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노골적인 감정.
“루치아노.”
“….”
“루치아노. 아파요.”
“…죄송합니다.”
적나라한 눈빛이다. 칼라일이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와 똑같은 그런 시선이야. 당혹스러운 심정에 그가 손을 놔주자마자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이 힘없게 떨어져 나갔다.
어떤 눈으로 마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잘못 본 걸까, 아니야, 분명 그 눈은….
싫다던가, 갑자기 거리감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루치아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순간 돌변한 그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단지 내 착각인 건가?
“로젤리아님.”
“!”
“머리, 마저 말려줄 수 있나요?”
다시 한 번 맞닿은 시선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지? 노골적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럼요.”
천천히 숨을 다잡으며 손 위에 다시 바람을 모았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루치아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루치아노가 의자를 끌어다 앉자, 그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내가 느꼈던 당혹함은 뭐지? 자신의 손에 스치는 은빛 머리카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듯이, 루치아노는 아까처럼 좋아한다는…눈빛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붉은색의 뺨, 눈빛, 손짓이나 태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모두,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루치아노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 번 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로젤리아님은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어요.
“재능이 있을 리가요. 치유 마법을 쓰다가 피를 토한 사람인걸요.”
“없다고 생각하세요? 어째서요? 로젤리아님은 마력 컨트롤을 못하는 것뿐이에요. 배우지 않아 생긴 일이고요.”
루치아노는 작게 웃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잘못 본 거구나, 그런 거야. 아니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내뱉을 수 없겠지.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한순간 이번 일로 인해 루치아노와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걱정했다. 하지만 루치아노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할 필요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말랐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천천히 해주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칼라일님이 돌아오시면 그때는 기초마법부터 다시 배우도록 해요. 마력을 추적하는 마법은 원래 상급 마법이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머리카락을 말렸다. 물기가 전부 사라지자 손 위에 떠돌던 바람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아직 손안에 바람이 머물고 있는 듯한 감각이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정말 배워도 괜찮을까…왜 자꾸 망설여지는 기분이지, 나는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을 텐데.
가슴 한쪽에 머물러 있는 뭔가가 작은 가시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준 마력석으로 내 몸에 마력이 생성되었다면 마법을 배워두어도 괜찮겠지. 마법을 배웠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근데 왜 계속 마법을 배우라고 하는 거지? 내가 먼저 제안한 거긴 한데…뭔가, 이상한데.’
그때 루치아노가 손을 살짝 오므렸다가 펼쳤다. 흑요석처럼 몽환적이고 검은 푸른빛이 도는 마력석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어쩐지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에 로젤리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마력석이 녹아내렸다.
“마력 광산에서 채굴되는 마력석과 마법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마력석의 어떤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루치아노가 준 마력석은 차갑기만 한데.”
“제 마력이 로젤리아님의 몸속에 돌기 시작해서 그래요.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마력석은 보유하고 있는 마력이 무척 적을뿐더러 흡수되는 양 또한 적고, 시간도 느리죠.”
문득 세피노 플로트를 떠올렸다. 그도 마력석을 꾸준히 복용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했었지.
“인위적인 마력석은 마력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곧바로 옮겨줄 수도 있고, 준만큼 빼앗아 올 수도 있어요.”
“지금 내게 흡수되고 있는 마력량은 얼마나 되죠?”
“…….”
“제대로 말하지 않겠다면 그 치유 마법을 다시 쓰겠어요.”
“치유 마법을 써도 부담 없는 양의 마력을 넣었습니다.”
“정말로?”
“…조금 더 많이.”
“조금?”
“그냥 받아주세요.”
“칼라일과 똑같은 말을 하네요.”
치유마법은 마력이 많이 요구되는 마법이라고 그랬다. 그럼 마력을 얼마나 많이 준 거지?
“도로 가져가요. 난 그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받으세요, 제 마력만 넣은 것은 아니에요. 방금 그 마력석은 제 마력과 칼라일님의 마력석을 융합시킨 거니까요.”
“그럼 더더욱 필요 없어요. 왜 둘 다 이렇게까지 저에게 많은 마력을 못 줘서 안달인 거죠?”
“걱정되니까요.”
‘걱정’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피를 토한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치유마법을 써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마력을 내게 준다고? 그건 아니었다.
나는 루치아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가져가라는 의미였다.
“나는 약하지 않아요.”
