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가넷 무역 상단
상황을 겨우 수습한 뒤에야 귀족들이 보낸 선물을 열어볼 수가 있었다.
귀족들이 모두 모인 무도회에서 쓰러진 것 때문에 여러 가문에서 선물과 편지를 보내왔다. 하나같이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대공 각하, 무도회에 그런 일이 있어서, 각하 몸은 괜찮으신지요, 각하, 각하….
귀족이 상해를 입으면 우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게 예의였다. 사실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도회에서 샤를로테와 신경전을 벌인 일 때문인지 내가 아는 귀족 가문의 대부분이 선물을 보내왔다.
만약 내가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지 않았어도 이렇게 선물을 보냈을까.
릴리와 함께 자리를 잡고 선물을 개봉했다. 많은 양의 편지를 보며 답장을 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가늠했다. 선물을 열어보던 도중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악세사리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로젤리아님. 황금 장미 브로치네요?”
금으로만 이루어진 황금 장미 브로치.
“이걸 누가 보냈지?”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브로치를 가슴 위에 가져다 대보았다.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수수했다. 장미 한 가운데에 커다란 가넷 문양 박혀 있었다.
“편지가 동봉되어 있는데, 열어볼까요?”
“그래, 누가 보냈는지도 확인해보렴.”
누군데 내 취향을 이렇게 잘 알까. 말없이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칼라일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안부 선물치고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릴리, 이거 누가 보낸 거니?”
“….”
“릴리?”
“아, 아! 네. 그….”
릴리는 편지를 손에 쥔 채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네요.”
브로치를 직접 착용해보려다 조심스럽게 그대로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페르소나가 보냈다고? 이걸? 왜? 나는 릴리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져와 빠르게 읽어 내렸다. 대충 걱정스럽고 미안하며, 몸을 잘 챙기라는 내용이었다.
혹시 아침에 온 황궁의가 몰래 갖다 놓았나?
참으로 뻔뻔했다. 자기가 샹들리에를 떨어트려놓았으면서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고? 나한테 편지는 왜 보내? 나는 브로치를 다시 케이스 안에 담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것일까. 샹들리에를 떨어트린 거? 아니면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황제로서 사과를 한 것인가?
“어떻게 할까요, 로젤리아님.”
“이 편지의 답장은 나 혼자 할 테니, 너는 다른 편지를 좀 열어봐주렴.”
그렇지, 귀족들 중에서 이렇게 내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은 있을 리가. 선물을 돌려보낼까 생각했지만 돌려보내기도 참 애매했다. 나는 천천히 브로치가 담긴 케이스를 화장대 서랍 가장 구석에 두었다. 마저 답신을 작성하려 책상에 앉으려던 그때였다.
“로젤리아님!”
하녀들 중 한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열린 문 너머로 고함을 지르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그, 모르겠습니다. 귀족 분들인 것 같은데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어쩐지 하녀의 뺨이 살짝 붉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계단을 빠르네 내려가면서, 하녀에게 모든 사정을 전해 들었다.
내가 대공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추진한 무역 상단. 그에 반발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었다. 어느 정도 우려한 상황이지만 또 어떤 주장을 내밀며 무역 상단에 반대의 입장을 내보일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올바른 항의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내가 귀빈실로 들어가자마자 대공저를 가득 울리던 고함이 멈췄다.
‘하나같이 트집을 잡으러 왔나 보군.’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는 와중,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하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뺨 위에 선명한 상처가 보였다. 어디 부딪히거나 다친 게 아니다. 맞아서 생긴 상처. 지금, 내 사용인에게 손찌검을 한 거야?
“각하, 아무리 이제 막 대공이 되었다지만, 무역 상단이라니요,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주시지요.”
나에게 상황을 알리러 온 그 하녀의 뺨도 붉었어. 설마 그것도 맞아서 생긴 거였나?
“…그렇죠. 설명. 설명을 듣고 싶으셨군요. 어느 부분을 어떻게 듣고 싶으신 거죠?”
