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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42화 (42/170)

#42화, 무서워졌다.

칼라일과 루치아노는 이른 아침부터 카렐리아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며 외출했다. 그래서 일단 누구라도 끌어안고 싶은데 마땅히 끌어안을 사람이 없었다.

로웬은 황궁으로 갔고, 릴리는 귀족들 상대하느라 늦게 올 테고. 업무라도 볼까 했지만 서류를 들여다보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글자가 울렁이다 못해 내 속도 함께 울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서류를 밀어두고는 침대에 누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자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지만 두통 때문인지 나빠진 기분 때문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꽃향기라도 맡으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지만 꽃이 모두 진 상태였다. 마법으로 만든 꽃은 수명이 짧다는데, 정말이었구나. 꽃 하나 없이 시든 풀만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몸을 웅크린 채 땅바닥에 손을 대었다.

‘칼라일이 가르쳐준 마법이….’

칼라일이 알려준 마법진을 떠올리자 땅 위로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성공했나? 땅에서 손을 떼는데 그 순간 꽃이 폭발하듯 펑, 하고 피어났다. 나는 마법진 위로 손쓸 틈 없이 퍼져나가는 꽃들을 보며 빠르게 마법진을 지웠다.

마법이란 게 이렇게 빨리 발동되는 거야? 넝쿨이 생기고, 나무에 녹음이 지고 꽃이 피었다. 꽃이 마치 파도처럼 바람에 의해 흔들렸다. 마법진을 다 지웠는데도 마법의 기운은 멈추지 않았다. 손을 쓸 틈도 없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당황해 하는 사이, 커다랗고 새하얀 손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

“역시 그대는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네요.”

그리고 그 순간 마법이 멈췄다. 이미 새하얗고 붉은 꽃들이 정원을 뒤덮고 저택의 벽을 반쯤 타고 올라갔지만 멈췄다는 것에 안도부터 하기로 했다.

나는 뒤에서 끌어안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은 칼라일의 팔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칼라일이 아니었다면 저택의 밖뿐만 아니라 안까지 꽃으로 가득 찼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입고 나간 로브가 깨끗했다. 전에 본 로브는 피에 젖어서 붉은색이었는데 이번에는 먼지 붙은 곳 하나 없이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다친 곳 없나 확인하기 위하여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칼라일이 내 손을 감싸 자신의 뺨 위에 올려두었다.

“어서와, 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어서 와요, 칼라일.”

“다녀왔어요. 로젤리아님.”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그런가,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나는 칼라일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동생의 흔적은 찾았을까? 찾았다면 바로 얘기해줬겠지. 이렇게 힘이 없는 것을 보면….

“…조금 힘드네요.”

“!”

“마력의 흔적은 발견했는데…아무리 찾아봐도….”

역시 못 찾았구나. 나는 말없이 천천히 뒤돌아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기억 속에서 본 동생은 무척 어렸지. 그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생각하면 나조차도 힘든데 칼라일은 얼마나 찢어지는 심정일지.

그의 눈동자가 탁했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거의 우는 상태였다.

“찾아야죠.”

“….”

“찾을 겁니다. 벌써부터 포기하면 안 돼요.”

하지만 이럴수록 곁에 있는 사람이 도와줘야 했다. 나는 칼라일의 뺨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칼라일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이내 밝은 금빛으로 돌아왔다.

“네, 포기하지 않을게요. 그러고 보니 저택으로 들어가려는데 사람이 가득 하던데.”

“아직도 안 갔어요?”

“네?”

“무역 상단 때문에 온 거예요. 물론 그건 명분이고 대부분 나를 깎아내려 찾아온 거지만.”

기껏 좋았던 기분이 그 사람들로 인해 다시 상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정이 안 가는 사람들이었다.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왜 굳이 찾아와 못 괴롭혀 안달일까.

“아, 그럼 저 잘한 거예요?”

칼라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근데, 응? 잘해? 뭐를?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저택 쪽에서 흐릿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 기울여 들으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 사이로 ‘그렇지!’ ‘아주 그냥 매달아서 흔들어!’라고 소리치는 시종들의 환호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릴리 양에게 다른 분들이 소리 지르고 있어서, 그러지 말라 일렀는데, 뺨을 치려고 하길래….”

“하길래?”

“거꾸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누구를요?”

“귀족들 전부 다.”

***

칼라일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가 가르쳐 준대로 마법을 해제시키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저택을 뒤덮은 꽃들을 사라지게 만든 후에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팔에 기단 채 정원을 빠져나왔다. 몸이 무거워졌다. 칼라일은 잠시 내 뺨에 손을 갖다 대더니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가 선반에서 가져온 것은 가넷과 비슷하게 생긴 보석이었다.

