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멸문을 지시한 사람
애초에 샤를로테의 말은 믿지 않았다.
만약 샤를로테가 진실만을 말했다 하더라도 나는 내 귀로 직접 듣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 칼라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가 내가 가진 의심들을 풀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니 칼라일이 이렇게 믿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믿겠어.
나는 내 손을 힘주어 잡고 있는 칼라일의 머리카락을 쥐어 조심스럽게 뒤로 넘겨주었다.
“샤를로테의 말을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은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날 이용하려 했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는 없었겠죠. 이해해요.”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한편으로는 무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 나를 이용해 샤를로테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먼저 말해주겠어.
칼라일은 샤를로테의 복수를 위해 나를 이용하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이성으로 느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힘들었을 것이다
이용하고자 마음먹은 상대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것은?
클로이는 왜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할까.
루치아노가 로웬을 만난 날, 나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 왜 곧바로 나에게 오지 않았지?
그래놓고 멋대로 사라졌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말한 이유가 뭐야?
“하지만 나에게 왜 거짓말은 한 것인지, 그건 그대의 입으로 들어야겠어요.”
“로젤리아님….”
“루치아노가 로웬을 만났어요. 그때 루치아노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말하지 않았어요.”
사실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 분명한데, 마치 말을 하지 못하도록 누군가 입을 막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 루치아노에게서 흐릿하지만 칼라일의 마력이 느껴졌었다.
창문에서 보았던 금빛의 무언가, 역시 그건 칼라일이었을까?
게다가 루치아노가 로웬을 만났다고 말했는데, 칼라일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붉어진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클로이는 그대가 내게 찾아오기 1시간 전에 도착했다고 말했어요. 왜 나에게 곧바로 오지 않았어요?”
많이 걱정했다. 일부러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을 뿐, 내 실수로 인해 괴로워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렇기에 업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기다리는 시간만 점점 늘어났다.
내가 걱정한다는 것을 칼라일이 정말 몰랐을까.
그에게 따지듯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 바로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미안, 해요….”
떨림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내가 말한 의문들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일부러 그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말해줘요.”
“!”
“내게는 말해줄 수 없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말해줘요. 칼라일.”
말해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들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숨기는 게 무엇이었길래.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칼라일은 내가 한숨을 쉬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칼라일. 날 봐요.”
“….”
“칼라일, 고개 들고, 나를 봐줘요.”
내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자 칼라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꽤나 지쳐보였다.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도 상당히 지쳐보였다. 둘 다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이번에는 부디 말해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천천히 한 글자씩 내뱉었다.
“그대는 알고 있죠, 루치아노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클로이가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돌아온 것을 숨기면서까지 비밀로 감춘 채 나눠야 했던 대화를, 나에게 얘기해줘요.”
칼라일의 어깨가 떨렸다. 공포로 가득 찬 눈은, 똑바로 나를 향했다.
공포라니.
뭐가 두려운 거야?
나에게 얘기하는 게 무서워? 내가 알게 되는 게…두려운 거야?
어째서?
문득 가슴 안쪽에 묻어두었던 불안함 감정이 한 순간에 싹을 틔웠다, 심장에 뿌리내려 세게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무덤덤하면서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거칠게 헤집었다.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칼라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루치아노가 보였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그는 문을 잠그며 나와 칼라일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이런 상황으로 예측이라도 한 듯, 침대 끝에 털썩 앉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손도 칼라일처럼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멸문이라니?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그게 칼라일님과 제가 나눴던 대화의 핵심입니다.
“루치아노!”
칼라일은 버럭 소리치며 다급하게 루치아노의 말을 끊어냈다.
“그만해. 이건 아니야.”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고요. 이럴 거면 차라리 로젤리아님께 말씀드리라고 했잖아요. 로젤리아님이 계속 모르실 거라 생각했어요? 보세요, 칼라일님 원하시는 데로 된 건가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는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무슨 소리지? 내가 계속 모를 거라고? 차라리 내게 말하라고 했다고?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과, 내가. 무슨 상관이길래….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보았던 또 다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칼라일의 기억 말고도 다른 기억도 보았었다.
