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칼라일이 돌아왔다
“글씨 휘날리는 거 보니까 많이 급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 자신들한테 피해가 오는 게 무서웠겠지. 자존심 하나 지키기 위해 때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오드렝 남작이나, 남작을 압박하는 귀족들이나. 하나같이 멍청해.”
로웬과 마주 앉은 채 편지를 읽었다. 나는 편지를 읽는 척 로웬을 살폈다. 역시 로웬을 진정시키는 데 릴리가 제일이었다.
로웬에게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둘러대며 최대한 루치아노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옆에서 릴리가 함께 거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의심을 어느 정도 떨쳐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시시하기는.”
로웬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최대한 루치아노와 마주치지 않게 하자, 속으로 다짐하며 귀족들이 보낸 편지를 던지듯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날 무역 상단에 반발하기 위해 대공저로 찾아온 귀족들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편지를 써서 가넷 가로 보냈다. 일부러 애를 태우려고 며칠 있다가 개봉하여 확인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하나같이 편지에는 ‘하녀에게 손찌검을 한 사람이 오드렝 남작입니다.’라는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나는 더 보지도 않고 벽난로에 편지를 집어던졌다.
“릴리 양이 뒷수습을 해줬다고 하던데.”
“응, 릴리가 잘해줬어. 원래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릴리도 이제 상단주고, 사람을 마주하고 분란을 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조정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사랑스러워.”
로웬은 협박을 하는 릴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나는 몇 년째 릴리를 짝사랑하고 있는 로웬을 보며 어깨를 떨었다.
“오빠 취향 진짜 이상한 거 알지?”
“뭐가 이상해, 내가 릴리 양을 좋아하는 게?”
“아니,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가.”
릴리는 내 전속 시녀이자 호위기사로 배정되었다. 호위기사라니, 처음에는 다들 릴리를 무시했다. 시녀인 것은 이해하지만, 호위기사라고? 그건 로웬도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키도 작았고, 검은 제대로 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 정도로 손목도 가는데다가 굉장히 아담한 체구였으니까.
로웬은 그런 릴리를 보고 ‘쥐새끼’ 같다고 말했다. 물론 정말 ‘쥐새끼’라는 의미 그대로 말한 건 아니었다.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아기 쥐’를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생긴 참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당시 쥐새끼라는 말을 들은 릴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로웬에게 검술 대련을 신청했다.
나도 처음에는 릴리를 말렸다. 아무리 그래도 로웬은 레이몬드 기사단의 단장이고,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검술을 배워왔으니 이길 수 없다고.
그러나 승리를 가져간 건 릴리였다. 몸을 낮춰 순식간에 로웬의 눈앞까지 다가간 릴리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놀란 로웬은 검을 피하다가 그만 몸의 중심이 무너졌고, 그대로 릴리에게 제압당했다. 비틀거린 로웬을 넘어트려, 몸을 압박한 채 목에 칼을 들이댔다.
릴리는 쥐새끼라고 말한 것을 사과하라며 보랏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고, 그 순간 로웬 사랑에 빠졌다. 그때 로웬은 뭐라고 했더라?
‘날 이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때 그 목소리, 분위기, 사랑에 빠진 로웬의…. 그 모습이 떠오르자 입안이 텁텁해졌다. 날 이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어쩜 그런 말이 다 있지? 날 이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라고?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오빠 참 독특하다 싶어서.”
뭐, 그래도 덕분에 릴리가 검술 쪽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았으니까.
“뭐가 독특하다는 건지…아, 맞다. 로젤리아, 너 지도 가지고 있어?”
“지도? 아직 남아있나. 그. 책장 두 번째 줄에 꽂혀있는 무역학 서적 살펴봐.”
근데 왜 갑자기 지도를?
“네 손님이 말했던 그 베논 제국 말이야.”
“!”
“릴리의 부탁으로 기억도 더듬어보고 찾아도 봤거든?”
“…뭔가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로웬은 대답 대신 무역학 서적에 끼워놓았던 지도를 꺼냈다. 그 중 상당한 크기의 대륙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더니 잉크로 레이몬드 제국이 있는 곳을 표시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도 차례차례 표시하더니 그 국가들을 선으로 잇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제국을 중심으로 보자면, 서쪽으로 베논 제국이 있어. 그리고 같은 서쪽이지만 베논 제국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안케도니아 제국이 있지. 즉 레이몬드, 베르토논, 안케도니아 순이야. 그리고 여기.”
로웬이 가리킨 곳은 베르토논 제국의 바로 위에 있는 헤레이스 왕국이었다.
“여기는…헤레이스 왕국이잖아.”
“헤레이스 왕국 근처에 뭐가 있는지 기억해?”
“헤레이스 왕국 주변에는…마력석 광산이 많지. 그래서 지형이 험난하기도 하고. 그래서 무역을 할 때 주로 베논 제국을 거쳐서….”
