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옆에 있어주세요.
칼라일이 눈앞에서 사라진 지 사흘이나 지났다.
다 내 탓이었다. 칼라일의 기억을 봤음에도,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아.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해버렸다.
칼라일이 사라진 이후 루치아노는 칼라일의 마력을 추적했지만,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사람을 시켜 조용히 칼라일을 찾도록 지시했지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릴리의 저택으로 간 것일까? 거기에 안 갔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여전히 겁을 먹고 있으면 어떡해, 그때의 기억에 떨고 있으면….
기억 속에서 보았던 텅 빈 눈동자가 무서웠다.
“슬슬 루치아노에게 가야하는데….”
칼라일이 사라진 이후, 루치아노에게 마력을 추적하는 법을 배워 칼라일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칼라일이 사라진 이후, 그를 찾으면서도 루치아노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발을 바삐 움직여 칼라일을 치료하던 그 지하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지하실이 꽤나 춥게 느껴졌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추운 걸까. 지하실 벽에 손을 댔다. 서늘한 기운이 손안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머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귀가 울리고, 다리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시야가 어지러워 일단 지하실에 놓인 작은 침대 위에 앉았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자주 아픈 것일까. 시녀장이 걱정할 만도 했다. 이제 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데 조금 쉬라고 하던 말, 말 좀 들을 걸 그랬다.
조용한 지하실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칼라일이 쓰러졌을 때 잠시 보던 것 빼고는 와본 적이 없으니까. 책장에 가까이 가자 낡은 책이 가득 보였다. 봐도 되는 책인지, 한참을 고민하는데 바닥으로 책 한 권이 툭, 떨어졌다.
얇고 먼지가 많은 책 한 권. 주워서 제자리에 꽂아두려는데 펼쳐진 페이지에 쓰여 있는 알 수 없는 글자가 눈으로 들어왔다. 구불거리는 글자를 손으로 쓸었다. 마법 주문인가? 글자가 빽빽했다.
“로젤리아님?”
“아, 루치아노. 기다리고…있었는데….”
그때 벽이 문이 열리듯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루치아노가 나왔다. 새하얀 은발의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은 채,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셔츠를, 왜 안 입고 있지……?
“왜, 왜, 왜 여기 계세요?”
루치아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로젤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법을 배울 시간이 다 되어서 왔다고. 루치아노는 옷을 찾아 입으려는 듯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애꿎은 책만 더 꽉 움켜쥐었다.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 입었어요, 로젤리아님. 고개를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 함부로 들어와서 미안해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셔츠에 로브까지 뒤집어 쓴 루치아노가 보였다. 로브 벗어도 되는데, 심지어 모습마저 바꿔버렸다. 셔츠도 안 입고 나왔던 게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심하게 부끄러워하는 루치아노를 보며 살짝 웃음소리를 뱉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루치아노가 얼굴을 더 붉혔다. 까맣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물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머리도 안 말리고 입은 거야? 나는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둘이 있을 때는 원래의 모습으로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 말 한마디에 루치아노의 모습은 은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로 되 돌아왔다.
“방금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아 그 사이에 씻으려고….”
“그랬군요. 고생 많았어요.”
물기를 꾹꾹 눌러 닦아내자 루치아노는 말갛게 웃었다. 그때 선반 위에 있던 책 더미가 와르르, 쓰러졌다. 책 사이로 먼지가 풍겼다. 루치아노는 기침을 해대며 책 더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쏟아진 책들과 로젤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은 흡사했다.
“전부 그대의 책인가요?”
이것도 떨어졌었어요, 라며 들고 있던 책을 건네자 루치아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제가 성인이 되기 전 마법을 연습하면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대부분 실패했지만. 성공한 마법은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도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은 잘하고 있잖아요.”
책들을 주워주며 먼지를 털어냈다. 크기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었다. 그때 책 사이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빛이 나오는 새어나오는 페이지를 펼쳤다, 정체 모를 빛은 말라붙은 잉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페이지에는 작은 수정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위에 손을 대자 수정이 순식간에 내 손을 타고 손등을 완전히 뒤덮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는 순간 루치아노가 재빨리 책을 멀리 치워버렸다.
“저 마법이 또! 로젤리아님, 괜찮으세요?”
“나, 나는 괜찮아요. 아프기는 했지만, 그런데 이건…?”
“봉인 마법입니다. 아직 익히지 못한 마법이죠, 자칫 잘못하면 지금처럼 존재자체가 봉인될 수도 있죠.”
“이 수정을 이용하여 봉인을 하는 것인가요?”
