칼을 꺼내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샤를로테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왕관을 고쳐 썼다.
샤를로테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로젤리아가 타고 온 마차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