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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36화 (36/170)

#36화, 설령 나를 배신하더라도

검에 찔린 칼라일은 모든 것들을 다 잃은 표정이었다. 카렐리아의 피 젖은 로브를 발견했을 때처럼, 샤를로테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그 순간 둘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궁금했다. 칼라일이 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기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세실리아의 파티가 있던 그날. 내가 둘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알고도 칼라일은 그때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안아달라고만 말했을까.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이렇게 처절하고 안쓰러워서. 정말로 떠올리기가 괴로워서 그랬던 거라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뭐하는 거지? 어서 저택의 문을 부숴라!’

그 순간 큰 굉음이 귓가를 거칠게 헤집었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놀라서 몸을 움츠러트렸다.

뭐지? 칼라일의 기억이 다 끝난 게 아니었나?

이전과는 또 다른 기억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주변은 불타고 있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무장한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장막에 둘러싸인 저택, 그러나 그 장막은 너덜너덜했다.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기사들 사이로 나섰다. 얼굴은 그늘로 가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죄도 없는 제국의 기사들의 반을, 죽인 놈의 집안이다! 어서 장막을 무너트려!’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저택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장막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틈을 노려 기사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저택이 무너지고 부서졌다. 흙먼지가 크게 부는 탓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장면은 빠르게 지나갔다. 무너진 저택, 기사들의 환호.

아까 봤던 기억과는 달리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장면이 깨지고, 흔들리고 까맣게 변했다가 다시 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안개는 없었다. 분명 방안을 떠돌고 있는 안개를 보았고, 그 속으로 들어왔지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은색 돌멩이 두 개 뿐이었다. 하나는 깨진 부위 없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난도질이라도 하듯 잔뜩 깨져있었다.

그 기사들은 뭐지?

그 저택은?

제국의 기사를 죽인 놈의 집안? 그것도 칼라일의 기억인가?

머리가 아팠다. 샤를로테를 둘이서 만난 그때처럼 머리가 욱신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칼라일의 기억이었다. 그럼 그 안개는 예전의 기억을 보여주는 마법인가?

“로젤리아님!”

바닥에 떨어진 반짝이는 돌멩이를 주우려던 순간, 누군가 나를 뒤에서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놀라 고개를 드니 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없어져서, 계속 찾았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칼라일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옷도 찢어진 곳은 없었고 멀쩡했다. 머리에 있던 찢어진 상처와, 온몸에 박혀있던 유리 조각은 없었다.

다행이야, 치유마법이 통한 거였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칼라일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샤를로테의 칼에 찔렸을 때처럼 처절한 표정이었다.

“칼라일 괜찮아요?”

“어쩌자고 치유마법을 쓰셨습니까?”

“그대가 무너진 샹들리에 때문에 다쳤잖아요.”

“로젤리아님의 마력양은 소량이었어요. 치유마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치유마법은 마력을 다 쓰면 수명으로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그 때문에 로젤리아님은 죽을 뻔했습니다.”

죽을 뻔 했다고? 그 말에 쓰러지기 바로 직전 온몸으로 퍼지던 날카로운 고통이 다시금 떠올랐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것만 같은 고통….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어쩔 수 없었어요, 눈앞에서 그대가 쓰러졌는데!”

“그럼 그대가 정말로 죽었다면요?”

어쩔 수 없었다는 내 말에 칼라일은 내 손을 꽉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요?”

칼라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대가 죽으면, 나는….”

그는 말을 마저 다 잇지 못했다.

칼라일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의 얼굴이 안개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겹쳐졌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겨우 찾은 희망마저 다 사라졌던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분명 화를 내고 있는 표정인데도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다쳐도 함부로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해줘요.”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렇게 직접 칼라일을 마주하자, 도저히 안아주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았다. 좋아했던 샤를로테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동생 카렐리아마저 잃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의지로 샤를로테를 죽이려고 시도하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샤를로테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칼에 찔렸다.

처음 만났을 당시 도와달라며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칼라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로젤리아님, 왜 그래요? 설마, 아직 아픈 것입니까? 어디가 아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샤를로테가 마법까지 걸며 속삭인 말은 저주였다. 칼라일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주기 위한 저주,

샤를로테, 네가 말했지. 칼라일이 날 이용하고 있다고.

설령 칼라일이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네 탓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트린 샤를로테, 네가 원인이라고.

“칼라일.”

“네?”

“그대는 내 정부에요. 그러니, 내 사람이죠. 내가 아끼는 사람.”

그의 손목을 쓸자 수갑이 나타났다. 칼라일의 손목을 휘감고 있던 마력이 더 짙고, 넓게 퍼져있었다. 마법을 쓸 때마다 독에 중독된 듯 퍼지던 푸른빛 마력.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막고자 쓴 마법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아니면 나를, 치료하다가?