베르토논을 거쳐서? 나는 지도를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황후 시절에 황실에서 마력 연구소장에게 마력 연구에 대한 기획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기획서에 명시되어 있던 마력석 양은 상당히 많았고, 마력석의 사분의 일은 바르셀민 가문에서, 나머지는 헤레이스 왕국에서 수입해오고 싶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황후가 두 번 바뀌는 해 동안 마법사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던 터라 이번 마력 연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더불어 헤레이스 왕국과 더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냈는데, 왕국 근처의 지형이 너무 험난하여 베르토논 제국을 통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력석의 가격을 낮추는 대가로 군사력을 빌려주기로 했고, 그 덕분에 로웬은 몇 번씩이나 헤레이스 왕국으로 군사 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난 베논 제국에 간 적이 없어. 날 어디서 어떻게 봤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헤레이스 왕국으로 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본 거겠지.”
“확실해?”
“확실해, 베논 제국과 나름 친밀하게 교류하지만 동시에 군사적으로 경계하는 제국이야. 그들은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런 제국에게 쉽게 군사적 지원을 보낼 리가 없잖아.”
그래, 확실히 베논 제국과는 친교를 하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칼같이 경계를 했으니까.
아무리 우리 기사단이 강하다고 한들, 상대는 마법사를 보유한 제국. 100년에 걸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마법사가 저 제국에만 무려 10명 넘게 있었다.
‘다행이네….’
몰려오는 안도감에 천천히 지도를 내려놓았다.
“그 손님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야?”
“응?”
“아니, 네 표정이 심각했었어. 릴리도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 하고. …릴리의 부탁으로 한번 조사해보기는 했지만…뭐 하는 손님이길래 그렇게 심각하나 싶어서.”
“어, 그….”
“설마…진짜 두 번째 정부야?”
“어떻게 하면 생각이 그쪽으로 튀어?”
“의심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야.”
하긴, 로웬이 본 루치아노의 행동은 충분히 의심스러울 만 했다.
눈이 가늘어진 로웬을 보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가뜩이나 눈치도 빠르고 감도 좋은데, 그냥 말할까? 아니야. 말하지 말자. 무슨 난리가 날지 몰라. 사실 칼라일은 샤를로테의 약혼자였고, 루치아노는 안케도니아의 대사제였어, 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아까.”
“?”
“릴리가 푹신푹신한 핫케이크 먹고 싶다고 하던데. 이 근처에 생긴 디저트 가게에 파는 거.”
그 순간 방을 뛰쳐나가는 로웬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치아노에 대한 의심이 다 거둬진 게 아니었어. 그래도 어느 정도 경계를 푼 듯한 느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는 로웬이 자기를 짝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했다. 베논 제국, 안케도니아를 멸망시킨 바로 그 제국. 무슨 연유로 안케도니아를 멸망시킨 걸까, 안케도니아의 군사력이 그렇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혹시, 헬리오도르 가문을 노리고? 아니야, 헬리오도르 가문은 모습을 드러내는 걸 꺼려했다고 했잖아.
가넷 가문이 군사권까지 관여할 수 있었다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침대 쪽으로 다가가 몸을 눕혔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로젤리아님, 저 클로이입니다.”
“아, 들어오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뺨에 거즈를 맞댄 클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오드렝 남작에게 맞은 뺨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그래, 뺨은 이제 괜찮니?”
“약 발라서 괜찮아졌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이런 일 없게 하마.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니에요, 로젤리아님 잘못이 아닌 걸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이는 아기처럼 웃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이 기억났다는 듯이 ‘아!’하고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칼라일님이 돌아오셨던데. 주방장님께 다시 칼라일님 몫까지 준비하라고 말씀드릴까요?”
그 말에 하녀들에게 주려고 사둔 쿠키상자를 꺼내다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칼라일이 돌아왔다고?
루치아노는 아직 못 찾았다고 했는데?
“돌아왔어, 칼라일이?”
“네. 돌아오셨습니다.”
“언제 돌아왔어? 방금 전에 온 거니?”
“아, 아니에요. 한 시간 전쯤에 오셨어요.”
한 시간 전이면 로웬과 받은 편지를 정리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왔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오지 않은 거지?
나는 쿠키 상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클로이가 안절부절 하더니 갑자기 허리를 팍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외쳤다.
“역시 바로 알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루치아노님이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잠깐, 뭐라고? 클로이, 방금 뭐라고 했니?‘
루치아노가, 뭘 어쨌다고?
“그, 그게 정원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갔다가 칼라일님이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니까, 루치아노님이 직접 로젤리아님께 말씀드리겠다고,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그래서 저는 괜찮을 줄 알고……. 정말 죄송합니다, 로젤리아님.”
바들바들 떠는 클로이를 보며 애써 웃었다.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았다. 이 일에 클로이가 잘못한 건 없었으니까. 로젤리아는 클로이의 품에 새 쿠키상자 두어 개를 안겨주고는 방에서 내보냈다.
조용해진 방 한가운데,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전에 돌아왔다고? 로젤리아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한 시간 전에 왔으면서 내게 오지 않았다. 루치아노는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물론 이 점은 그렇게까지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루치아노는 클로이에게 칼라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직접, 말한다고.
그러나 루치아노는 불과 몇 시간 전, 나에게 ‘칼라일님이 돌아오는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칼라일이 돌아온 것을 안 건 한 시간이 지난 지금.
뭐지?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한 이유가 뭐지? 분명 내가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클로이가 다시 온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로젤리아님,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두드린 사람은 칼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