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이지?
“대, 대공 각하, 소, 손목을 자른다니요!”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드리는 겁니다. 릴리, 가서 내 검을 가져 오거라.”
나는 자비 없이 차갑게 응대했다.
몇 분 뒤, 릴리가 가져온 검을 손에 쥔 채 검 끝으로 귀족들을 한명씩 가리켰다. 그래서 누가 내 하녀의 뺨을 때렸나요?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녀가 맞든 안 맞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 때린 본인만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천천히 한 명씩 눈으로 훑었다. 가장 떨고 있을 사람.
뺨을 맞은 하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을 한 사람.
내 뒤에 있던 하녀가 몸을 움찔거렸다. 하녀의 시선은 오드렝 남작에게 닿아있었다. 신분이 낮은 여성에게 함부로 손을 뻗기로 유명한 남작.
나는 오드렝 남작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하녀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줄까, 정말 손목을 자를까? 아니면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줄까.
“저, 저는. 괜찮은데….”
“이건 괜찮지 않은 일이란다. 넌 뺨을 맞았어. 뺨을 때린 사람은 응당 그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 해. 너는 내 저택의 사용인이니 솔직하게 말해도 좋단다. 내가 내 사용인 하나 못 지킬 것처럼 보이니?”
“아, 아니요!”
“그럼 솔직하게 말해보겠니?”
하녀는 우물거리며 자꾸 남작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라 말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대공 각하!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너무한 처사라고요?”
“권력을 이렇게 사용하시다니요, 그, 그것도 이렇게 검을 들고 위협하는 일이 옳다고 보십니까?”
다급하게 외치는 오드렝 남작을 보며 칼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이 처사가 정말 너무해 보입니까, 오드렝 남작?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는 몸을 낮춘다.
“나는 지금 아주 많은 걸 봐주고 있습니다. 남작.”
그리고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인다면 어떻게든 흠을 만들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뻔하죠, 로젤리아 가넷이 대공의 자리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시행한 이 무역 상단. 대공으로서의 첫 사업이니 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지, 그러니 반발을 내밀자.”
“!”
“그리고 뜯어먹을 걸 다 뜯어먹자. 흠집도 내고. 무역 상단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조건을 들어줘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머리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나쁘다 하면 나쁜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나름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너무 뻔히 보이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전대 대공들처럼 어느 정도 유순하고, 적당한 처사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점. 그것이 가장 큰 그들의 문제였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나처럼 귀족들이 낮잡아 보는 대공도 없다고요.”
서늘하게 웃자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만 삼켰다. 그런 말이 오고간 것은 사실이니까.
황후를 계속 배출해냈던 가문에서 이혼한 황후가 나왔다.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다.
가넷 가문에서 버려질 지도 모른다.
게다가 황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까지 들였다니. 그러니 ‘로젤리아 가넷’에게 황후라고, 가넷 가문의 사람이라며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그 말이 사실처럼 떠돌았다.
플로트 후작은 로젤리아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버린 귀족들을 보며 혀를 찼다.
루레드 남작의 신문소가 로젤리아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작의 신문소는 정보를 얻어내기보다는 조작을 하는데 유용했다. 귀족들의 불륜, 악소문을 퍼트리거나, 이미지를 망가트리는 용도. 루레드 남작은 스스로가 상당히 영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유용한 도구였기에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이건 사교계에서 거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로젤리아가 그 규칙을 깨는 것도 모자라 남작의 신문소까지 사들였다. 여기서부터 몇몇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 후 로젤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들인 정부가 사실은 타국의 마법사였고, 사교계의 난동을 바로 잡는데 일조했다고. 이런 상황에 정부를 들이는 게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못가 열린 이혼 재판자리에서 로젤리아는 스스로 대공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대공이 되어서 한 일은 상단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무역 상단의 설립이었다.
그러니 로젤리아를 낮잡아보는 시선이 차츰 줄었다.
그러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흠을 내려고 하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상황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플로트 후작은 더 이상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지가 이혼한 황후라지만, 놀라울 정도로 똑똑하며 대공이라는 작위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전 황후여서, 그래서 가넷 가문에 버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니면 여성 대공? 여성 대공은 우스운가요? 그러나 내가 여성이든 전 황후든 뭐가 중요하죠? 뭐가 되었든 이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인데.”
나는 눈앞에 황후의 왕관을 내려놓았던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지금껏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던 왕관을 포기했지만, 내가 가넷 가문에서 버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 대공, 전 황후, 가넷 가문에서 버려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이혼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자기네들은 집에 아내를 뒀으면서도 몇 번씩이나 애인을 갈아치우잖아.
