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멀어지고 싶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벨벳 천에 감싸져 있던 황실에서 온 편지. 그리고 이 서체는 분명, 페르소나였다.
페르소나는 원래부터 편지를 작성할 때 글씨를 눕혀 쓰는 버릇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친필로 편지를 작성하는 일은 드문데…특유의 서체로 써진 ‘헤레이스 왕국 무역’이라는 단어를 눈에 담았다.
헤레이스 왕국 무역 건에 대해 조언을 받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헤레이스 왕국과의 무역이면 분명 마력석에 관한 거겠지,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수입해놓은 마력석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마력 연구를 하는데 한번 들어가는 마력석 양이 상당하다 보니 일정 주기마다 헤레이스 왕국에서 마력석을 수입해왔다.
그런데 왜 나한테 편지를 보낸 거지? 가넷 가문의 가업이 무역인 만큼 황제가 가넷 대공에게 직접 조언을 얻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기존에 해오던 방식대로 진행하면 될 텐데? 굳이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로젤리아님. 부르셨어요?”
“아, 릴리. 마침 잘 왔어. 내일 아침, 황궁으로 가야겠다. 미리 준비를 해주렴.”
“네? 황궁으로요? 어째서요?”
황실 문양이 찍힌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황실에서 왜 편지가 왔냐는 듯한 눈빛으로 내 손에 들린 편지를 응시했다.
“폐하께서 내게 가넷 대공으로서의 조언을 받고 싶다 하시는구나.”
“그럼 답신에는 알현 날짜를 내일로 써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최근 잠도 못 주무셨잖아요.”
“괜찮단다. 폐하께 여쭐 것도 있고.”
편지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서랍 가장 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수첩을 꺼냈다. 수첩은 어렸을 때부터 사용한 수첩이었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아무렇게나 있는 그대로 작성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수첩 속은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첩의 가장 뒷부분을 펼쳤다. 얼마나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것인지,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렇게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내용은 전부 칼라일과 루치아노에 관한 거였다.
***
칼라일과 대화를 하지 않은 지 5일이 지났다.
칼라일이 돌아온 이후, 루치아노에게 기초마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손 위로 새하얀 나비가 내려앉았다. 손끝에 힘을 주자 나비가 점점 분열했다. 나비는 분열할수록 점점 화려해졌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력 컨트롤이 많이 좋아졌어요. 며칠 만에 이렇게 좋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루치아노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죠.”
흩어지는 나비를 보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마력 컨트롤에 집중하다 보니 온몸에 마력이 도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통증이 뒤따라오는 일 또한 많이 줄어들었다.
마법 서적을 보면 온통 모르는 것뿐이었는데 이제는 슬슬 이해되는 것도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배울 것을 미리 찾아보려는데 루치아노가 서적을 덮어버렸다,
“가르치다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
“그대는 한번 보면 대부분을 기억하더군요…방금 읽고 있던 마법진은 정말 위험한 마법입니다. 폭발 마법으로, 제대로 사용하면 마을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기억하지 말아줬으면 해서요.”
“기억하더라도 잊어보겠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루치아노의 표정이 살짝 오묘해졌다. 말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손으로 뒷목을 쓸며 한참을 내 눈치를 보더니 괜히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로젤리아님.”
“왜 그래요?”
“혹시…칼라일님과 싸우셨나요?”
그 순간 책을 덮던 손이 멈췄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싸우다니요?”
“최근 칼라일님과 대화하는 것을 못 본 것 같아서요.”
“……처리해야 할 업무가 늘어난 탓에 바빴거든요.”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못 본 게 아니었다. 애초에 칼라일과 마주치지 않도록, 찾아오면 지금은 못 만난다며 칼라일을 피했다. 그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지금처럼.
그 말에 루치아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사실 루치아노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는 이 상황 또한 피하고 싶었다.
“정말 바빠서 그런 거예요?”
“보시다시피 업무도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 칼라일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사라져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래. 그랬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돌아왔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지.
클로이는 분명 1시간 전에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그럼 클로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가? 칼라일과 클로이가 하는 말은 너무 달랐다. 심지어 루치아노는 다음날 웃는 얼굴로 칼라일과 만났냐고, 돌아오자마자 내 방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뭐가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클로이에게 다시 한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제 루치아노와 칼라일이 돌아온 시간에 대해.
