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적어도 로젤리아 정도로.
한밤중 같은데 왜 기사들이 돌아다니지? 무도회라 황궁 근처에 배치되어 있어야 할 텐데.
“칼라일,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죠?”
“시간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 5시간쯤 되었습니다.”
쓰러진 시간이 저녁 8시쯤. 그럼 새벽이었다.
아직 무도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다.
왜 기사들을 풀었지?
“아마 저와 로젤리아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사라지다니요?”
그래,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치유 마법을 써서 나를 치료하고 곧장 돌아온 거라면 깨어난 곳이 이 저택이 아니라 대공저여야 했다.
왜 나는 이 저택에 있지? 릴리는? 내가 쓰러진 것을 봤으니 내가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텐데?
“제가 워프를 썼습니다.”
“내가 아는 그 워프를 말하는 건가요?”
“로젤리아님이 말씀하시는 워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흔히 공간 이동마법이라고 하죠. 깨어나자마자 쓰러진 그대를 끌어안고 곧바로 이 저택으로 워프를 했습니다.”
마력학에 대하여 공부한 덕분에 칼라일보다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마법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워프, 한번 이동할 때마다 마력이 많이 들어서 상급 마법사만 쓸 수 있다던 그 마법!
치유마법만 쓰지 왜 워프까지 한 거야!
하지만 차마 때릴 수는 없어서 손을 부들부들 떨다 내렸다.
칼라일도 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대충 짐작한 것인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당황했겠지.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니까.
나는 말없이 그의 손목을 꾹 눌렀다. 칼라일은 살짝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손목의 멍이 짙어진 이유는 치유 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워프 때문이었다.
나한테 치유 마법을 쓰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입장이 아니었다.
말없이 그의 볼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그래놓고 나에게는 치유 마법을 쓰지 말라니, 약속하라 그랬으면서. 분노를 담아가면서 누르자 볼을 누르는 내내 내 시선을 피했다.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치유마법을 쓸 생각도 못 하고,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볼이 꾹 눌린 채 우물거리면서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애교를 부려도 안 봐주겠다는 심정으로 볼을 눌렀다.
그때 시선을 피하던 칼라일이 천천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번 한번만 빼고.”
그 순간 발밑으로 사람 두 명이 충분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랐다. 구조도 복잡한데다 여러 개의 작은 마법진이 겹겹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은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번쩍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도 모르게 칼라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허공에 떠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을 휘적거렸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였다. 아찔한 높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것도 워프인 거면 내려가서 진짜 화낼 겁니다.”
“워프 아니니까 걱정하지마세요.”
칼라일은 내 손을 잡고 허공을 걸었다. 나도 그를 따라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신기하게도 걸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닥이라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칼라일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그 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어쩐지 바람을 밟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모든 기사들의 시선을 한데 끌어 모았다.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와서, 아니면 사라졌던 가넷 대공과 그의 정부가 나타나서? 내 생각에는 둘 다 같은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구겨진 드레스자락을 다듬었다.
기사들에게 전해들은 상황은 간단했다.
나와 칼라일이 사라진 이후 페르소나는 또다시 샹들리에가 무너져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며 무도회를 중단했고, 귀족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나는 마차를 준비하는 기사들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이 새벽에 이 많은 기사들을 푸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 잘못도 있으니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각하를 찾자마자 황궁으로 모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른 시간이면 모를까, 지금은 새벽이니 나중에 찾아뵙는다고 전하거라. 다른 기사들도 피곤할 테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다.”
“폐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도 황궁으로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페르소나가 나를 걱정했다고?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나를 걱정할 리가 없었다.
걱정했다면 칼라일 머리 위로 샹들리에를 떨어트리지 않았겠지. 나도 함께 샹들리에에 깔릴 수 있을 텐데, 페르소나가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런데도 떨어트린 것을 보면 내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나 때문에 고생 많았군요.”
“아닙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피곤해 보였다. 돌아가는 데 만해도 시간이 꽤 걸릴 텐데. 나처럼 마차를 타는 게 아니라 걸어가야 할 테니까.
그때 기사들 중 한 명이 비명에 가까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연이어 다른 기사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들이 왜 황궁 입구에 와있는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방금까지 분명 수도에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서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왜 갑자기….
설마 이게 그 워프인 건가?
당황하는 기사들을 뒤로 하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칼라일의 얼굴에도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칼라일이 한 게 아닌가?
나와 눈이 마주친 칼라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루치아노가 무언가를 입에 넣으며 굉장히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
“가넷 대공을 찾았다고?”
페르소나는 무도회를 중단 시킨 이후 지금까지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사라진 로젤리아 때문이었다.
일부러 샹들리에의 고리 부분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 칼라일이 로젤리아와 떨어지고 혼자 남았을 때 그의 머리 위에 떨어트려 놓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그놈 손에 수갑을 채워놨지만 어느 정도 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력 제어 수갑. 샤를로테에게 들은 그놈의 정보를 바탕으로 따로 사람을 시켜 만든 수갑이었다. 마력이 지독히도 많고 강한 놈이니까 마물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일부러 마물용으로 만들었는데…그래도 강한 놈이니까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크게 다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샹들리에에 깔린 것도 모자라 로젤리아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녀의 드레스가 붉게 물든 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툭!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치게 하려는 것은 로젤리아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네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거야.