“나에게 주는 건가요?”

“제 마력석입니다. 마력을 거의 다 쓴 것 같아서요.”

“마력을 다 쓰면 원래 이렇게 피곤한가요?”

“그런 것도 있고, 아마 갑자기 마력을 많이 쓴 탓에 그런 것 같아요.”

보석처럼 반짝이는 마력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목의 멍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심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그대처럼 마법사가 아니니, 마력은 필요 없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마법을 걸어두었습니다. 목걸이로 만들어줄 테니, 목에 걸어주세요”

마력석을 목에 걸고 있으라고?

나는 마법사가 아니고, 마법을 쓸 일이 그리 자주 있는 게 아닐 텐데.

쓸 수 있는 마법도 거의 없을 텐데 왜 지니고 있으라는 것일까.

“혹시 샤를로테 때문에 그런 건가요?”

돌에 구멍을 뚫어 은색 줄과 연결하던 칼라일의 손이 잠시 멈췄다.

“마력석에 방어 마법을 걸어두었습니다. 마력도 충분히 넣어두었고요.”

“샤를로테 때문이군요.”

“마력을 쓰면 곧바로 저에게 신호가 올 겁니다. 그러니….”

샤를로테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칼라일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샤를로테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칼라일은 칼에 찔린 곳을 압박하듯 눌렀다. 그때의 기억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 결코 좋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목걸이를 걸어주려는 칼라일의 팔을 막았다.

“칼라일. 정말 이럴 필요가 없어요. 샤를로테가 마법을 걸었지만 나는 멀쩡해요. 알잖아요.”

“괜찮지 않아요. 제가 치료해서 멀쩡한 거예요. 절대 멀쩡하지 않았어요.”

“칼라일.”

“로젤리아님.”

“난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요.”

내 완곡한 거부에, 칼라일은 목걸이를 으스러뜨릴 듯이 꽉 쥐었다.

붉은 마력석, 목걸이. 방어 마법. 이해할 수 있다. 칼라일의 과거를 본 이상 샤를로테와 관련된 일이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샤를로테의 마법에 당할 뻔한 장면과, 이와 별개로 치유 마법으로 인해 죽을 뻔했던 기억을 봐버렸으니 그런 거겠지.

“로젤리아님이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법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칼라일은 손에 있는 목걸이를 가볍게 쥐었다. 힘을 줄 때마다 목걸이가 조금씩 반짝였다.

“샤를로테가 마법을 썼습니다. 또 안 쓸 보장이 있습니까?”

“샤를로테의 마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그다음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마법에 걸려들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마력석을 받지 않기 위해 거절하려는데, 그 순간 칼라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샤를로테가 마법을 썼다고요?”

눈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누가 뒤에서 내 눈을 가렸다. 손을 살짝 치우자 로브를 벗고 있는 루치아노가 보였다.

루치아노는 곧장 칼라일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몇 번 문질렀다. 수갑은 벗겨졌지만.

“수갑을 벗겼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인 겁니다. 오늘 마법을 사용하고, 저번에 무도회에서 사람 두 명을 치료한 것치고는 많이 좋아진 상태에요.”

많이 좋아진 상태? 흉흉한 마력은 계속 흘러나오고 전체적으로 마력이 짙어졌는데, 저게 정말 괜찮은 상태일까. 아무리 루치아노가 괜찮다고 해도 내 눈에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치료한 분은 로젤리아님 뿐이야. 날 치료한 분도 로젤리아님이고.”

“그럼 로젤리아님이 치유 마법을 사용하셨다는 건가요?”

루치아노는 그게 가능하냐는 듯 되물었다.

“동물이면 몰라도 사람에게 하는 치유 마법은 기존 사제들도 오랜 기간 수행해야 사용할 수 있어요.”

“알고 있어, 나도 그게 신기해. 아까 정원을 뒤덮을 정도로 광범위한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하셨어.”

칼라일과 루치아노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거의 기적적으로 된 마법이라고. 그러자 루치아노는 내 손을 칼라일의 손목 위로 포개듯 올려놓았다.

내 손이 수갑에 닿자 칼라일이 몸을 크게 떨었다. 역시 아프구나. 루치아노는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치유 마법, 다시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게 무슨, 로젤리아님, 저와 약속하신 거 기억하시죠? 다시는 치유 마법 쓰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했잖아요.”

루치아노가 반박하듯 다시 말했다.

“수갑은 풀었지만 마력을 제어하는 마법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이 끔찍한 마력의 흔적을 어서 없애야 해요. 시도는 해봐야죠. 언제까지 이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잖아요.”

