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눈과 입에서 흐르는 피
얼굴의 열을 식히는 데 혀가 욱신거렸다. 옷소매로 입을 막자 혀에서 피가 묻어났다.
맞다. 샤를로테의 마법에 걸렸었지. 벗어나려고 혀를 깨물었고.
샤를로테가 씌운 이상한 마법 때문인지 아니면 혀의 고통 때문인지 아까부터 온몸이 욱신거렸다. 차가운 음료를 마신다거나 얼음주머니 같은 것을 머리에 대고 싶었다.
“로젤리아님?”
“난 괜찮아요.”
내 안색이 나빠지기라도 했는지 칼라일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이마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다시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칼라일의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칼라일을 보며 살짝 웃다가 살갗 위로 퍼지는 차가운 기운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칼라일의 손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문득, 서리덩쿨이 떠올랐다. 북쪽에 위치한 피에르 왕국에서만 자라난다는 서리덩쿨. 사절단 대표로 갔다가 그 넝쿨을 본 적이 있었다. 만졌을 때 정말 차갑던데, 그것을 마법으로 만들 수 있을까.
새하얗고 투명한, 손으로 만지면 부서질 것 같지만 생각보다 무척 단단하고 차가운….
“로젤리아님!”
멍하니 서리덩쿨이 자라나는 모습을 생각했다. 손 위로 뿌리내려 온몸을 뒤덮는 쪽으로 생각이 퍼지는 순간, 갑자기 칼라일이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번뜩이는 정신과 함께 얼어붙은 내 손이 보였다. 손등 위로 퍼진 꽃 모양의 서리, 손가락이 얼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칼라일이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여주며 다그쳤다.
“마법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미안해요. 머리가 뜨거운 것 같아서.”
“머리가 뜨겁다고 해서 함부로 마법을….”
그런데 방금 내가 마법을 사용한 것인가? 나는 단지 서리 넝쿨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뿐이었는데.
“어떻게 사용한 것입니까?”
“나도 몰라요. 어떻게 사용한 것인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마력의 흐름이…몸이 뜨겁지 않으십니까? 욱신거린다 거나.”
어쩐지 대답할 힘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일이 내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의 눈가가 아주 살짝 붉게 변했다.
“마법사와 만났어요?”
“…마법사와 만난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갑작스럽게 마력에 노출되면, 이렇게 열이 날 때도 있습니다.”
샤를로테의 마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로젤리아님이 제게 해주신 말로는, 이 제국의 마법사가 없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누구를 만나신 거죠?”
아무리 봐도 마력 노출로 인한 열인데, 칼라일이 작게 중얼거리며 내 뺨을 쓰다듬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
“….”
“샤를로테가 그런 겁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칼라일이 내 손목을 잡고 소리쳤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세게 잡은 탓에 손목 부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진정해요, 칼라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샤를로테가 또 뭐라고 했어요? 로젤리아님, 샤를로테와는 마주하려 하지 마세요, 그냥…!”
분명 내가 걱정되어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데, 자꾸만 칼라일과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겹쳐져서 들려왔다.
‘칼라일은 다정하지 않아.’
‘아니야.’
‘너를 이용하기 위해 다정한 척 하는 것뿐이야.’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쳐냈다.
“머리 울리니까 그만해요.”
“!”
“왜 나에게 화를 내죠? 잘못한 사람은 샤를로테일 텐데.”
차가운 말을 내뱉은 순간, 샤를로테에 대한 원망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게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게 아닌데….
샤를로테가 심어놓은 의심을 떨쳐내고 싶어도 쉽게 떼어놓을 수 없었다. 칼라일이 정말 나를 이용했을까, 그 물음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난 지 얼마 되었지 않았음에도 나는 어느새 칼라일을 내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릴리처럼 아껴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애정을 주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믿음도 실상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믿고 싶은 것이겠지.
그런데 지금 그 믿음에 금이 가고 있었다. 분명 샤를로테의 마법 때문이야, 그래서 이런 걸 거야. 그러나 한번 금이 간 믿음은 막을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갈라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 로젤리아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 흔들리는 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떨고 있으면서도 나를 향한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등 위로 작은 마법진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머리의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머리가 맑아졌어.’
통증이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이게 칼라일이 말한 치유 마법인가? 칼라일의 손등에 그려진 마법진을 들여다본 순간, 작은 물방울이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칼라일?”
“화내려고 하던 게 아니었습니다. 소리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에서 떨림이 묻어났다.
“화낸 게 아니에요. 샤를로테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 너무 속상했습니다.”
차라리 서럽게 울면 좋을 텐데. 억지로 눈물을 참는 것이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칼라일의 뺨을 잡고 들어올렸다.