단상에서 내려와 나도 모르게 로젤리아에게 다가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로젤리아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손을 뻗은 순간 칼라일이 로젤리아를 끌어안았다.
텅 빈 눈으로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던 칼라일은 그대로 로젤리아와 함께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흥건한 피 웅덩이와 산산조각 난 샹들리에 뿐이었다.
혹여나 죽었을까,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나. 피를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기사들을 풀었다. 그리고 수석비서에게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 했다.
걱정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는데, 멀쩡하다니 다행이었다.
“대공은 어디 있지? 지금 가겠다.”
직접 눈으로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멀쩡할지, 다친 곳은 없는 지, 피가 흐르던 눈은 괜찮은지. 경멸스러운 눈을 하더라도 좋으니 그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었다. 가느다란 손을 잡고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폐하, 께서는 곧바로 대공저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갔다고?
집무실을 나서는 페르소나의 걸음이 멈췄다.
“황궁으로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왜 대공저로 돌려보낸 거지?”
“대공님께서 너무 늦은 시각이라 하셨습니다. 내일 알현이 가능하면 알현을 신청하겠다고 하시는데,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든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그제야 페르소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래, 새벽이었다.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이기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과 별개로 걱정스러운 감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을까, 정말 괜찮을까?
멀쩡하다고는 했지만, 그렇게 피를 흘리고 쓰러졌는데 정말 멀쩡하다고?
그놈이 마법으로 치료한 건가?
페르소나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알현은 되었다. 따로 편지를 쓸 터이니 이 편지와 함께 대공저로 황궁의를 보내라.”
“네, 폐하.”
책상에 앉아 붉은 깃펜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탓에 뭐라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눈앞에 로젤리아가 있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이성을 차리고 천천히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몇 번이나 펜을 들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종이를 몇 번이나 바꾸고 잉크 한 통을 다 쓴 뒤에야 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샤를로테는 뺨을 치료하는 내내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속시녀인 벨라 남작부인은 샤를로테의 눈치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황궁의가 실수로 상처를 건드려 더 부어올랐음에도 한번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질문을 했다.
“전 황후는 언제부터 황후 교육을 받았지?”
전 황후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대답하라고 추궁을 했다. 벨라 남작부인은 최대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황궁 시녀만 십년이었다. 이 상태에서 샤를로테의 심기를 거슬리면 그대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넷 가문은 제 2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황후를 배출한 가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넷 가문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모두 어릴 때부터 황후 교육을 받습니다. 로젤리아 전 황후 폐하께서는 4살 때부터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4살부터 구체적으로 뭘 배웠는지 알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샤를로테는 말없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남작부인에게 건넸다. 판다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비싼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남작부인은 깜짝 놀라며 목걸이를 받았다. 그리고 이 목걸이가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새 교사를 구해와,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최대한 단기간에 끝낼 수 있도록. 벨라 남작부인은 눈치도 좋고 빠르니까 조용히 잘 할 수 있지?”
부드럽게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날이 서있었다.
남작부인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걸이를 가지고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샤를로테는 의자 팔걸이를 내려쳤다. 뺨이 욱신거렸지만 상관없었다. 몇 번 더 세게 팔걸이를 내려친 뒤에야 답답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 풀렸다.
칼라일과 약혼자였던 샤를로테, 이거면 로젤리아를 흔들어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얼마 없는 마력으로 세뇌마법까지 사용했는데…!
그 순간 샤를로테는 울컥, 피를 토했다.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한 탓이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세뇌마법으로 칼라일과 로젤리아의 사이에 금이 가게 만든 뒤, 칼라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그 둘의 신뢰가 두터웠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왜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거야!
발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꽃병을 깨고 베개를 뜯어놓을 시간에 다른 방안을 생각해야 했다.
칼라일은 나를 싫어해, 분명 나에게 복수를 할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로젤리아의 정부인 이상 나와 접촉하려 시도할 것이다. 마력 제어 수갑을 언제까지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해치면 곤란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물론 나는 아기를 가진 상태이니 지금 당장은 해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출산을 하고 난 뒤에는?
그 뒤를 생각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라일이 해쳐야 할 사람이 ‘임시 황후 샤를로테’가 아니라, ‘황후 샤를로테’가 되어야 했다.
로젤리아처럼 완벽한 황후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이전 황후들 수준만큼은 되어야 했다.
샤를로테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배를 쓰다듬었다.
그 더럽고 역겨운 안케도니아 황실에서 벗어나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가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될까?
인정하기 싫다, 하지만 나는 패전국의 13황녀였다.
내가 여기서 벗어나면 뭘 할 수 있을까.
‘샤를로테, 잘 들어. 13황녀인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렇지? 그냥 내 말을 들어. 내 말만 잘 들으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네가 정말 황녀인 것 같아? 더러운 집시의 핏줄을 이어받은 주제에.’
‘노력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어. 설령 네가 카트리안 1황녀보다 똑똑하다고 해서, 뭘 할 수 있겠어. 태생이 다른데, 그치?’
페르소나가 때린 뺨이 계속 욱신거렸다. 팔걸이를 내려친 손도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아 배까지 아파왔다. 배를 움켜쥔 채 몸을 웅크렸다.
어깨가 떨리는 이유가 차라리 고통 때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