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50화 (50/170)

#50화,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로젤리아님….”

“그걸 가장 먼저 말했어요,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나한테!”

숨이 막혔다.

이게 정말 사실인지, 거짓말 없이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얘기한 것인지, 뭐라도 묻고 싶은데.

이마를 짚으며 입술을 꾹 물었다.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 거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전부 사실이죠?”

“….”

“부정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로웬을, 감싸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일단 두 사람의 의견을 모두 들으려 하는 겁니다.”

이 둘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나와 로웬은 무척이나 닮았고,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로웬이 떠올랐을 텐데.

내가 루치아노를 보고 샤를로테를 떠올린 것처럼, 혹여나 내 얼굴을 보며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칼라일과 루치아노는 정말, 친구 같았는데. 상냥한 태도로 장난도 치면서 가끔씩 말장난도 하면서 그렇게 편한 태도로 나를 대했잖아.

그건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목을 턱, 걸린 느낌이었다.

커다란 쇠사슬이 목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가만히 목을 매만지며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계속 속이 답답했다.

흐릿해진 시야를 다잡으려고 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로웬이 멸문을 지시했다고?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다고? 오빠로 인해 모두가 죽었다고….

“어떡하려고 했어요?”

눈이 너무 뜨거웠다. 뜨거운 액체가 차올라서, 그 액체가 금방이라도 뺨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다. 내뱉는 말 한마디가 따가웠다.

“오빠를, 로웬을 어떻게 하려고 했나요?”

“….”

“대답해 줄 수 없을 정도로, 원망했나요?”

한참을 입을 몇 번 움직이던 칼라일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에는 루치아노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방 안에 감도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래요? 너무 많은 얘기를 들어서, 머리가 아프니까…내일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보다 더 복잡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칼라일의 뺨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웃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내가 웃고 있었는지 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무거웠던 것은 단순히 어제, 여러 가지 일이 연달아 터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열이 상당히 심했다.

붉어진 뺨을 보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는 수 없이 보좌관을 대신 보내면서 급하게 편지를 작성했다.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보좌관에게 편지를 맡겨두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니,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오늘 황궁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로웬이 기사복을 갖춰 입은 채 방으로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나는 베고 있던 베개를 살짝 움켜쥔 채 몸을 일으켰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로웬, 로웬은 그때도 저렇게 기사복을 입고 있었다. 매일매일 손질한 검을 손에 든 채, 차가운 붉은 눈동자로 무너진 저택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프다더니 진짜야?”

“그럼 가짜겠어….”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 아냐? 한동안은 네 업무 중 반은 내가 할 테니까 좀 쉬어.”

나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한 채 로웬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웬의 얼굴을 본 순간 내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저런 얼굴일까.

애초에 로웬과 나는 쌍둥이였다. 한 뱃속에 있었고, 태어날 때 로웬이 먼저 태어나서 오빠라고 부를 뿐 나이도 같았다. 외모도 같고, 취향도 같고. 가끔 로웬을 볼 때면 거울을 보는 듯했다.

내가 기사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아마도 나와 로웬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 얼굴을 보면 로웬이 떠올랐을 게 분명한데.

나는 뜨거워지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도통 머릿속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로젤리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오빠는?”

“응?”

“기사단장 하기 싫어했잖아. 애초에 기사가 될 마음도 없지 않았어?”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는 로웬을 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로웬은 기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최근, 내 이혼과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로 인해 신경이 한껏 예민했을 뿐, 평소 생활을 보면 차분하고 조용했다. 놀랄 때도 눈을 크게 뜨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많이 달라진 성격이었다. 어렸을 적 로웬은 토끼를 보고 도망갈 정도로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아버지는 그런 로웬을 걱정했고, 기어코 기사가 되도록 강요했다. 기사 생활을 하는 내내 우울증 약을 복용한 것을 보면 지독히도 싫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그때 아버지를 말렸어야 했는데.”

“너는 그때 머리에 얹은 물그릇을 떨어트리기만 해도 회초리 15대를 맞던 때였어. 네가 뭘 말려, 말리기는.”

“말릴 수 있었어. 어떻게든 말렸다면 되겠지…아직도 약 먹고 있어?”

로웬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설마, 정말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 건가?

“오빠.”

“괜찮아.”

“뭐가 괜찮은 건데?”

“익숙해. 가끔 잠을 못 자서 수면제를 복용할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꽤나 기운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넷 가문은 일절 군사권에 개입하지 못한다.’ 그 조항이 얼마나 위험한 조항인지를, 나와 로웬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내가 기사가 못 되도록 말렸어야 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그러면 오빠도 행복했을 거고, 헬리오도르 가문이 멸문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칼라일도 가족을 잃을 일도 되었을 거야, 동생과 헤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베개를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로젤리아?”

“미안하니까 한 대만 때릴게.”

그리고 베개로 로웬을 얼굴을 내려쳤다.

“아니, 왜 때리는 건데? 이유라도 설명하고 때려!”