그러나 클로이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칼라일님께서 돌아오셨어요?’
클로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일과 루치아노를 만난 것도, 루치아노에게 ‘말하지 말라’라는 말을 들은 것도. 누군가 기억을 삭제시킨 것처럼, 클로이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 그 한 시간 동안 둘이 무슨 말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종종 둘이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 무슨 대화였을까?
로웬에게 군사 지원에 대하여 물은 것과 관련 있을까?
그때 루치아노의 표정, 꼭 원망스러운 상대를 만난 것 같은 그 표정.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칼라일도 루치아노와 비슷한 눈빛으로 로웬을 본 것 같았는데, 왜?
…루치아노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까지 칼라일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평소에 넘겨두었던 의문마저 점점 의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한번 피어난 의심은 점점 커지고 커져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로젤리아님?”
“아.”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어디 아프신 건가요?”
“아니요, 나는, 나는 괜찮아요. 잠을 잘 못자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칼라일님이 ‘요즘 로젤리아님께서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 라면서 약간 우울해 하셨거든요.”
“…그랬군요.”
잠시 놀란 눈을 했다. 우울해할 정도라니. 피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하려고 해도 그게 참 어려웠다. 사실은 혼자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루치아노도 마법을 배우는 것만 아니면 아마 피했을 텐데, 지금도 겨우 웃으면서 대면하는데 칼라일은 어떻게 보겠어.
“내일 아마 집에 없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해서요.”
“황제 폐하를요?”
“가넷 대공으로서 폐하께 조언을 드리려 만나는 거예요. 보통 그런 날은 거의 하루를 황궁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도 그러셨고요.”
“꽤나 의미 있는 날이겠군요. 황후가 아닌 대공으로 폐하를 마주하는 거니까요.”
루치아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저 미소가 진짜일까?
아무 말 없이 나도 미소만 지었다.
***
원래는 곧장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정원에 들렀다가 가볍게 산책을 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정원에는 칼라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방으로 왔는데…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나버렸다. 칼라일이 품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꽃을 가득 안은 채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오늘은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은빛 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빠서….”
“….”
“로젤리아님이 요즘 바빠서 잠도 못 주무신다 하여, 그래서 마법을 걸어둔 꽃을 가져왔습니다.”
내가 한걸음 다가가자 칼라일은 몸을 움츠러트리며 꽃을 꽉 끌어안았다. 꽃잎 몇 개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우울해 보인다던 루치아노의 말이 맞았다. 괜히 피했나싶어 미안하던 그 순간 칼라일의 눈가가 붉은 것이 보였다.
살짝 상처도 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뺨을 잡고 살폈다. 칼라일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당황하기 시작했다.
“울었나요?”
“!”
“왜 운거죠? 루치아노가 울렸나요? 오빠가 그랬나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울었냐는 말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표정은 이미 울 것처럼 변해있었다. 가뜩이나 우울해하는데 누가 울렸는지,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러자 칼라일은 울었냐는 내 다그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말하지 않을 생각인지,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눈가를 쓸자, 칼라일이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저랑은, 대화 안 하십니까?”
“!”
“제가 갑자기 사라진 게,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피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꽃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설마 운 게 나 때문이야?
“제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맞고, 연락도 없고 멋대로 돌아온 것도 맞는데…그렇게 피할 만큼 싫었나요?”
칼라일은 내가 그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칼라일을 잘 피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터져 나오는 숨을 삼켰다.
칼라일과 루치아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서 피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클로이는 왜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
혼자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에,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요, 왜 저를 피했어요?”
“칼라일이야 말로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왜 내가 밀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칼라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변함없으신 분이, 제게만 그러니까. 그래서 제가 뭔가 잘못했나, 그래서 화가 났나. 그래서 저와 멀어지려 하시나. 그런 고민 때문에 그랬어요.”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네가 거짓말을 해서야.
왜 돌아온 것을 알리지 않았어?
클로이가 기억 못 하는 이유가 뭐야?
계속 질질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지칠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보자. 나는 드레스자락을 꽉 쥔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왜 피했는지 알고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말해주면 제가 고칠 테니까….”
“왜 거짓말을 했어요?”
