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말한 대로 샤를로테가 정말로 권력을 원했다면, 정부의 자리에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나를 먼저 공격하는 데 중심을 뒀을 것이다.
샤를로테의 신분에 대하여 말이 많았을 당시, 누군가는 샤를로테를 잃어버린 딸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아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샤를로테 쌍둥이 동생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다 보니 뭐하나 걸리라는 식으로 입을 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칼라일이 ‘샤를로테가 내 약혼자다.’라고 말한다한들 누가 그걸 믿었을까. 또 헛소리 한다면서 아주 잠깐 관심을 줬다가 말했을 텐데. 그리고 샤를로테는 부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거나, 황후라는 신분에 취해 제멋대로 구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그녀가 정말로 권력을 원했다면. 칼라일을 제거할 게 아니라 세력을 다지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내 귀에는 샤를로테의 말이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샤를로테의 얼굴은 웃는 낯을 한 채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쨌든 나는 황후의 자리에 앉았어. 곧 정식 황후가 되기 위해 결혼식을 올리겠지.”
“그래. 그리고 나는 대공의 자리에 앉았고.”
“앉으면 뭐하지? 바로 눈앞에 너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칼라일이 나를 이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또 그 소리다. 칼라일이 나를 이용한다고?
이간질을 하는 것도 정도껏이었다.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이를 갈며 말했다.
“칼라일이 왜 네 정부로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해?”
그 순간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숨을 제대로 쉬려고 해도 쉬어지지 않았다. 몸이 쇠사슬을 채운 것 마냥 움직여지지 않았다.
“걔가 정말 너한테 고마워 할 것 같아? 네가 칼라일을 정부라고 말한 순간부터, 그는 네가 기회처럼 느껴졌을 걸?”
“함부로 입 놀리지 마, 샤를로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술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네 말대로 나는 칼라일의 부모님을 죽였어. 위협도 했지. 게다가 약혼자였어, 5년 동안이나. 칼라일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나 그는, 단 한 번에 내게 배신당했지. 그런데 그저 가만히 살아간다고? 말이 안 되잖아.”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뱀이 목 근처를 기어오르는 찬 기운에 가까이 다가오는 샤를로테를 밀쳐내고 싶은데 난 그러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황후잖아. 그렇지? 그러니 내게 복수하지 못하는 거고. 그리고 그 복수를 위해 너를 이용하는 거야.”
샤를로테는 죽일 듯 노려보는 나를 향해 작게 미소지었다.
샤를로테는 내 이마를 툭, 그녀의 검지와 중지로 살짝 쳤다. 무시하듯.
머리가 울렸다. 망치로 뒷머리를 두드리듯 얼얼한 고통이 몰려왔다.
“말도 안 돼. 나를 이용한다고? 칼라일이? 어디서 거짓말이야.”
“너는 나에게 원한이 있어. 안 그래? 나를 싫어하잖아. 칼라일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너를 이용해 복수하면 좀 더 쉬워지겠지. 나중에 덮어씌우는 것도 쉬울 테고. 끝끝내 샤를로테를 시기한 전 황후 로젤리아!”
믿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자꾸만 샤를로테의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분명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칼라일이 내 옆에 남은 것이, 정부가 된 이유가 다 샤를로테의 복수 때문이라고? 샤를로테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샤를로테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었다.
거짓말을 그렇게나 잘하는 샤를로테가 나에게 무슨 거짓말을 못 할까.
하지만 자꾸 눈앞으로 칼라일이 자신을 정부로 들여 달라 부탁했던 모습이 그려졌다. 그 모습이 점점 왜곡된 상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칼라일은 동생을 찾기 위해 정부가 된 거야. 샤를로테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어.
하지만…만약 샤를로테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로지 샤를로테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 앞에서 연기한 거라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장 터질 듯이 가빠르게 뛰는데, 차갑게 얼어붙는 것처럼 아팠다.
애초에 마법 실력까지 출중한 그가 왜? 나를 이용할 거였다면 루치아노처럼 마법을 써서 이용했겠지. 굳이 연기까지 해가면서 이용할 필요가 없잖아.
-마력은 많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탓인지 마법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해요.
귀가 얼어붙는 것 같다.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자꾸 아플 정도의 차가운 감각이 끈적이듯 달라붙었다.
샤를로테의 말에 거짓이 얼마나 섞여있을까, 아니지. 전부 거짓말일 텐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어째서 저 말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걸까.
“칼라일은 널 이용했어. 네가 칼라일을 구해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네가 본 모습은 모두 가짜야. 칼라일은 다정하지 않아. 널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야.”
…그럼 칼라일이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황후의 자리는 나에게 너무 작은 자리라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게 모두 거짓이라고?
그때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흐릿한 시야 사이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샤를로테가 보였다. 마법을 쓰고 아파하는 칼라일처럼 심장 부근을 움켜쥐다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샤를로테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빛났다. 금빛이 아닌, 푸른빛으로.
그러나 지금 샤를로테가 푸른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 푸른빛, 칼라일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그 마력과 똑같은 색.
어느 샌가 장막이 나와 샤를로테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내뱉듯 샤를로테의 말에 긍정했다.
샤를로테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면 칼라일은 꽤나 숨기는 듯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 특히 이혼 재판을 준비하는 그 시간, 루치아노를 만나고 며칠간은 거리를 두는 행동을 했었다. 일부러 피한다고 해야 할지. 멍하니 있다가 말을 걸면 깜짝 놀라고 몸을 움츠러트리기도 했다.
