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철저하게 원망만 담긴
“로젤리아님, 다 왔어요.”
“…,”
“로젤리아님?”
“….”
“로젤리아님!”
칼라일 생각을 하느라 미처 릴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마차 창문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며 벌써 황궁에 도착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칼라일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업무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도회 사건으로 페르소나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그리고 알현을 하기 전, 황궁 기사단에 들르기 위해 일부러 두 시간 일찍 황궁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어쩐지 일부러 힘을 주고 꾸민 듯한 로웬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술 훈련을 할 때마다 귀찮다면서 꾸미기는커녕 얼굴에 뭐 하나 제대로 바르지 않던데 어쩐지 오늘은 머리도 쓸어 올리고 얼굴이 평소보다 깔끔했다.
마차에서 내리다 말고 인상을 찌푸린 채 로웬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리고 내가 내리자마자 로웬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릴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릴리 때문에 꾸민 거구나. 릴리는 로웬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고, 로웬은 그대로 얼굴과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졌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시벨이 로웬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며 ‘혹시…’라고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로 로웬과 릴리를 가리키며 조용히 허공에 하트 모양을 그렸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시벨은 헉, 하면서 입을 벌렸다.
“로웬 단장님께서 사랑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저는 사실 단장님이 검이랑 결혼한다고 선언하셔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생각이었거든요.”
나는 시벨의 말에 겨우 웃음을 참으며 기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 기사단에 들른 이유는 무도회 때 고생한 기사들을 위해 선물이라도 줄까 하는 마음이었다.
황궁에 귀속되었고, 황제에게 충성했다지만 나와 칼라일을 찾기 위해 그 새벽에 기사들을 동원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로웬에게 부탁하여 현재 기사들이 사용하는 물품 중 부족한 물품이 있는지 따로 알아보았다.
부족한 물품들을 따로 구입하고 훈련을 쉬는 시간에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한 식품과 디저트를 준비했다.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지원금을 더 많이 보낼 생각이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시벨의 안내를 따라 기사단으로 가는데 보고 싶지 않은 뒷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
“…대공. 그대가 왜 여기에 있지?”
국정 회의를 하고 있어야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나는 찌푸려지는 인상을 겨우 핀 채 시종들에게 물건을 나르도록 지시했다.
“무도회 때 저와 제 정부가 사라진 것 때문에 기사들이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번 기사들에게 소박하지만 필요한 물품과 식품들을 구입해 사비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가. 대공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군.”
기사들을 살피니, 황궁의 시종들이 나와 비슷한 물건들을 나르고 있었다. 하긴, 새벽에 기사들을 동원한 이유가 겨우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은 기사들의 충성심을 떨어트리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보통 그런 것은 시종들을 시키니까.
그때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검술 연습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지, 대련하는 소리가 어쩐지 익숙하게 들렸다. 아버지는 내가 황후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할 수 있다면, 검술 연습을 꾸준히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몰래 뒤뜰에서 로웬과 연습하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 종종 대련을 하기도 했지.”
“그때마다 폐하께서 지셨고요.”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대련 신청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대련 신청을 할 리가 없지. 전 황후와 황제의 검술 대련만큼 우스운 상황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페르소나는 망토를 벗고 구두를 벗어 옆에 두었다. 그러고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페르소나가 검을 들자 기사들은 나와 페르소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떤가 대공, 간만에 대련해보는 건?”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나?
황제가 직접 대련 신청을 한 것이니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알현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칼라일을 찾기 위해 사람을 더 고용한다거나 기사단에 보낼 지원금을 측정하고 싶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 대신 구두를 벗고 겉옷을 벗었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제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되겠나?”
“옷차림은 상관없습니다.”
나는 검술을 배울 때도 자주 썼던 레이피어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페르소나의 검에 의해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검을 너무 오래 놓고 있었나? 페르소나가 검술에 능통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업무를 하면서 검술을 계속 해왔나?
하지만 내 우려와 다르게 곧 나는 그와 비등하게 검을 맞댈 수 있었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전 남편과 검술 대련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실력이 녹슬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대련 도중에 말 걸지 말아주십시오, 페하.”