분명 의심이 생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칼라일에게 짜증을 피울 건 아니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첩보 가지고 이렇게 날카롭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울지 말아요. 그대 때문이 아니라 샤를로테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나야말로 미안해요.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축축해진 눈가를 문지르는 칼라일의 뺨에 자그마한 상처가 생겼다. 그의 소매에 달린 단추에 긁힌 것이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뺨을 꾹꾹 눌러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칼라일이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이내 울먹이는 얼굴로 말했다.
“진짜 화난 거, 아니죠?”
“그럼요, 칼라일.”
샤를로테의 말이 진짜라면 이게 연기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은빛 눈동자가 젖어 살짝 빛났다. 너무 예쁜 눈동자인데 순전히 거짓이라는 가능성을 심어둔 샤를로테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돌아가면 안 되나요, 로젤리아님?”
“돌아가고 싶어요?”
“…로젤리아님이 아픈 게 싫습니다. 지금 잠시 치유 마법을 걸어두어서 괜찮은 것이니, 집에 가서 다시 제대로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돌아가면 안 되나요? 그대가 황제 놈이랑 샤를로테와 마주치는 것도 너무 싫습니다.”
칼라일은 그대로 내 품에 안겨 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아이 달래듯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돌아가요. 무도회에 너무 오래 있었어요. 일단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죠.”
일단 돌아가더라도 릴리에게 말은 하고 가야했다.
내가 사라진 것을 알면 릴리는 나를 찾으러 무도회장을 이리저리 찾아다닐게 뻔했다. 돌아간 것을 알아차리면 춤을 추다가도 곧바로 집으로 오겠지. 오늘만큼은 편히 놀다 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들어서자 음악이 바뀌어 있었다. 약간 빠른 템포의 음악으로. 귀족들이 각자 파트너 손을 잡고 화려한 스텝을 밟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로웬과 릴리도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릴리를 부르려던 순간 단상 위의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공허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강한 소리가 들렸다.
끼긱, 거리는 소리가 심해지더니 한순간 페르소나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내 등을 세게 밀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뭐지? 내 뒤에 있던 사람은 칼라일뿐이었는데.
내 등을 밀친 강한 힘 때문에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 순간 큰 유리가 갈라지며 깨지는 소리가 무도회장을 가득 메웠다.
춤이 멈췄다. 음악 대신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릴리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지만, 부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피가 흘렀다.
샹들리에가 칼라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칼라일은 샹들리에가 떨어지기 바로 직전, 나를 저 대신 밀치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샹들리에에 깔린 칼라일의 복부에 뽀족한 유리 공예가 박혀있었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지, 머리도 찢어진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칼라일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희뿌연 빛이 떠오르더니 푸른 연기에 둘러싸인 채 힘없이 떠다니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건 마법을 쓸 때 나타나는 빛인데.
왜 마법을 쓰지 않은 거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수갑을 떼어내기는 했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 거예요. 수갑만 떼어냈고 칼라일님의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은 아직 풀지 못했어요.’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마법으로 막지 못하니까 나를 밀치고 혼자 샹들리에에 깔린 거야.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샹들리에가 떨어지기 바로 직전 웃고 있던 페르소나. 그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미리 손을 써둔 것인가? 일부러?
“의사, 의사를 데려와!”
칼라일에게 다가가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유리조각이 다리를 찔렀지만 고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누군가와,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무너진 샹들리에를 들어 올리려 하는 로웬까지, 모든 것들이 흐릿했다.
그 순간 또렷하게 보인 것은 내 손등에 남아있는 흰색 마법진 하나였다.
‘치유 마법.’
나는 다급하게 칼라일의 손을 잡았다. 머릿속으로 칼라일의 상처가 낫는 모습을 그렸다.
그의 손등에 떠올랐던 마법진을 머릿속으로 마구 그렸다. 이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간절하게 붙잡고, 정원에서 무수히 많은 꽃을 피워냈던 것처럼, 한 번만 더 기적적으로 마법이 발동되기를 빌었다.
“제발, 제발….”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는 몇 마리의 나비가 손끝에 앉아있었다. 놀라 숨을 멈추자, 나비들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칼라일이 마력이라 불렀던 그 빛과 비슷한 색의 나비. 나비는 내 주변을 날아다니다, 칼라일의 상처 쪽으로 날아가 앉았다.
나비가 상처에 닿자 얼음이 녹듯 스며들더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통했다. 이번에도 마법이 통한 거야!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어지럽지.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더니 가슴 안쪽에서부터 울컥 쏟아져 나왔다.
피였다.
눈과 입에서 흐르는 피.
온몸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칼라일의 손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다가 귓가에서 멀어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눈을 한번 깜빡인 순간,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