“억울하면 오빠도 나 때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한 대만 때린다고 했지만,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에 베개를 더 꽉 쥐고는 계속 그의 가슴을 공략했다. 먼지가 풍겼고, 베게 시트가 살짝 찢어져 깃털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흐려지는 시야를 수습하는 게 더 급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로웬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내 어깨를 잡고 침대에 앉혔다.

로웬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이 있는 상태에서 몸을 크게 움직인 탓에 얼굴은 더 붉어지고 열은 더 올라있었다.

***

칼라일이 내 방으로 온 것은 열이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

“싫다면, 나중에 얘기하고 싶다면 로젤리아님이 부르실 때 올게요.”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나는 살며시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칼라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제 울었던 탓인지 눈가는 아직 붉어져 있었다. 뜯어서 생긴 상처에는 연고와 새 거즈가 붙여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등 위에 난 상처를 쓰다듬었다.

“아프다고 들었어요. 릴리 양이 열이 심하다고 했는데, 괜찮습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약 먹고 푹 쉬어서 그런 가 봐요.”

“정말로 괜찮아요?”

칼라일은 내 이마에 손을 대다 입술을 꾹 물었다.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충격 받고 아파할 줄 알았다면….”

알았다면?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대가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자꾸 그대들이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칼라일이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언제나 칼라일이 내 어깨에 먼저 기댔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미안했다. 얼굴을 보니 더 미안했다.

이런 행동조차 나는 할 자격이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을 잘 아는데, 칼라일이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따스해서 좋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꾹 누르며 겨우 입을 뗐다.

“내게서 로웬을 봤나요?”

“…아니요.”

“거짓말. 나는 종종 루치아노에게서 샤를로테를 봐요. 나는 로웬과 쌍둥이에요. 어떻게 나에게서 로웬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거짓말조차 나를 배려하려 애쓰는 게 느껴졌다.

칼라일은 내 어깨를 잡고 천천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투명하고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로젤리아님. 로젤리아님이 물으셨죠? 로웬을 원망했냐고요.”

“그랬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저는 사실 로웬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했었다니? 왜 과거형이야?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야?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칼라일의 얼굴에, 가슴 안쪽이 쿡쿡 쑤셨다.

“저도 한때 로웬을 죽이고자 했어요, 로젤리아님.”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예요?”

“네, 아니에요.”

“어째서죠? 그대가 그랬잖아요. 저택을 빠져나오기 전, 기사의 수가 너무 많아 숙부님 홀로 그 기사들을 상대했다고요. 그 기사들을 지휘한 사람이 로웬이에요, 그런데 왜,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로웬은 내 오빠다. 사랑하는 내 오빠, 나의 쌍둥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루치아노에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저도 로웬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제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이니까요.”

멸문,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칼라일도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로웬이 루치아노를 알아보지 못했죠?”

“알아봤어야 했나요?”

“네,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저는 몰라도, 루치아노 만큼은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칼라일은 은빛 눈동자를 빛나며 떨리는 내 손을 감쌌다.

“계속 얘기해요.”

“제가 처음에 해줬던 말, 기억하십니까? 저는 루치아노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저택에 걸린 마법을 깨트리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맞아. 그렇게 얘기했었다. 그리고 루치아노가 칼라일을 찾으러 오고, 그 뒤로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하지만 미워했다 하기에는 뭔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렇게 피눈물을 흘려가면서까지 싫어했으면서, 다음날 함께 식사를 하고 둘이서 웃으며 장난까지 쳤으니까.

원망했다는 사람치고는 뭔가 말과 행동이 다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루치아노가 저를 찾아오고 전부 보여줬어요.”

아니었다고? 루치아노가 도망친 게 아니라고? 그럼 뭘 했다는 거지?

장막을 깨트린 게 아니다, 혼자 도망치려 한 게 아니다. 그리고 루치아노는 칼라일을 찾으려 레이몬드 제국으로 왔고, 심지어 나와 릴리를 위협했다….

내 목에 검을 들이대면서까지 칼라일을 찾아야 했던 이유가 뭘까.

“루치아노는 혼자 도망치거나, 저택에 걸린 마법을 깨트린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금껏 오해하고 있었어요.”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딱딱하고 얼음 조각을 쥔 듯한 감촉이 어쩐지 예전에 한 번 만져본 기억이 있었다.

“마법을 깨트린 건 기사들 사이에 숨어있던 마법사들이었고, 루치아노는 로웬을 막아섰습니다. 그와 그 기사들을요.”

도망친 게 아니라, 로웬을 막아섰다.

그래, 그래서 그가 로웬에게 물어본 거야. 베논 제국에 군사지원을 나간 적이 있냐고, 자신을 본 적이 있냐고.

그때 루치아노가 로웬을 홀로 막아서,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럼 모든 얘기가 들어맞는다, 한 가지만 빼고.

“그럼 로웬은 왜….”

로웬은 왜 베논에 군사지원을 나간 적이 없다고 물은 거지?

왜 루치아노를 알아보지 못했던 거지?

그 순간 클로이가 떠올랐다.

마치 기억을 지운 것 마냥 내게 했던 말, 칼라일과 루치아노를 만난 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클로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