“…네?”
그 순간 칼라일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왜 온 걸 바로 알리지 않았어요? 클로이가 다 말했어요. 칼라일이 돌아왔다고 루치아노가 내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1시간이나 늦게 알려드려서 죄송하다고. 왜 거짓말을 했어요? 왜 바로 나에게 오지 않았죠?”
나는 가만히 칼라일은 응시했다. 저 말라붙은 입술에서 아무 말이라도 튀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칼라일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짓말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다음날 클로이에게 물어보았는데.”
“….”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나요?”
그의 은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떨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처럼 보였다. 덕분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심이 사실이 되기 시작했다.
칼라일과 루치아노는 나에게 말하지 못할 대화를 나누었다. 클로이의 입을 막아가면서, 그녀의 기억을 지워가면서. 그게 뭘까?
차라리 뻔뻔하게 나오면 좋을 텐데도 칼라일은 입을 꾹 다문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한테 숨기는 게 무엇인지.
나는 칼라일이게 마음을 열었는데,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칼라일은 아니었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칼라일의 입에서 직접 들으려고 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 의심은 단순히 예민한 신경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칼라일과 루치아노는 명백하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물어보는 것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릴리의 저택에서 몰래 가져왔던 깨진 돌을 가져와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릴리의 저택에서 그대의 기억을 보았습니다.”
“…이, 이걸, 어떻게.”
“샤를로테는 그대가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고 말하더군요. 정말로 나를 샤를로테의 복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나요?”
복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도 상관없다 믿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입 밖으로 내뱉으니 가슴 한쪽이 먹먹했다.
“맞다 해도, 괜찮아요. 상관은 없었습니다. 나도 샤를로테에게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었고, 그대의 기억을 본 순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으니까요.”
칼라일은 돌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안개가 있던 방에서 뭔가를 보았냐고 묻은 칼라일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럼 그대의 몸에 샤를로테의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던 이유가….”
“샤를로테가, 그대의 부모님을 죽여서.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한 용도로 쓰려 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나는 괜찮았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그대는 나를 배신해도 좋다고.”
칼라일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마지막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샤를로테는 그대가 내게 보여준 모든 모습이 가짜라고 했어요.”
정말 그럴까, 정말 모든 게 가짜일까.
만약 이번에도 대답을 안 한다면,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에요!”
“!”
“아니, 아니에요, 정말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까….”
그 순간 칼라일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얼굴을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버거운지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칼라일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맞아요.”
칼라일이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를 이용하려고 했어요.”
목소리마다 죄책감이 묻어나 있었다.
“샤를로테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내 가족을 죽인 그 여자가, 마지막까지 믿었지만, 나를 검으로 찔렀고, 내 동생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고…!”
칼라일은 말을 할수록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황후라고 칭해진 그대를 보았을 때, 정부가 되어서라도, 그대를 이용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하지만, 점점 마음이 바뀌었어요.”
…마음이 바뀌었다고?
“이용하고자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그대의 곁에 있으면서 변했습니다. 기꺼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던 말이, 나를 위협하던 기사들을 막아주던 그대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나를 걱정해주는 게 싫으면서도 좋았습니다.”
칼라일의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미안해졌어요. 그런 마음으로 그대를 보았던 게, 그대에게 다가선 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음에도 그의 손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미안했어요. 어느샌가 그저, 옆에 남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그대를 이용하겠다는 마음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정말입니다.”
믿어달라는 것 마냥 손가락을 얽혀왔다.
“무도회 때 했던 말, 기억해요? 진짜였어요. 그때 했던 말을 아직까지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무도회의 기억이 눈앞을 스쳤다. 꽃이 살랑거리며 뺨을 간지럽히고, 칼라일의 눈부신 금발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때 그 기억, 어쩐지 이 세상에 단둘이 남아도 상관없겠다고 느껴졌던 그 순간.
‘좋아해요, 로젤리아님.’
‘진심이에요.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심일 거예요.’
‘여기서 더 반하게 되면 그대 앞에 서지 못할 수도 있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샤를로테의 말 믿지 말아요.”
“….”
“샤를로테가 아닌, 저를 믿어주세요.”
환하게 웃던 칼라일의 표정은 지금의 그의 표정과 너무 상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