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곱게 돌려보내지 않아.
“네 년이 상단주라고? 마가렛트 가의 여식이?”
마가렛트 가는 상단으로 성공하고 상단으로 몰락 위기까지 무너진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 사람에게 무역 상단주 자리를 주었다고?
“잠깐, 마가렛트 가?”
“그 몰락 귀족 가문 말하는 거야?”
“마가렛트가의 사람에게 상단주 자리를 주었다고?”
그 놈의 마가렛트, 마가렛트. 지겨웠다. 이래서 상단주 자리를 맡고 싶지 않았는데.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도 있기는 했지만.
“그럼 로젤리아님께서 여기 계시는 분들 중 한 명에게 상단주 자리를 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불법으로 수입의 35%를 채우는 사람들에게?”
릴리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검을 빼들었다. 그럼 상단주 자리를 자기네들한테 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무슨 생각으로? 뻔뻔한 것도 정도껏이지.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시죠. 그리고 오드렝 남작님, 손목을 앞으로 모아주시겠습니까? 제가 깔끔하게 잘라드리겠습니다.”
“뭐, 뭐? 내가 손목이 왜, 왜 잘려? 나는 때리지 않았어! 거기 하녀! 내가 너 때렸어? 말해봐, 어서!”
안색이 새파래진 채 하녀에게 달려드는 남작의 목덜미를 꽉 움켜쥔 채 바닥에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작은 바닥을 굴렀다.
“어디서 큰 소리를 내십니까?”
“이, 어디 몰락 귀족 출신 주제에?”
“내세울 게 출신밖에 없으신 가 봅니다. 때리지 않았다고요?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하신 거죠?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릴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크게 외쳤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 저택 안이 울릴 정도였다. 그 목소리에는 시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뭐가 되었든 곱게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어투였다.
“지금부터 삼일 이내, 가넷 저택의 소중한 하녀의 뺨을 때린 사람이 직접 오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에게 편지 한 통씩 도착할 것입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겠지요. 때린 사람이 가장 잘못한 것은 맞지만, 말리지 않고 지켜본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편지 한 통, 그 말에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드렝 남작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어디 시녀 따위가 나서느냐,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하녀의 뺨을 때린 오드렝 남작은 이제 손목이 잘릴지 모를 상황에 이르렀다.
게다가 릴리 마가렛트, 이 시녀는 로젤리아가 그렇게 아낀다는 그 시녀였다.
그 순간 릴리는 들고 있던 검을 세게 바닥에 내리꽂았다.
바닥에 쩌적, 하고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단단한 바닥에 검이 박혔다.
옅은 햇살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석 같은 보라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이 그녀의 어머니와 매우 똑같이 보인다는 것은 릴리는 모르고 있었다.
릴리 마가렛트.
대상단을 이끌던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막내딸. 마가렛트는 제국 내 3대 대상단이라고 불리며 레이몬드 제국 곳곳에 세력을 넓힌 가문이었다.
그 때문에 마가렛트 가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가문들조차 마가렛트 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전대 마가렛트 백작이 독살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 그랬다.
과거 3대 상단을 이끌던 가문, 테일러. 비앙피에, 마가렛트 이 세 가문이 모인 자리에서 마가렛트 백작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독에 중독되었다. 심지어 독이 든 병이 마가렛트 가의 마차에서 나왔다.
즉, 마가렛트 가문과 상단을 무너트리기 위한 두 가문의 모략이었다. 서로 말을 맞춘 상태고, 죽지 않을 정도의 독을 미리 준비해 삼키도록 했다. 넓어지는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는데, 테일러 가문이 홀로 두 상단 세력을 삼키기 위해 비앙피에 가문의 음식에만 극독을 넣었다. 비앙피에 후작은 사망한다.
이후 마가렛트 백작부부는 귀족 독살 죄로 잡혀가고 그의 사용인까지 사형에 처한다. 그 당시 사용인들마저 사형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테일러 가문이 뒤에서 손을 쓰면서 부부의 두 자녀를 제외한 모두가 처형당한다. 하지만 음식에 독을 넣었던 테일러 가문의 집사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모든 사실을 고발하면서 테일러 가문을 비롯한 비앙피에 사람들은 재산 몰수와 작위마저 해지 당하고, 테일러 가문은 사형에 처해진다.
그렇게 마가렛트 가문의 비극 끝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피아 마가렛트와 릴리 마가렛트였다.
소피아는 어떻게든 가문을 되살리기 위하여 급하게 최근 세력을 넓히고 있던 한 백작과 결혼을 했다. 열한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러나 소피아가 결혼을 한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온몸의 뼈가 부러진 채 사망하여 돌아오게 된다.
“언니, 이러지마. 응? 왜 이래, 언니, 언니! 제발, 대답 좀 해줘….”
부모님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고, 친하게 지냈던 시녀들과 집사가 모두 목이 잘리자 릴리는 매일같이 심장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런 릴리에게 남은 건 소피아 하나였다.
그런데 소피아마저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릴리는 끝없는 절망에 빠졌다.
그때 소피아와 결혼한 백작은 자신의 살인을 덮고자 하였다.
사흘 밤낮은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소피아의 시신을 안고 있던 릴리는 자신을 죽이려고 직접 저택으로 온 백작을 칼로 찔러 죽인다.
단순히 괴한의 습격이라 생각했지만 자신을 공격한 이가, 언니를 죽게 만든 바로 그 백작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릴리는 분노에 휩싸인다.
