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데리고 갈 수 없다
“클로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로웬이 관련이 있나요?”
“저와 루치아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가요, 로젤리아님. 지금쯤이면 루치아노가 준비해놨을 겁니다.”
“준비라니…?”
칼라일이 팔을 벌려보라는 손짓을 했다. 팔을 벌리자마자 칼라일은 나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들어올렸다. 갑자기 들어 올린 탓에 놀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 칼라일?”
“몸도 안 좋은데 크게 움직이면 안돼요.”
“뭐가 안 되는데요? 어서 내려줘요!”
시종들이 보면 어떡하라고!
하지만 칼라일은 꿋꿋하게 나를 안아서 로웬의 방문 앞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갑자기 로웬의 방에는 왜? 말없이 칼라일을 올려다보자 칼라일은 웃으며 세 번 노크를 했다. 노크를 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최대한 로웬과 칼라일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루치아노였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로젤리아님.”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왜 그대가 로웬의 방에 있는 거죠?”
루치아노의 어깨 너머로 침대에 누워있는 로웬이 보였다. 분명 아까 황궁으로 간다고 나간 지가 언젠데…왜 방에서 자고 있는 거지?
“일단 사정부터 설명해드리자면, 제가 마법으로 기절시켜놓았습니다.”
“기절이요?”
“로젤리아님께 꼭 확인시켜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몸에 큰 무리가 안 간다면 기절시키는 것은 딱히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로웬을 기절시키면서까지 내가 확인해야 할 게 뭐가 있지?
나는 곧장 잠들어있는 로웬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셔츠 앞부분이 풀어헤쳐 있었다. 게다가 기절시켰다 하기에는 너무 푹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으로 내려온 다크써클이 보였다.
수면제 가끔 먹는다는 거, 전부 거짓말이었나.
“일단 제가 로웬을 기절시켜놓은 것은….”
루치아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칼라일님께 들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왜 칼라일님을 찾아왔고, 로웬을 만났을 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전부 들었어요. 그리고…로웬과 대치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것 때문에 로웬을 이렇게 기절시켜놓았습니다.”
로웬과 대치한 루치아노. 하지만 로웬은 루치아노를 알아보지 못했다. 루치아노가 모습을 바꿔서 그런 건가? 원래의 모습으로 만난 게 아니라서?
“로젤리아님도 대충 예상은 하신 것처럼, 저와 칼라일님은 로웬의 기억을 누군가 뒤에서 의도적으로 지우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나 토벌, 침략 같은 경우는 규모는 클뿐더러 지우기가 정말 복잡합니다. 일부러 공을 들여 조금씩 지우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럼 루치아노의 말대로 누군가 공을 들여 지속적으로 기억을 지워나갔다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럼 누가? 누가, 무엇을 위해? 무슨 의도로 로웬의 기억을 지웠지?
“그래도 혹시 몰라, 지금처럼 로웬을 마법으로 기절시킨 후 확인했습니다.”
“뭘 확인했죠?”
루치아노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추를 푸는 손끝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표정은 나름대로 침착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인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고 뒤로 돌았다. 등에는…크게 베인 자국이 있었다. 이건 분명 검에 베여서 생긴 흉터였다.
“대치 도중 실수로 등을 보였고, 그대로 검에 베였습니다. 그리고 쓰러지기 직전, 마법으로 공격을 해 로웬의 심장 부근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럼 로웬의 몸에….”
“있습니다. 가슴팍에, 제 마력이 흐릿하게 남은 상처가요.”
나는 곧바로 로웬의 셔츠를 더 풀어헤쳤다. 정말 심장 부근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 순간 로웬에게 받았던 편지가 떠올랐다.
‘황후 폐하, 로웬 경께서 보낸 편지에 무슨 안 좋은 내용이라도 있나요?’
‘심장 부근에 이상한 상처가 있다고, 어디서 다쳤는지 기억이 안 나서 방치했다가 결국 곪아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구나.’
‘네? 얼마나 방치하였길래…? 마, 많이 안 좋으시대요? 쓰러지셨대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최근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치는 것 같아. 이번 마력연구관으로 플로트 후작이 취임하질 않나. 사교계에 분란이 일어나질 않나. 황제폐하께서…웬 이상한 여자를 계속 옆에 끼고 있질 않나. 분명 상처는 다 나았을 텐데.’