루치아노의 말에 나는 칼라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 손이 닿자 손목에 남은 기분 나쁘고 차가운 마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은 칼라일의 손목을 뱀처럼 뒤덮고 있었다.

루치아노의 말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만약 지금 치유 마법에 다시 한 번 성공한다면, 이 기분 나쁘고 차가운 마력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루치아노가 있으니까, 내가 쓰러져도 곧바로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로젤리아님!”

칼라일이 간절하게 외쳤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손끝에서는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

그때 눈앞으로 작은 나비 하나가 날아갔다. 무도회에서 칼라일을 치료했을 때 본 그 나비였다.

빛나던 나비는 한 마리에서, 두 마리로. 두 마리에서 세 마리로. 세 마리에서 더 많은 나비로 분열하고 또 분열했다. 그 나비는 칼라일의 손목 위로 내려앉았다. 나비의 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칼라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멍이 조금씩 사라지는 게 보였다. 마력의 색이 옅어졌다. 그때 칼라일이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밀쳐냈다. 정확히는 더 이상 내 힘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는 듯 나를 멀리 떼어냈다.

그 순간 검에 베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덮쳐왔다. 너무 아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냈다.

바늘을 삼키기라도 한 듯, 목이 너무 아팠다. 나는 손으로 목을 꾹 눌렀다. 무도회 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아팠다. 루치아노는 내 목 부근에 손을 대었다. 목 안쪽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뜨겁고 격한 고통이 단번에 잠잠해졌다.

“성공은 했지만 그에 따른 타격이 심하네요.”

루치아노의 말이 귓가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겨우 섰다. 입가에 흐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무도회장에서 느꼈던 역한 느낌과 통증이 뒤통수를 세게 때린 듯 얼얼하게 울렸다. 다시금 생기 되는 고통에 온몸이 저릿해졌다.

“…나았다.”

내게 손수건을 건네던 루치아노가 황급히 칼라일의 손목을 잡았다.

“나았어요. 조금이지만, 나았어요. 로젤리아님의 치유 마법이 통한 거예요.”

손목을 뒤덮던 마력의 크기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흘러나오는 마력의 색도 옅어졌다. 여전히 색이 진하기는 하지만 마력 제어 수갑에 잘 모르는 나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심지어 그의 손목에 있는 멍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루치아노의 말대로 마법이 통한 것이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검에 베이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괜찮았다. 칼라일의 손목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내게 가장 중요했다. 가끔 칼라일에게 수갑이 채워지던 그 순간이 악몽처럼 눈에 아른거릴 때가 있었다. 애초에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것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내가 이혼을 무르지 않고 계속 완곡하게 나서니까, 그가 나를 다시 황후의 자리에 앉게 하기 위해 주변 인물을 위협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죄책감에 종종 사로잡혔다. 게다가 무도회 날 샹들리에가 떨어진 사건. 마법을 썼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이 너무 심했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 고통은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루치아노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마력 컨트롤이 미약해요. 마력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서 마력을 마구 낭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몸의 순환이 급격하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루치아노의 말은 칼라일의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칼라일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겁에 질린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의 팔을 잡았지만 도리어 세게 뿌리쳤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왜 치유 마법을 쓴 거예요?”

칼라일은 내가 목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나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손목을 뒤덮고 있던 마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고 했잖아. 그는 계속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도 그렇게 피를 쏟아서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루치아노가 옆에 있었다. 그건 칼라일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칼라일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약속했잖아요. 치유 마법 다시는 쓰지 않기로, 왜,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거예요?”

무도회의 충격이 컸나? 그때의 상황이 너무 충격적으로 와 닿아서?

순간 시선이 칼라일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거울에 닿았다.

그 순간 피를 흘린 채 목을 부여잡고 있는 나와, 칼라일의 어머니가 목에 검이 꽂힌 채 비틀거리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숨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어머니가 목을 꾹 누르다 그대로 쓰러지던 모습이 나와 많이 비슷했다. 목을 타고 흐르는 피. 끔찍할 정도로 괴로운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게….

‘아, 설마.’

안개 속에서 보았던 눈앞으로 장면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칼라일의 눈에 나와 그때 그 기억이 겹쳐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무도회 이후, 무서워졌어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모님처럼, 카렐리아처럼 그대를 잃게 될 것 같아 무서워요….”

내 앞에 서 있는 칼라일은 암살자들에게 부모님을 잃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칼라일이 그렇게 겁에 질린 건 처음 봤다. 아니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건 본적이 없었다.

“칼라일.”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흠칫 떨며 나를 공포로 가득 찬 눈으로 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내가 미안해요, 약속 안 지켜서….”

그러나 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내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으려던 순간. 칼라일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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