“그러면서도 대답하는군.”
나는 힘을 주어 그의 검을 쳐냈지만 쳐낼 때마다 더 강한 힘으로 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황태자 시절에도 너와 이렇게 검을 맞댔지.”
“….”
“즉위한 이후에도 종종 대련을 했지. 그때만큼은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모두 풀리는 듯했다.”
“그러셨습니까?”
나는 검을 꽉 쥐고는 일부러 그의 허리를 노렸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라고 해놓고서는 내가 돌아가지 않자 칼라일의 손목에 그런 끔찍한 물건을 채웠다, 그래놓고 정작 재판 때는 순순히 이혼을 해줬고. 게다가 샹들리에를 일부러 떨어트리지 않나….
나는 이를 갈며 더 세게 힘을 주었다.
“그러게 잘 좀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
“저도 그때는 행복했거든요.”
그 순간 페르소나의 눈이 커지더니 검을 쥐고 있는 손에 들어가는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그의 검을 쳐냈다. 대련은 내 승리로 끝이 났다.
이럴 때는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 져주는 게 맞는 거지만, 싫었다. 져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페르소나는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 표정에서 황태자비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게 잘 좀 해라, 나도 그때는 행복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철저하게 원망만 담긴 진심이었다.
***
릴리의 눈동자는 옅은 보랏빛이었다. 로웬은 햇살에 릴리의 눈동자가 닿을 때마다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로젤리아는 로웬이 릴리를 짝사랑하는 이유가 검술 대결에서 이겼기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릴리의 맑은 보랏빛 눈동자 때문이었다.
‘제가 이겼네요, 로웬님.’
햇살 아래, 검을 쥔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그걸 본 순간 로웬은 자신이 릴리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이번에 선물하려는 목걸이도 자수정으로 장식된 목걸이였다. 보석이 크면 부담스럽다고 받지 않겠지. 귀걸이는 불편하다고 착용하지 않을 거야. 반지는…너무 노골적이려나. 그렇게 세심한 고민 끝에 고르고 골라서 주문한 선물은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목걸이였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로웬은 릴리가 건넨 보드라운 손수건을 조심스레 받았다.
“이건…손수건 아닙니까?”
“늦었지만 무도회 파트너를 해주신 보답이에요.”
손수건에는 가넷 가문의 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도 무척 뛰어난 솜씨였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고급 실크에 인장을 그대로 그려 넣은 것 같았다. 애써 준비한 목걸이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마음에 듭니다, 릴리 양. 이렇게 아름다운 손수건은 처음 봅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뭘 드려야 할지 잘 몰라서….”
문득 릴리의 손에 있는 상처들이 보였다. 자수를 놓느라 다친 것인가? 로웬은 손을 뒤로 숨기는 릴리를 보며 목걸이가 담긴 케이스를 꽉 쥐었다. 분명 수수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특별 제작한 목걸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수가 놓인 손수건을 보자 어쩐지 목걸이가 초라해보였다.
‘고민하지 말고 좀 더 화려한 목걸이로 고를 걸….’
말없이 케이스를 뒤로 숨겼다. 좀 더 예쁘고 마음에 들 만한 것으로 골랐어야 했는데.
“뮈블랑 영애께 드리려고요?”
“네?”
“그거요. 악세사리 케이스 아닌가요?”
릴리는 로웬이 숨긴 케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순진한 얼굴에 로웬은 더욱 망설이기 시작했다. 보통 상대가 선물을 들고 있으면 ‘나한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가?’라고 생각하지 않나? 심지어 악세사리 케이스잖아. 뮈블랑 영애는 또 누구지?
“뮈블랑 영애라니요?”
“뮈블랑 영애와 좋은 관계로 발전 중이라는 말들이 돌던데, 아니었나요?”
심지어 이상한 헛소문을 사실이라 믿고 있었다. 뮈블랑 영애가 누군지? 그, 무도회 때 나한테 말을 걸던 그 여자인가?
“아닙니다.”
“네?”
“제가 선물해드리려는 사람은, 뮈블랑 영애가 아닙니다.”