“칼라일은, 날 배신해도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말의 뜻은 단순했다. 칼라일이 나를 설령 샤를로테에게 복수하는 체스말로 사용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설령 배신하더라도, 미워하는 대상이 그대가 아닐 겁니다.”

칼라일은 금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칼라일을 말을 더듬거리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어떻게 그대를 배신하겠습니까. 혹시 내가 다그쳐서 화난 것입니까?”

“그럴 리가. 화나지 않았어요.”

그의 시선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내 말에 안도하는 모습조차 불안해보였다.

칼라일의 기억을 보았다고, 말해야 하나? 기억을 봤다고 하면 싫어할까. 세실리아의 파티 때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을 보면, 기억자체가 고통스럽거나 내게 말하기 싫어서 그런 것 같아 보이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를 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반짝이는 돌에 시선을 두었다. 칼라일도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칼라일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돌을 주워 그대로 부숴버렸다. 부서진 돌은 연기가 되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칼라일이 나를 끌어안기 전에 주웠던 깨진 돌을 소매 안쪽에 넣어 숨겼다.

“혹시 여기서, 뭔가를 보았나요?”

“무엇을 말이죠?”

“아무거나…뭔가 안개라던가. 연기라던가.”

내가 그의 과거를 보았을까봐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왜? 나에게 굳이 숨겨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왜 그래요, 칼라일?”

나는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면서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찜찜한 기색을 숨기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을 보았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 봤다면, 되었습니다.”

“왜요? 내가 보면 안 될 게 이 방에 있나요?”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튼…치유마법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빨리요.”

아예 화제를 바꿔버렸다.

섣부른 판단일 지도 모르지만 칼라일은 아마 나를 이용해 샤를로테에게 복수하려는 게 맞을 가능성이 컸다. 칼라일이 말한 연기나 안개는 분명 그의 기억을 보는 매개체를 의미하는 것일 테고, 뭔가를 봤냐고 묻는 내내 그는 불안해했다. 내가 배신해도 좋다는 말에, 눈에 띄게 동요했고.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동요는커녕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색한 웃음을 지었겠지. 배신이라는 말에 당황스러워 했을 거야.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이제 돌아가요. 로젤리아님.”

“어디로요?”

“집으로 가야죠.”

아, 그래. 무도회장.

나는 여기에 어떻게 온 거지? 분명 칼라일도 쓰러졌는데?

“내가 쓰러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깨어났을 때 로젤리아님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 계셨습니다. 궁의가 와서 로젤리아님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마법을 쓴 영향 때문인지 도저히 궁의의 실력으로는 치료가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칼라일은 한 손에 등불을 쥐고, 다른 한 손은 내게 뻗었다.

그의 손을 잡자마자 누가 내 등을 떠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로 돌았지만 방을 나오자마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치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 마냥, 가시덤불이 문을 뒤덮기 시작했고, 까만 이끼가 문고리를 완전히 뒤덮었다.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잠시 그 느낌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문제는 난리가 났을 무도회장 이었다.

어떤 상황일지 떠올리려니 머리가 다 아팠다. 어떻게 수습하지?

궁의가 치료하려고 해도 치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칼라일은 분명 나를 치료하려 했을 텐데. 치유 마법을 썼겠지…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넓은 등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칼라일은 내가 다치지 않게 천천히 팔을 잡고 계단에서 내려오도록 도와주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가 어쩐지 비명처럼 느껴져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치유마법을 써서 치료했음에도 아직 몸이 아팠다.

그때 거실 벽면에 걸려있는 초상화에 시선이 닿았다.

안개 속에서의 칼라일은 분명 버려진 저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버려진 저택이라기에는 천장과 복도에 꾸며진 조각품들이나, 벽지, 카펫 등, 꽤나 고급품이었다.

이런 저택이 버려졌다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칼라일이 잠시 머물면서 꾸민 것인가? 버려졌다 해도 초상화를 이렇게 두고 가나? 그리고 초상화에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여기는 로젤리아님과 만나기 전에 머물던 저택입니다. 버려진 저택인데,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용인이 없었습니다.”

“불법 침입에 노숙이군요.”

“자, 잠시 빌리는 목적이었습니다. 혹시 몰라 깨끗하게 사용했고요.”

나는 장난이에요, 라고 속삭이며 먼지가 낀 초상화를 쓸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아른거리는 불꽃이 보였다.

불꽃?

걸음을 멈추고 창가로 가까이 다가서자 마차와 기사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음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아직 검었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야?

“칼라일, 밖에 기사들이 있어요.”

“네? 잠시만요. 어…황실 기사들 같은데요.”

황실 기사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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