이후 밤이 되자마자 귀족의 저택으로 간 후, 저택의 사람들을 전부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불을 지른다. 불에 타는 저택을 보며 릴리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언니 몸은 상처투성이였어. 매질을 얼마나 심하게 당하면 온몸의 뼈가 부러져? 도대체 언니는 무엇을 위해서…언니가 왜 죽었어야 했는데?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때 불을 지르고 돌아가던 도중 만난 사람이 바로 아직 황태자비 시절의 로젤리아 가넷이었다.
밤이라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릴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로젤리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히 목격자라고 생각해 죽이려 했지만 로웬과 함께 검술을 배워왔던 로젤리아는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단박에 릴리를 제압당한다. 그리고 몇 번의 추궁 끝에 릴리는 모든 것을 실토한다.
더 잃은 것도, 살아갈 의지도 없었다.
릴리는 자신이 공격한 사람이 황태자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사형에 처해지리라 생각했다. 황태자비를 시해하려는 것도 모자라 귀족을 살해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까지 질렀으니.
그러나 로젤리아는 릴리를 처벌하기는커녕 자신의 전속시녀로 임명하고, 릴리가 한 일을 전부 덮어버린다.
“내가 한밤중에 그 귀족의 집을 찾은 것은 그 가문이 가넷 가에 반기를 드는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귀족에게 심어둔 시녀는 내 첩자였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눌러버리기에는 그 백작의 머리가 아까워서. 쓸모없는 놈이었지만 머리 굴리는 재주는 뛰어났기에 직접 만나 첩자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제안을 해보자고 생각했지.”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겠죠.”
예의 없이 대꾸했음에도 로젤리아는 웃고만 있었다.
“그 귀족은 재산은 많지만 평소 영애들에게 추근대고, 부인을 들이면 가지고 놀다 버리기로 유명했다. 대부분 돈으로 소문을 숨겨 모르는 이들이 많더군.”
“언니 말고 그렇게 죽은 사람이 또 있었다고요?”
“그래. 백작의 사용인들 중 몇 명은 정말 악질이었지. 내가 보낸 첩자도 그놈들에게 뺨을 맞았다고 하더구나.”
“….”
“하지만 네가 죽인 사용인들 중에서는 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대부분은 백작의 심기를 거슬리게 될까봐 차마 도와주지 못했던 이들도 존재했겠지.”
그 순간 릴리의 머릿속으로 소피아가 보냈던 편지 한통을 떠올렸다. 열한 번째 부인으로 들어왔는데도 잘해준다고. 저택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애써준다고. 글씨는 반듯했고, 정갈했다. 거짓말을 하면 손부터 떨리는 언니의 버릇 따위 그 편지에는 묻어나 있지 않았다.
“네가 괴롭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네 언니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이들은 정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 죽지 말고 그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거라.”
로젤리아는 땅문서를 하나 내주며 말했다.
“여기에 그 사람들을 묻어라. 날마다 가서 그들의 무덤에 꽃을 놓아줘.”
릴리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붉은 눈가를 달고 있던 시종 몇 명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상복이었다. 그 옷은 상복이었다. 언니가 죽었다는 분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팔려오듯 시집 온 몰락 귀족가의 여식이 죽었는데 누가 상복을 입고 울어준단 말인가.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영특한 아이이니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문서를 받아든 릴리는 땅문서를 구기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은 귀족을 죽인 살인마 영애였고, 로젤리아는 황태자비였다. 황후가 될 몸이니 이런 일에 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죄명만 따지면 사형을 시켜도 할 말조차 없을 텐데.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로젤리아는 릴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 귀족은 죽을 만 했단다.”
“…네?”
지금, 죽을 만 했다고 말하는 거야?
“시녀들이 그렇게 말하더구나. 죽어도 싼 놈…이라고. 그는 죽어도 싼 놈이었다. 재산으로 덮은 죄 또한 수두룩하니까. 아무리 조사하고 조사해도, 선한 기색이라고는 없었어.”
로젤리아는 구겨진 땅문서를 다시 펼치며 제대로 릴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잘 죽였다.”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니, 릴리 마가렛트?”
릴리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죽였다니, 사람을 죽였는데 잘 죽였다고? 정말 윤리에 어긋난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 사람을 죽인 행위에 ‘잘’이라는 말이 붙으면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죽어도 싼 놈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인 건데, 그래도, 사람을….
‘저 집 소피아 영애가 맞아 죽었다며? 그러게 가문을 살릴 생각을 해야지 얹혀살 생각을 하냐고. 제 아비와는 닮은 구석이 없네.’
‘왜 맞아 죽었대? 아무 이유 없이 맞아 죽은 건 아닐 거 아냐, 다른 남자랑 놀아났나? 그래서 맞아 죽은 거지!’
‘그렇게 잘 나가더니,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이네.’
들어온 말 속에 소피아를 향한 동정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피아의 잘못이라며 비난했다.
입술을 세게 물어 피가 흘렀다. 로젤리아는 말없이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젤리아님.”
릴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정중하게 예법을 갖춰 허리를 숙였다. 가문이 몰락한 이후 처음 들어본 따스한 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전속 시녀 일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해도 되겠습니까. 꽤 시간이 오래 걸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전속시녀의 자리는 언제든 비워둘 테니.”
그 뒤로 릴리는 한동안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릴리 마가렛트가 언니를 잃고 미처 날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잠잠해질 때쯤, 릴리는 로젤리아의 전속 시녀로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가렛트 가는 이미 지나가 버린 몰락 귀족 가문이었다.
릴리를 알아보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아봐주는 이는 로젤리아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