그때 그 상처, 그게 루치아노가 남긴 상처였구나. 심지어…이 상처에서 루치아노의 마력이 아주 미세하지만 느껴졌다. 이렇게 된다면, 더 이상 다른 의심은 할 수 없었다.
로웬은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을 죽였고, 루치아노는 그런 로웬을 막아섰어. 그리고 로웬은 기억을 지운 것 마냥 루치아노를 기억하지 못했지. 그 외의 기억들도 전부.
그럼 로웬의 기억을 지웠다면 상당히 실력 좋은 마법사가 했을 게 분명한데. 로웬의 기억을 지움으로서 이득을 얻는 마법사가 과연 누굴까. 이런 행동을 해서 얻어지는 게 도대체 뭐지?
“지금껏 숨긴 이유는. 그대 때문이었습니다.”
“…나한테 숨길 이유가 없어요.”
“로웬이, 그대의 오빠잖아요.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처는 그대들이 받았죠. 내 상처를 왜 신경을 써요. 그대의 가족들을 죽인 사람의 여동생인걸.”
이 와중에서도 배려를 한다니.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오빠를 원망한 건 맞아요. 정말, 원망했어요.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요. 루치아노를 기억하지 못했고, 심지어 군사 지원을 나간 것조차 기억 못 했죠. 몸에 루치아노가 남긴 상처마저 있음에도. 이상하잖아요, 아무리 봐도 이상한걸요.”
칼라일은 애써 안심시키려는 듯 내 손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했지만, 눈은 서글퍼 보였다. 루치아노도 마찬가지였다. 미소 짓고 있지만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서 원망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 같았으면 미워했을 것 같은데. 그게 당연한 건데. 원망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저희끼리 일을 조사해보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의견이 갈렸어요. 로젤리아님께 이 일을 말하자, 아니다, 말하지 말자. 하지만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상, 로젤리아님이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어떻게 도와주길 원해요? 말해요. 나는 도와줄 수 있어요.”
도와줄 수 있어. 이렇게 그들에게 남은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어. 도와줄 수 있는 건 전부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로젤리아님은 황후 시절에 군사권에 관련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 일을 밝혀내려면 로웬이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당하던 날, 베논 제국으로 군사 지원을 나갔는지를 알아야 해요.”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침공당하던 날 로웬은 타국으로 군사 지원을 갔었어요.”
확실히 나는 황후도 아니고 군사권에 관여할 수 없어.
로웬에게 물어본다면 분명 의심을 살 테고, 게다가 로웬이 군사지원을 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닐 테니까…그와 관련된 문서를 찾아야 해.
“그럼 기사 보고서를 확인해야겠군요.”
“네? 기사 보고서요?”
“레이몬드 제국에는 기사 보고서라는 게 있습니다. 기사단장이 제국을 벗어날 시 무슨 일을 했는지 하나도 빼지 않고 세세하게 적어 올리는 보고서죠. 그 보고서만 찾으면 아마도 이 일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보고서가 어디에 있어요?”
“황제의 집무실 안에 있어요.”
“그럼…몰래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겠네요.”
보고서를 보관하는 위치를 알고 있다. 집무실은 언제나 기사 두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매일 교대로 돌아가면서 그 앞을 지키는 게 원칙이었다.
“오늘 원래 알현을 가기로 했지만 가지 못했어요. 보좌관을 대신 보냈죠. 그걸 명분으로 다시 알현 날짜를 잡아볼게요. 알현은 집무실에서 보니까, 기사 보고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건국제 날을 이용해보도록 하죠.”
건국제 날은 외국 귀빈들을 위해 일부러 황궁의 일부분을 개방했다. 귀빈은 황궁에 딸린 별궁에서 지내도록 했고, 협정이나 회의로 인해 자주 황궁 안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현 때가 안 된다면, 건국제를 이용하는 게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제 곧 건국제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날은 다른 제국들과 왕국들, 귀족들이 모두 오겠죠. 그러면 당연히 안전을 위해 많은 기사들을 배치할 테고, 그럼…집무실 또한 기사를 배치하는 것 대신 임시적으로 잠궈 놓는 방식을 이용하겠죠.”
건국제를 때를 노리자. 그럼 될 거야. 그때 집무실에 몰래 잠입하여, 보고서를 훔쳐오면 될 거야.