불타던 저택, 기사들의 공격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환한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 기사들에 의해 무너지는 저택의 문….
설마 그게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과 관련 있는 기억이었나?
‘제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죄 없는 우리 제국의 기사들을 죽인 놈의 집안이다! 어서 장막을 무너트려!’
그때 어떤 사람이 그렇게 외쳤었지. 제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제국의 기사들을 죽인 놈의 집안이라고.
그런데 왜, 익숙하지.
그 외침이, 목소리가 왜 귀에 익는 거지?
“로젤리아님,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은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당한 날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저택으로 침입한 베논 기사들에 의해 죽었어요.”
“루치아노, 그만해!”
칼라일은 루치아노의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말하는 내내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힘들어 보였다.
칼라일이 왜 로웬을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으로 본 거지?
루치아노는 왜 로웬을 증오스러운 눈으로 본 거야?
‘…그 돌.’
릴리의 저택에서 주워온 깨진 돌. 나도 모르게 그 돌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면에 금이 잔뜩 간 그 돌은 내 손가락이 닿자마자 손끝을 타고 몇 개의 기억들을 머릿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내가 안개 속에서 본 기억들이 좀 더 또렷하게 흘러들어왔다.
저택을 둘러싼 무장한 기사들. 그 기사들을 지휘하는 한 사람.
차가운 붉은 눈동자가 저택 근처에 쓰러진 시신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돌에 금이 갔다. 자꾸만 금이 갔다. 내가 인상을 찌푸릴수록, 손의 떨림이 심해질수록 금방이라도 깨지려는 듯 덜컥거렸다.
그러나 흘러들어오던 기억은 칼라일에 의해 툭 하고 끊겨버렸다.
“보면 안 돼요.”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럴 줄 알았어요.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칼라일은 금이 잔뜩 간 유리처럼 약해 보이는 돌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베논 기사들에게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던 사람….”
왜 그때는 몰랐던 거지?
안개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 기사들에게 명령하던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 익숙했다.
아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 사람이 바로 로웬 가넷입니다.”
모든 소리가 귀에서 멀어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다.”
“지금 로웬이, 멸문을,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키게 만든 사람이라고요…?”
심장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로웬이 헬리오도르 가문의 멸문을 주도했다고? 그 사람들을 죽였다고? 잘못된 게 분명하다며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이 절로 떨렸다.
그때 안개 속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현장이 모두 로웬에 의해 그렇게 된 거라고?
나무가 부서지고 집이 무너지던 그 장면이, 비명이 난무하던 그 끔찍한 상황을 만든 사람이, 로웬….
‘아니, 아니야.’
로웬은 기사단장이야.
군사 지원을 나간 국가를 잊을 리가 없잖아!
나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야. 거짓말을 할 리도 없어.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칼라일이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뭐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드디어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게 도리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루치아노가 베논 제국에 군사지원을 나갔냐고 물어본 것도 이 때문일까?
루치아노가 로웬을 본 것은, 분명 헤레이스 왕국으로 군사적 지원을 나갔다가 베논 제국을 거쳐 지나갈 때 본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베논 제국에서, 로웬을 본 거라면?
‘베논 제국에서 로웬을 보았다. 로웬은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을 죽였다….’
루치아노는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이 공격당해 사망한 것은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 당할 때라고 말했다.
설마, 로웬이 안케도니아 제국의 침략에, 개입했다면?
그럼 나는 루치아노와 칼라일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거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떤 목소리로 그들의 말에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단 하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칼라일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뺨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내 뺨을 감싼 칼라일이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비친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려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밀어내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을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분명 그렇게 아파하는 표정을 지을 텐데, 어떻게 내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하겠어….”
칼라일은 지금껏 배려하고 있었다.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킨 로웬의 여동생인,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