로웬은 잠시 버벅거리다 손수건을 품 안에 넣고는 케이스를 열어 안에 든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자수정이 햇살에 반짝이자 릴리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연한 분홍빛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릴리 양께, 드리려고….”
목걸이를 바라보던 릴리의 눈이 커졌다.
“저에게 주시려고요?”
“…맘에 들지 않는다면, 굳이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싫을 리가요. 그냥 놀라서, 이렇게 예쁜 목걸이는 처음 봤어요.”
릴리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목에 이 목걸이가 걸린다면 얼마나 예쁠까. 몇 번이고 상상하면서 어떻게 줘야 할지,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줘야 할지 계속 고민했었다. 로웬은 릴리의 뒤에 섰다.
“제가 걸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부탁드릴게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걸어주었다. 살결이 손끝에 스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목걸이를 건 모습이, 얼마나 예쁠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생각에 잠긴 순간, 릴리가 뒤로 돌았다. 그러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살짝 스쳤다.
“어?”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웬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설마, 아니겠지. 입술이 닿은 것은, 아닐 거야….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릴리의 얼굴이 너무 붉었다.
“…나갈까요?”
“네, 네?”
“여기에 있지 말고, 어디든 갈까요?”
너무 당황한 탓에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렸다. ‘나갈까요?’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만한 좀 더 예쁘고 아름다운 말이 있을 텐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던 찰나, 릴리가 로웬의 손을 잡았다. 릴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
로웬은 그날 하루 동안 훈련을 빼먹고 릴리와 수도에 놀러갔다 왔다고 말했다. 기사단장이 그렇게 훈련을 막 빠져도 되냐고 물었지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릴리가 얼마나 귀여웠었는지 늘어놓았다. 업무에 방해가 되니 가줬으면 했지만 여전히 내 말은 묵살했다.
“그러고 보니 너, 폐하와 검술 대련을 했다며?”
“그건 또 어떻게 들은 거야.”
“이겼어?”
“이겼지.”
“아쉽네, 봤어야 하는데.”
보기는 무슨, 그만큼 또 우스운 상황이 어디 있다고.
황제가 검술 대련을 신청했으니 거절하기도 애매했고, 적어도 져줬어야 했는데 그의 말 때문에 욱해서 그만 페르소나를 이겨버렸다.
이기면 안 되는데. 이기면 정말로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전 황후였고, 페르소나는 황제니까. 나는 피도 눈물도 없다, 그간 있었던 부부의 정을 모두 잊었다, 라는 말을 들을 테고 페르소나는 황제의 체면이 구겨졌다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심란한데 오늘따라 글도 잘 안 읽혔다.
또 어떤 구설수에 오를지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다시 검을 잡아서 좋은데.”
로웬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내가 들고 있던 서류를 가져갔다. 의자를 끌고 와 맞은편에 앉으며 나대신 결제를 하기 시작했다.
“뭐가 좋은 건데?”
“너는 검을 좋아했잖아.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하니까 오빠로서는 좋지.”
내가 계속 한 서류만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 서류를 모두 자신의 쪽으로 끌어와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잘된 일이야.”
“?”
“예전에도 몇 번 한 생각이긴 한데…너는 황후의 자리가 안 어울려.”
“예전에는 내가 황후가 되었을 때 펑펑 울었잖아.”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야.”
“칼라일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칼라일. 애써 밀어두었던 불안한 감정이 다시금 나를 덮쳐왔다.
루치아노가 계속 찾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못 찾는다는 게 이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믿는 두 개의 감정이 자꾸만 충돌했다.
“칼라일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응. 황후의 자리가 내게 안 어울린다고 했어.”
“생각보다 정상적인 놈이었구나.”
“한번만 더 놈이라는 호칭을 붙이면 릴리한테 오빠가 저지른 만행들을 다 말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때 바쁘게 움직이던 로웬의 손이 멈췄다.
“그래, 맞아. 그 정부 말인데. 칼라일. 릴리에게 들어보니까 타국의 마법사라던데.”
그는 창문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들고 있던 펜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가…보통 날아다니나?”
창문 쪽에 검은 인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