루치아노는 내 팔에 달라붙은 수정을 조심히 떼 주었다. 영롱한 빛을 띠던 수정은 떼어낼 때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봉인하고자 하는 목적물이 수정안에 담기는 형식이에요. 이 마법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달라요. 저는 수정이지만 칼라일님은 안개죠.”
“안개?”
“봉인의 대상은 다양합니다, 살아있는 자, 죽은 자, 사람이 아닌 물건도 가능하고, 심지어 기억조차……봉인할 수 있어요.”
루치아노는 떼어낸 수정을 손에 모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수정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루치아노는 수정, 칼라일은 안개.
그럼 릴리의 저택에서 보았던 그 안개가 봉인 마법이라는 것인가? 칼라일의 기억을 봉인한 것인가?
그럼 그게 기억이 맞았구나….
“아, 그러고 보니 칼라일은요? 만났나요?”
칼라일의 행방을 묻자 루치아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 표정은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짓는 표정이었다. 칼라일을 못 찾은 건가. 마력 추적으로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흔적은 찾았는데 그게 멀리 퍼져있어서….”
“…그래요? 그래도 흔적을 찾았다니 다행이네요.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피곤했죠?”
또 심장이 욱신거린다.
나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피곤함이 잔뜩 묻어난 루치아노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오늘 따로 피곤하기는 하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갈까요? 피곤한 사람은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죠.”
그 순간 루치아노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나중에 가는 게 좋겠다고, 그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아요, 가지 마세요.”
놀랐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루치아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루치아노, 손이 떨리고 있는데. 괜찮나요?”
“아니요, 안 괜찮아요. 저 너무 힘들었습니다. 마력 계속 써서 칼라일님을 찾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 루치아노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 어깨에 그의 머리를 기댔다.
심장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마치 칼라일이 나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어깨 위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많이 힘들었나요?”
“…많이 힘들었어요. 계속 마력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봐요, 미안해요, 루치아노.”
“로젤리아님도 도와주셨잖아요.”
“그래도 가장 힘낸 사람은 루치아노잖아요.”
그때 루치아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럼, 제 옆에 있어주시면 안되나요?”
“?”
“오, 오늘은 마법 배우지 말고, 그냥 제 옆에 있어주셨으면 해요.”
“그래요, 그럴게요. 옆에 있어줄 게요.”
칼라일의 상태가 괜찮다 했으니 지금은 일단 하루 종일 뛰어다닌 루치아노부터 달래줄 생각이었다. 수고했다며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주자 물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안 말리면 추울 텐데, 라며 살며시 밀어내자 루치아노는 칭얼거리듯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머리라도 말려요.”
“마법 쓰기 싫어요, 로젤리아님이 직접 해주시겠어요?”
“그래요, 내가 말려줄게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바람 마법은 이런 형태의 마법진을 주로 사용하니까.”
“마법을 쓸 때마다 필요한 마법진이 다 다르군요.”
“마법의 기초는 마법진을 외우는 것부터죠, 마법진이 필요 없는 마법도 있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마법진은 더 복잡해져요. 그중 다른 마법진과 조합을 하는 경우도 있죠. 바람 마법은 쉬운 편이에요.”
루치아노가 그려준 마법진을 그대로 머릿속으로 그렸다. 바로 따라 그리는 건 어려웠지만 일부분씩 떠올리자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서늘한 느낌에 손을 들어보니 손 위로 바람이 불었다. 살짝 손을 움직이자 구름 같은 형체들이 모여들었다. 이게 바람 마법인가, 내가 손을 움직이자 따라 움직였다.
루치아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자 머리카락 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물기가 점점 말라갔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스쳤다. 부드러운 감촉이 꽤 좋았다.
“로젤리아님, 뺨에 물기가….”
루치아노의 말에 뺨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툭, 하고 손이 닿았다.
그 순간 루치아노는 크게 어깨를 떨었다. 내 손이 루치아노의 뺨을 감싸 쥔 것처럼 되어버렸다. 루치아노는 물이 묻었다는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채 말끝을 흐리며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나는 루치아노의 눈동자를 보고는 숨을 참았다. 크게 일렁이는 저 금색빛 눈동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손안에 머물던 바람이 사라졌다. 칼라일의 눈과 무척 비슷했다.
그가 저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그 시선에는 분명 적나라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때. 말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며 손에 뺨을 비비던, 그때 그 시선….
당황한 나머지 손을 빼려고 했지만 루치아노의 말이 더 빨랐다.
“옆에 있어주기로 했잖아요.”
“….”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주세요, 로젤리아님.”
간신히 내뱉은 것 같은 그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