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어디선가 불꽃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누군가 눈을 세게 압박하는 것처럼 뜨겁고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마다 바늘을 삼킨 것 마냥 목도 너무 아팠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낮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난로에 불을 붙였음에도 냉기가 감도는 방,
뭐야? 여기가 어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분명 나는 쓰러졌었다. 눈과 입에서 피를 흘리고 생경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로 다가갔다.
드레스가 새 드레스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치마 위로 흩뿌려진 피자국은 없었다.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겨져 있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칼라일…!”
그러고 보니 칼라일은?
샹들리에 밑에 깔려 온몸에 유리조각이 박혔던 모습이 눈앞으로 스쳤다.
그래. 칼라일이 샹들리에 밑에 깔리고, 내가 치유마법을 썼었어. 마법이 성공했나? 치료가 된 건가? 치유 마법이 통한 건가? 상처가 낫는 것을 분명 봤어. 그 후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나는 벽을 짚으며 고르게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숨을 쉴 때마다 바늘이 목을 쿡쿡 찔러오는 듯했다.
온몸에 금이 가고 부서진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심호흡을 한 뒤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벽, 짙은 남색 천장.
천장 한가운데에 박힌 오래되고 섬세한 초승달 조각품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별자리 같은 자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천천히 손을 벽에 짚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복도 벽에는 작은 등불이 걸려있었다.
등불을 들고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나긴 어둠뿐이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맞는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등불로 겨우 빛을 비추며 걸어갔다.
그러다 내 걸음이 멈춘 곳은 복도 끝이었다. 복도 끝에는 두꺼운 넝쿨로 뒤덮인 문이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당기자 벽 틈에 끼어있는 이끼 같은 것들이 죽은 애벌레 시체 마냥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을 열자 비릿한 피 냄새 같은 역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방은 무슨 방인지,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희뿌연 안개가 보였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인영이 반짝이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흐릿한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게 뭐지? 집 안에 이렇게 안개가 있을 수 있나?
‘안개가 아닌 건가?’
안개 속으로 손을 넣자 머릿속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 나 더는 여기에 못 있겠어, 언제까지 여기에 더 있어야 해?’
‘그 얘기는 끝났잖아, 여기에 머물겠다고,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기에는 카렐리아도 아프잖아. 움직일 수가 없어.’
안개 속으로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갔다.
목소리가 점점 뚜렷해졌다. 그리고 강한 바람과 함께 안개는 사라지고 주변이 밝아졌다. 아까 내가 깨어난 방이었다. 하지만 냉기가 가득하고 쓸쓸한 기운이 감돌 때와는 달리 햇살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와 더불어 바닥에는 붉은색의 카펫과 두 사람이 충분히 누울 만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샤를로테와 칼라일이 다투고 있었다.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나갈 거야.’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샤를로테.’
뭐지? 나는 안 보이는 것인가? 이게 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뻗자 내 손은 그대로 통과되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나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어디로 갈 건데? 힘들겠지만 한동안은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가면서 지내자고 말했잖아. 우리와 같은 피난민들을 들어오지 못 하게 제한한다는 공고를 봤어. 피난민을 발견즉시 내쫓는다고 했고. 그러니 불편하겠지만 집 안에만 있어줘.’
‘벌써 한 달 째야! 마법으로 모습 바꿔가면서 지내는 거 싫다고! 네 마법은 제한이 있잖아, 고작 몇 시간이면 풀려버리잖아, 그럼 어딜 가지도 못해!’
‘이 상황에 돌아다닐 생각을 하는 거야? 이렇게 빈 저택을 찾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다 샤를로테는 얼굴에 잔뜩 붉어진 채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칼라일은 샤를로테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짚은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피난민 제한 공고가 들려있었다.
안케도니아 제국이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난민들이 레이몬드 제국에 물밀 듯 몰려왔었다. 나름대로 그들을 수용하려 했지만 제국민들과 피난민들의 갈등이 심해지고, 사고가 잇달아 벌어지자 피난민들의 입국을 제한했었다.
그때가 아마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당하고 한 달하고도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샤를로테가 페르소나가 타고 있던 마차에 부딪히면서 마차 사고가 벌어진 날이기도 했다.
한 달 째 모습을 바꿔서 지내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이 저택에 머물려고 했다는 것인가?
그때 누군가 콜록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빠….’
작은 소녀, 칼라일과 무척 닮은 소녀. 기침하는 모습이 꽤 힘들어 보였다. 소녀는 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칼라일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오빠, 샤를로테 언니 왜 그래…? 또 싸운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빠가 잘못해서, 그래서 샤를로테가 화가 났나 봐. 몸은 어때? 괜찮아? 예쁜 우리 카렐리아.’
저 애가 카렐리아. 칼라일의 하나 뿐인 여동생. 도망치던 와중에 놓쳤다던 여동생.
‘오빠가 계속 치료해주는데도 자꾸 아프네, 이걸 어떡하지. 미안해, 카렐리아.’