몰래 가져와도 티는 거의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보고서를 올릴 때 때 거의 20장 정도가 한 번에 오니 그 많은 보고서 중에서 중요한 것만 가져온다고 티도 안 날 테고…하지만 위험부담은 컸다. 몰래 집무실에 들어간 것을 들킨다면?
그리고 어쩌면 경비를 더 강화할 수도 있을 텐데….
“어쨌든 시도는 한 번 해볼게요. 어떻게든 찾아야죠.”
“제게도 따로 보고서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마법으로 잠입해보려고요?”
“할 수 있으면요.”
“투명 마법이라도 있나요?”
“그렇게 편리한 마법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때 잠들어있던 로웬이 느리게 눈을 떴다.
“저기 로젤리아님.”
“?”
“……깼는데요.”
깼다는 말에 빠르게 손으로 로웬의 눈을 덮었다. 눈을 가린 상태에서 작게 속삭였다.
“일단 나가도록 하죠.”
칼라일과 루치아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을 로웬의 머리끝까지 덮어주려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칼라일, 루치아노. 만약에, 이번 일을 잘 해낸다면.”
만약, 기사 보고서를 가져오는데 성공하고 누가 로웬의 기억을 지운 것인지 알아낸다면?
“그 뒤에는…어쩔 생각이에요?”
***
릴리는 로웬이 선물해준 브로치를 가슴에 단 채 조용히 로웬의 방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하녀에게 로웬의 방 청소를 지시했지만 단체로 감기에 걸린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릴리가 하게 되었다. 거의 몇 달 만에 방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항상 저택으로 오지 않고 황궁에 마련된 기사들의 숙소에서만 머물다 보니 방 청소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만 하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대공저에 자주 올 거라니, 청소를 자주 해야 했다. 게다가 최근 로젤리아가 대공으로 즉위하고 상단 업무를 배우느라 바쁘다 보니 청소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계속 깜빡하고 있었다.
‘로, 로젤리아님. 왜 갑자기 제게 교사들을 붙이시는지….’
‘네가 상단주의 자리를 맡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많더구나. 자꾸 몰락 귀족, 몰락 귀족 하는데. 사실상 정말로 몰락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얼른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고 사교계에 진출을 하렴.’
‘로젤리아님! 너무 갑작스러워요!’
‘안 갑작스럽단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렴. 무역학을 가르쳐 주실 교사를 불렀으니.’
그렇게 하루에 공부만 몇 시간을 하는지….
릴리는 글자만 보면 핑글핑글 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불 정리를 하기 위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침대에 누군가 누워있었다.
로웬은 분명 아침 일찍 황궁으로 출발했는데?
하지만 이불을 걷자 누워있는 로웬이 보였다. 셔츠를 다 풀어헤친 로웬이….
셔츠 사이로 보이는 살갗에 릴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게다가 너무 당황한 탓에 손을 뻗어 단추를 잠그려던 순간 로웬이 눈을 떴다.
“어….”
로웬의 붉은 눈동자가 릴리의 손에서 자신의 흐트러진 셔츠로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이게 무슨….”
“아니에요!”
“네, 네?”
“저는 이불을 걷었을 뿐이고 옷은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모르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릴리가 로웬의 단추를 쥐고 있었다. 릴리는 화들짝 놀라며 그대로 손을 뗀 채 뒷걸음질을 쳤고, 로웬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보, 보려고 한 게 아니고…이불을 걷었는데….”
“아, 괘,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얼굴은 붉고 또 붉었다. 붉은 머리카락보다 더 붉은 상태였다. 릴리는 로웬이 떨리는 손으로 황급하게 단추를 잠그려 애쓰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얼굴을 손에 묻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언니, 엄마, 나에게 도움을 줘!
그때 정말로 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언니,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한 거야?’
‘으응, 엄마랑 아빠가 처음 만난 건 사교 파티였대.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엄마의 머리카락이 아빠의 단추에 걸렸다나 봐. 머리카락을 빼려고 하다가 그대로 사람들 많은 곳에서 옷 단추가 뜯어져서….’
‘헉, 사람들 많은 데서?’
‘그래서 엄마가 너무 당황해서 아빠 옷 여며주면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외쳤대.‘
’응?’
’그래서 둘이 결혼했대.’
’응…?’
릴리는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외쳤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우리 부모님이 정말 특이한 경우야, 릴리. 너는 그러면 안 돼.’라는 뒷말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채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와 결혼해요, 로웬님!”
정적이 흘렀다. 얼떨결에 청혼을 받은 로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