“약해 보인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걱정 받을 정도로 미약하지 않아요.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나는 강합니다. 그대들의 마력석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에 루치아노는 강하게 내 손을 잡았다.
“로젤리아님은 분명 눈앞에 쓰러진 사람이 있다면 치유마법을 쓰겠죠. 마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칼라일님이라면, 릴리 양이라면 더더욱 그러겠죠. 그럼 그때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나요? 저희는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이러는 것입니다. 로젤리아님이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지킬 수 있는 그런 마법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에 칼라일이 쓰러져있다? 릴리가, 루치아노가, 로웬이, 아버지가?
“저도, 칼라일님도, 로젤리아님을 지켜주고 싶어 하지만, 분명 그대는 거부하겠죠. 압니다, 로젤리아님이 강한 사람이란 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루치아노의 말대로 분명 치유 마법을 쓰겠지, 마력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사용할 게 뻔했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겠지.
“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로젤리아님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 왜 저만 걱정 어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
“로젤리아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강하지는 않아요. 로젤리아님을 잃는 순간, 무너져버릴지 모를,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 말에 릴리가 펑펑 울며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게 떠올랐다. 로웬은 화를 내면서도 눈동자는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칼라일은 어땠지? 나를 잃는 게 무섭다고 말했고 이내 사라버렸다.
루치아노도 지금 그런 기분인 걸까. 그래서 이렇게, 핏기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까.
“지금 와서 말하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저는 너무도 그대를 걱정했습니다.”
“……!”
“심장이 뜯겨져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젤리아님.”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 같은 충격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루치아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칼라일과 똑같은 눈동자였다. 릴리와 로웬의 눈동자도 닮았다. 슬픔에 잠기고, 짙고 어두웠다.
다쳐도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면, 그 힘이면 다른 사람들을 지키는 강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도움도 가능하면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 했었다. 분명 그랬는데.
-로젤리아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강하지는 않아요.
내가 칼을 맞아가며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도, 그들은 내게 꽂힌 칼을 보며 울지 모른다. 그건 지켜준 게 아니다. 도리어 괴롭게 만드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칼라일과 루치아노 모두 마법을 배우라며 내게 마력석을 건넨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들의 걱정을 너무 안일하게 보았나.
“그러니 이 마력을 받아주세요.”
“…네, 다만 더 이상의 마력은 받지 않을 거예요. 그대들의 마력을 받아가면서까지 마법사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 이 마력만으로 충분해요.”
혈관 속에 얼음 조각이 떠도는 것 같은 차가운 마력을 느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마력만으로도 충분했다.
***
로젤리아가 마력을 받겠다고 말한 순간 루치아노는 안도했다.
이 마력조차 받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해야 할지, 드러내지 않을 뿐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다. 루치아노는 서글픈 심정을 일부러 감춘 채 속으로 로젤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치아노는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심장이 뜯겨나가다 못해 바닥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가 칼라일과 함께 사라졌다는 말,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태였다는 말. 짐승 같은 울음이 속 안에서 끓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야는 마구 흔들리는데 몸은 이미 로젤리아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칼라일도 중요했지만 로젤리아도 중요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속이 곪아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칼라일의 마력을 추적해왔을 때, 멀쩡한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울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내뱉는 입술은 이미 뜯어지고 뜯어져 피가 맺혀있었다.
로젤리아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루치아노?”
“다치지 마세요. 함부로 마법 쓰지 말고. 옆에 저나 칼라일님이 있지 않는 한 마력이 많이 소모되는 마법은 금지입니다.”
“그런 마법을 쓸 수나 있을까요?”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로젤리아가 지하실을 나간 뒤에도 여전히 붉은빛이 눈 안에 머물러 있었다.
비틀거리며 침대 위로 가 몸을 눕혔다. 항상 씻고 나오면 머리를 말리지 않고 누운 탓에 베게도, 시트도 다 젖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로젤리아의 부드러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감정을 내보인 순간 당황하던 로젤리아의 표정도.
곧바로 숨기길 잘했다. 기껏 가깝게 만들어놓은 거리가 한순간에 멀어질 뻔했어.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칼라일은 감정이 모두 표정에 드러나는 편이었다. 분명 좋아하는 감정도 한 번쯤은 드러났겠지. 로젤리아가 봤을까? 아니지, 이미 봤을지도 몰라, 그럼 당혹스러워 했을까? 아니면 기뻐했나?
루치아노는 몸을 살짝 웅크린 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목소리가 지하실 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