시선을 자꾸 피한다 거나 내 손을 멍하게 만지작거린다거나.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숨기는 티가 역력했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루치아노와 다시 만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루치아노가 나와 릴리를 공격한 것 때문에 미안해했으니까.
명백한 거리두기였는데도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떠오른 건데…칼라일은 로웬을 왜 그런 눈으로 봤을까.
왜 원수를 보는 눈으로 본 거지?
불안함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한 가지가 떠오르자 다른 것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칼라일이 정말 나를 이용하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칼라일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라면, 루치아노도 나를 거짓으로 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억들이 전부 샤를로테 한 명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뤄진 일이라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칼라일을 마주해야 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뭐가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딱 하나, 무엇이 진실이든 샤를로테가 논할 바가 아니라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사실이니 거짓말이니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나는 손을 겨우 움직여 샤를로테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있는 힘껏 혀를 콱 물자,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던 모든 목소리가 사라졌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돌았지만 상관없었다.
샤를로테의 푸른색과 벌꿀색이 뒤섞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런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다.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가 붉게 변했을 때. 그때가 마법을 쓸 때였지. 샤를로테가 내게 마법을 쓰고 있다.
“날 얼마나 우습게 아는지 모르겠네.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았어? 제 신분까지 거짓으로 속이고 나를 위협한 네 말을?”
“정말 제대로 속고 있구나? 언젠가 알게 될 걸? 칼라일이 한 행동이 모두 거짓이라고!”
“아니. 그럴 리 없어.”
혀가 욱신거렸지만 머릿속은 깨끗해졌다.
샤를로테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내가 칼라일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마법을 써서 그런 지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떤 게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샤를로테가 그에 대해 논할 자격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와 반대로 불규칙적이던 숨이 점점 안정적으로 변했다. 손의 떨림은 여전히 심해졌지만 점차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샤를로테와 말을 섞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으면 되었을 텐데.
그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장막이 사라졌다. 샤를로테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잠잠해졌다.
복도 저 끝에서 하녀들 두세 명이 무리지어 오고 있었다. 샤를로테와 내가 싸우고 있던 것을 보면 또 어떤 말이 나올지.
“너는 칼라일에게 속고 있어.”
샤를로테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네 말대로 내가 칼라일에게 속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
“….”
“그래도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속는 게 훨씬 나아.”
복도를 빠져나오는 내내 귀가 먹먹했다.
***
피곤했다. 복도를 빠져나오면서 많은 귀족들과 귀부인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적으로 소모가 심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힘들었다.
무도회장은 춤을 추느라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칼라일은 없었다. 밖으로 나간 것인가? 무도회장을 나와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테라스에도 아무도 없었다.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뒤로 돌려는데 테라스 문이 닫혔다.
문을 닫은 사람은 칼라일이었다.
칼라일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칼라일을 찾아다니는 내내 심란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칼라일은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사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로젤리아님.”
“나야말로. 어디 가있었던 거예요?”
“계속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보여줄 것도 있어서요.”
“보여줄게 있다고요?
계속 웃고 있던 칼라일은 뭔가를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끈적거리지 않게 코팅한 설탕으로 만든 꽃이었다.
“마법으로 설탕을 만들어낼 수 있나요?”
“네? 설탕이요?”
“설탕 공예로 만든 꽃이네요.”
꽃잎 하나를 똑 떼어 먹자 칼라일이 눈을 크게 떴다.
설탕으로 만든 줄 내가 몰랐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먹고 있는 꽃잎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냥 선물로 갖다 준 것인가? 먹으면 안 되는 거였나?
나는 다른 꽃잎을 입에 문 채 멈췄다.
꽃잎을 뱉지도 못하고 칼라일을 빤히 보고 있자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꽃잎을 문 상태에서 멈춘 모습이 재미있는지 쿡쿡 웃으며 설탕 꽃을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말없이 칼라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탕 꽃을 그의 입에 넣어서 웃는 것을 멈추게 할까. 아니야, 그럼 깨져서 입안이 다 까질 텐데.
“귀여워요.”
“?”
“엄청 귀여워요. 진짜. 햄스터 같아.”
누가 누구보고 햄스터라고 하는 거야.
“아까 케이크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케이크 옆에 이 꽃이 놓여 있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로젤리아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설탕으로 만든 것 인줄 몰랐어요.”
하긴 자세히 보아야 설탕인 줄 알겠지.
나는 꽃을 칼라일에게 내밀었다. 한번 먹어보라는 의미였다. 설탕 꽃의 그 달콤함을 함께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칼라일의 얼굴이 붉었다. 잠시 주춤거리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왜 저러지? 나는 물고 있던 꽃잎을 떼려고 하는데 칼라일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피할 겨를도 없이 뭔가 물컹한 게 입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 입에 물고 있던 꽃잎을 먹으라는 게 아니었다. 다른 꽃잎을 먹어보라는 뜻이었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발끝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 돼. 붉어지지 마, 침착해. 나는 어떻게든 이 당황함을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얼굴빛이 내 머리카락 색과 똑같이 변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린 칼라일은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그, 죄송해요.”
“….”
“저는 그, 로젤리아님이 물고 있는 꽃잎을 먹으라는 줄 알고.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똑같이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바람이 부는 데도 너무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