그게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흠이 된 적이 있었나?
이혼한 황후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함부로 하지 않았을까?
‘아니지, 더 심했겠지. 그래도 내가 황후였던지라, 대공의 자리에 앉아서 이 정도인 거야.’
문득 내 예법 교사였던 이엘리 메리골드가 떠올랐다. 그녀는 원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폴리아나 백작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 정부를 스물넷이나 들이자, 못 참고 이혼을 했다.
이혼을 했을 당시, 그녀는 제인 가문에서 쫓겨났다. 제인 가문은 돈이 궁핍한 가문이었고, 거의 팔려가듯 폴리아나 백작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결국 이혼을 하자 친정으로부터 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리고 사교계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이혼한 여성은 사교계에서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지 이혼했기 때문에, 수치스러워서 나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엘리는 예법 교사가 되어있었다. 예법이라고는 평생 익히지 못할 것 같았던 한 영애에게 그 누구보다 완벽한 예법을 가르친 이후 그녀는 유명해졌다. 이름 있는 가문의 교사로 일을 했다. 가넷 가문의 예법 교사로 일을 한 이후 지금까지도 그녀를 예법교사로 데려가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그런 귀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엘리는 아직까지도 이혼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마치 죄수번호처럼 이혼이 그녀를 계속 따라다녔다.
어떤 일이든 전부 해내고 혼자 해결하며 일에 빠져 사는 여자.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남자일 경우, 나는 남자 없이 못사는 여자가 된다.
그렇기에 이번 무역 상단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싶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 못 한 것도 아니었다.
대비책은 언제나 확실하게 준비해두었다. 앞으로도 추진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강한 반발이 쏟아질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점점 지쳐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이엘리를 떠올리자, 뭐가 되었든 이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대공이 아닌 여전히 이혼한 전 황후로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시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내가 왜 굳이, 이 사람들을 회유하고 그게 실패하면 권력을 이용해 찍어 눌러야 하는 거지?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말없이 릴리에게 검을 건넸다.
레이피어에 비친 내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릴리, 네가 알아서 처리 하거라. 봐주는 것 없이, 제대로.”
“네, 알겠습니다. 로젤리아님.”
이 자리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상대하기도 싫었다.
이 일로 또 어떤 말이 오고 갈지 가늠조차 하기 싫었다.
***
“이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무역 상단이 정말 세워지는 거야? 15% 절감 얘기가 취소된다는 건 또 뭔데!”
“플로트 후작만 믿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진짜 손목을 자르는 거야? 어떻게 되는 거지?”
귀족들은 혼란 상태였다.
전속시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돌아가는 로젤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대상이 로젤리아가 아닌 가넷 가의 사용인들이 되어버렸다. 하녀에게 사과를 하라고? 시종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말이 돼?
그때 릴리가 로젤리아에게 건네받은 레이피어를 크게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저 검이라면 정말로 손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렝 남작은 저절로 떨리는 손을 꾹 눌렀다.
남작은 뒤늦게 로젤리아를 붙잡으려 했지만 릴리가 그를 저지했다.
“무역상단에 관해서는 저와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오드렝 남작.”
“여기가 어디라서 함부로 나서, 저리 안 비켜?”
어깨를 밀치려던 손을 릴리는 가볍게 쳐냈다. 손이 아닌 검으로.
순식간에 손바닥에 베인 오드렝 남작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보며 이를 악 물었다.
릴리는 손수건으로 레이피어를 쓱 닦았다.
사람을 베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한번만 더 손을 댄다면, 이번에는 손이 아닌 목을 날리겠다는 위협처럼 느껴졌다.
“제가 무역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이에 대해 논하시고 싶은 게 있다면 저와 논하시죠.”
“뭐? 상단주? 네 년이 무역상단의 상단주라고?”
“그렇습니다. 한 달간은 로젤리아님이 직접 무역 상단을 관리하시겠지만 그 후에 모든 권한을 제게 위임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상단주라고?
그 순간 귀족의 눈이 동시에 릴리를 향했다.
로젤리아가 상단주가 아니다?
그럼 보고만 받는 것인가?
그럼 무역 상단을 이끄는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사람이 릴리라는 소리였다.
릴리는 레이피어를 쥔 채 귀족들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내려다보는 쪽은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벌레만도 못한 것들을 보는 눈빛에 발끈하는 귀족들이 몇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로젤리아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무역 상단의 상단주에게 마저 찍힌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있던 남작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