한쪽 팔을 꾹 눌렀다. 아직이야, 감정적으로 대응 하지 마. 내 하녀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하녀를 뒤로 물렸다.
상단주가 아닌 상단을 운영하는 귀족이 직접 오다니. 그것도 상단 운영에 꽤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플로트 후작이 직접. 다른 귀족들이 한마디도 안 하는 것을 보면 플로트 후작이 대표로 나서겠다고 한 건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무역 상단에 대한 의제를 공표하면서 반발이 일어날 것은 알고 있었다.
상인들이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항구를 소유하고 있는 가넷 가문으로 어떤 물품을 며칠간 어느 나라로 갈 것인지를 작성해 올려야 한다. 그런데 서류를 작성하여 올리는 절차가 상당히 복잡했다. 그러다 보니 몇몇 상단에서는 그 절차를 대신 처리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그 복잡한 절차를 대신 처리해준다니 고맙다면서 돈을 지불했다. 하지만 해당 상단에서 비용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리기 시작했다.
릴리를 보내 그 수입을 따로 조사했었다. 그 돈이 상단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35%라. 도대체 얼마나 높은 값을 불렀을까, 평범한 상인들은 그게 불법인 줄은 알까?
내가 무역 상단을 세우면서 상당 부분의 수입을 잃게 되었으니 저 난동을 피우는 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만 그건 엄연한 불법이었다. 그 절차가 불법인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아니면 멍청할 정도로 이렇게 무례하게, 예법도 갖추지 않고.
아니지, 애초에 무역 상단을 핑계로 날 깎아내리려 하는 걸 거야. 몰려오는 두통을 참으며 생각이 뻔히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무역 상단 일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작성한 서류를 댁으로 보내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혹시 서류를 못 받으셨나요?”
“상단이란 게 얼마나 복잡한지 잘 모르시나 봅니다, 대공 각하. 이 일은 단지 서류를 통해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서류로 처리할 일이 아닌 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공표 후 상단 일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지만 답신을 보내지 않은 게 누구였지? 뚝뚝 끊어지는 이성을 겨우 붙잡고는 억지로 입술 위에 미소를 걸었다.
“논의에 대한 제안서를 받지 않으셨나요? 분명 그 서류에 명시한 내용을 확인하였음을, 똑똑히 기억합니다만.”
“대공 각하께서 공을 들여 시행한 내용치고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답신을 안 보내셨다고요?”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방금 그 한마디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가넷 대공이 공을 들여 시행한 '첫' 사업. 이혼 후 대공의 자리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시행한 사업이니 무조건 성공해야 하겠지. 안 그러면 완벽하고 무엇이든 깔끔하게 해내는 가넷 대공의 이미지가 깎일 테니까.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걸 노리고 이러는 거구나.
무역 상단은 계기이면서 핑계인 셈이야.
“원래는 무역 항구 이용비용의 15%를 절감할 생각이었습니다.”
“겨우 15%로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요. 이 일은 없던 걸로 치죠.”
혀를 차며 시퍼런 칼날처럼 가넷 대공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25%까지 절감해도 모자를 판에 어, 없던 일로 치, 치자니……다, 다른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그 부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감당이요?”
절감을 취소하자 플로트 후작의 눈이 당혹으로 커졌다.
더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절감 관련 내용을 취소하고 그대로 가겠다니?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플로트 후작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무역 상단에 대한 공표를 거두게 하거나 하다못해 조항을 추가시키거나 기를 눌러 죽일 생각이었겠지.
게다가 나는 그의 딸과 아들에게 모욕을 준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기회 삼아 어떻게든 쩔쩔매는 모습을 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이겠지만….
나는 미소 지으며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후작을 마주했다.
“감당이라. 참 재밌는 말입니다, 후작.”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다.
“후작께서는 어린 쥐새끼가 발밑에서 찍찍대는 게 감당 못 할 일인가 보죠?”
어디선가 풉, 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트 후작은 ‘쥐새끼?’ 라며 잠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니 이내 쥐새끼가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혔다.