‘우응, 괜찮아. 오빠가 그랬잖아- 치유 마법은 마력을 계속 전달해주는 방식의 마법이라고, 마력 다 쓰면 수명을 써야 해서 몸에 무리가 간다고.’
‘똑똑하네. 공부 열심히 헸구나? 괜찮아. 오빠가 마력은 많아서, 너 치료해주고도 남아. 어서 쉬자. 다시 자. 아직 새벽이니까.’
카렐리아를 안아든 칼라일은 그대로 침대에 눕고는 자신의 동생을 세게 끌어안았다.
‘오빠.’
‘응?’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아마도 그럴 거야. 모습은 바꾸면 되고. 돈은 어떻게든 벌면 되는 일이니까. 계속 움직이느라 피곤했지? 빈 저택을 찾아서 다행이야. 앞으로 여기서 계속 지내는 거야.’
칼라일은 천천히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 힘들어 보여.’
‘안 힘들어, 힘들 리가 없잖아. 여기서 가장 힘든 건 샤를로테일 거야. 약혼자면서 제대로 해준 게 없으니까. 밖의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제대로 약혼자 역할을 할 거야. 그래야지. 그래야 해.’
카렐리아는 칼라일의 토닥임을 받더니 이내 조용히 잠들었다. 로젤리아는 칼라일이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 아이가 카렐리아구나, 칼라일이 정부가 되면서까지 찾고 싶어 했던 동생.
칼라일도 피곤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카렐리아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나도 모르게 칼라일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이 통과해버렸다.
안개 속으로 들어오니까 보이는 이 장면들,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책상을 살피자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들이 보였다. 이상한 마법 술식과 약초 같은 풀, 그리고, 일기인가?
“제국력 1075년, 10월 15일…?”
숨이 턱 막혔다. 이 날짜,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다.
오늘이었다.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만나는 날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자 또다시 장소가 바뀌었다. 일기장에 적인 날짜도 바뀌어져 있었다. 두 달이나 지나있었다. 12월 15일. 일기에 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마법 유지 시간 늘리기’ ‘마력석 복용으로 유지’ ‘정원사’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금빛 머리카락이 아닌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색은 달랐지만 분명히 칼라일이었다.
칼라일은 입을 틀어막은 채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4시간 이상은 무리인 건가….’
루치아노가 모습을 바꿨던 것처럼 칼라일도 모습을 바꾸고 있었던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모습을 바꾸고 정원사로 일한 것인가? 마법 유지 시간을 늘리려고 계속 노력했구나. 칼라일은 피곤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있던 병을 들었다. 병 안에 담겨있던 마력석을 꺼내 삼켰다.
‘돈은 어느 정도 모였고, 피난민 제한도 풀렸어. 슬슬 이 생활에도 적응했으니까 저택에 마법을 걸어놓은 상태에서….’
그대로 침대로 가 쓰러지듯 누운 칼라일은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생각할 게 많은 것처럼 보였다. 칼라일은 팔로 눈을 꾹 누른 채 자꾸만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붉었다. 열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어나서 약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듣다보니 한 노부부 귀족의 정원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 이 시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정원을 두고 가꾸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칼라일은 운이 좋았어, 라며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그 뒤로도 장소는 계속 바뀌었다.
칼라일은 일을 하면서도 카렐리아를 돌보았고,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그의 부모님과 보냈다. 칼라일의 부모님 두 분 다 치료 마법 쪽에 능통했다. 카렐리아가 아팠기 때문인지, 부모님들도 모습을 바꾼 채 방문 의사로 일했다.
그렇게 몇 달이 또 지났다. 전체적으로 칼라일의 가족은 이 생활에 충분히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카렐리아, 잘 쉬고 있었어?’
‘응, 오빠. 오늘은 어머니랑 아버지 앞에서 노래 부르고, 으응, 마법도 배우고, 오늘은 콜록콜록을 덜 했어!’
바닥에 놓인 책 더미 사이에서 고개만 내민 카렐리아가 귀엽게 웃었다. 칼라일의 손에는 약초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아무래도 상단에서 사는 것보다는 숲에서 가져오는 게 더 낫네.’
‘오빠, 또 마법으로 이동한 거야? 어머니가 막 그렇게 이동하면 마력 소모 심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오빠도 아프고!’
‘괜찮아, 카렐리아는 얼른 나을 생각만 해. 나보다 몸도 약하면서. 오빠 다시 나가봐야 해.’
‘또? 샤를로테 언니 찾으러 나가는 거야?’
‘응, 잘 기다리면 쿠키 구워줄게. 알았지?’
그 뒤로 샤를로테를 계속 찾아다녔나?
일기장의 날짜는 또 바뀌어져 있었다. 이 날짜는…내가 페르소나에게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칼라일은 로브를 입은 채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로브, 내가 칼라일과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것과 비슷한데?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등 뒤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밑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카렐리아가 놀라 몸을 움츠리고, 칼라일은 벌떡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칼라일 부모님의 비명이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그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칼라일의 부모님이 목에 검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