“지금 저에게 쥐새끼라고 하신 겁니까!”
“스스로를 쥐새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후작. 자학은 나쁜 겁니다.”
“하! 가넷 가문의 대공이 이렇게 천박한 말을 쓰다니!”
“그렇죠, 천박하죠.”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플로트 후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이렇게 천박한 말을 쓰는 건,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다다랐다는 소리입니다.”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차가운 시선만이 남았다.
순식간에 바뀐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플로트 후작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무역 상단의 일에 대해서는 분명 쓸데없을지 모를 부분까지 전부 상세하게 적었고, 이에 대해 수출 비용을 15% 절감해주겠다는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시는 말씀이 고작 그것입니까?”
“무역 상단을 세우는 것은 다른 상단의 수입을 일부 가로채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모르십니까?”
마지막 발악을 하듯 플로트 후작이 크게 외쳤지만 그 말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로젤리아가 손을 까딱이자 릴리가 플로트 후작의 목을 비틀어 쥔 탓이었다.
“불법으로 받아먹는 돈을 어디 수입이라 지칭하지 마시죠, 후작.”
천천히 목을 옥죄자, 플로트 후작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제게 무역 상단에 대하여 반발을 내미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시다시피 항구는 모두 가넷 가문의 소유인데 말이죠.”
릴리가 플로트 후작을 바닥으로 던지자 후작은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그 어떤 귀족도 플로트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제야 이 상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역 상단, 이건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면서도 동시에 항의할 수 있는 건수이기도 했다. 많은 귀족들이 이에 대해 반발하고 또 반발하면서 상단들의 수입을 끊어내는 일이라는 명목과, 갑작스럽게 공표된 것을 근거를 내세운다면, 무역 상단에 대한 발상은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판단은 큰 오산이었다. 불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벌어들였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설령 대응할 방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제가 자비를 베풀어도 너무 베풀었나 봅니다. 저는 엄연히 대공이고, 당신들은 저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일 텐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가넷 대공이라는 것.
“내가 여성이라 이런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까? 제가 이까짓 일도 쉽게 대응 못 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어쩐지, 전대 대공 시절에는 상단의 비리 자금과 횡령, 불법으로 유통하는 것마저 세세하게 관리하더니, 내가 대공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그 관리가 느슨해졌더군요.”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대, 대공 각하! 그, 그런 게, 아니…….”
“감당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해야 할 겁니다.”
급하게 오른 자리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할 것이라 그들은 자만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별도 없이 가넷 저택을 들어오신 것은, 분명 제 가문을 쉬이여기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히 가넷 가의 이름으로 대응하겠습니다.”
더는 볼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따라붙었다.
“아, 아니, 대공 각하, 이건! 저희도 너무 놀라서! 무역 상단이라는 게, 저, 저희도!”
“맞습니다! 오해십니다, 각하! 무역 상단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저는 뒤늦게 서류를 받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이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역 상단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다 휘말렸습니다! 저는 전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각하!”
귀족 중 한 명이 입을 겨우 열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해라고, 너무 놀라서 그런 거라고, 무역 상단에 대해 잘못 알았다고.
어째서 굳이 권력을 사용해야 무례를 거두고 예의를 갖추는 것일까.
나는 아까 뺨에 상처가 났던 하녀 두 명을 다시 불러왔다. 천천히 뺨을 만지면서 눈에 살짝 고여 있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나 때문에 뺨을 맞게 해서 미안하구나.”
살짝 허리를 숙여 말하자 하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귀족 무리를 노려보았다. 똑같이 뺨을 때려주고 싶다는 눈치였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찌 되었든 당신들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죠.”
하녀에게 보내던 따스한 눈빛으로 귀족들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몇몇 귀족들은 살짝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만 하면 이번에도 무사히 넘어가겠구나, 하고.
나는 나긋나긋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제 하녀에게 손찌검을 한 사람이 누구죠?
“이번만 특별히, 그자의 손목을 자르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