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우스운 말.
황후 시절 무도회를 준비할 때 직접 기획도 하고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초대장을 작성하고 예산을 관리하고 무도회 때 필요한 물품 품목들을 결재하는 일 모두 내 일이었다.
때때로 페르소나와 마주 앉아 그의 일을 분담해서 작업하기도 했다. 군사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페르소나와 논의하고 검토했다. 샤를로테가 온 이후로는 그런 게 뚝 끊겼지만.
이 무도회장의 복도를 꾸미는 것 또한 전부 일일이 준비했다. 보통 무도회를 할 때 2년 단위로 전체적인 인테리어를 바꾸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째 그대로였다.
분명 지금이 2년째일 텐데. 왜 안 바꿨지? 아닌가, 과도하게 예산을 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머리를 식힐 겸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정원에는 아직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쪽을 돌아다녔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정확히는 목격했다.
“샤를로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저는 정말 몰랐어요. 가넷 가문이, 단지 황후를 많이 배출하는 가문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큰 공을 세운 가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샤를로테는 두 손을 모은 채 드레스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까 일 때문에 혼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역사서 표지만 들춰봐도 나오는 게 가넷 가문과 레이몬드 황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따로 뒷조사 할 생각은 못하는 걸까?
만약 내가 샤를로테였다면 어떻게든 흠이라도 잡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여 뒷조사를 지시했을 텐데.
복도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페르소나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때 로젤리아의 말을 믿어야 했는데, 가르치는 교사가 자주 바뀐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 다 너를 시기해서 한 말인 줄 알았다.”
샤를로테는 뒤늦게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해 듣고는 얼굴이 창백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저지른 일, 하마터면 황실이 위협당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현재의 가넷 가문 사람들, 특히 로젤리아가 큰 싸움을 좋아하지 않은 편이라 이리 넘어갔지, 그게 아니면 어쩔 뻔했느냐.”
“폐, 폐하….”
“변명이든 핑계든, 듣고 싶지 않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샤를로테.”
페르소나는 차갑게 명령하는 어투로 말하다 샤를로테를 두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손을 대면 깨질까, 부서져 버릴까, 페르소나는 샤를로테를 제 목숨처럼 아꼈다. 그러니 나는 페르소나가 샤를로테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위로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해야 했소?’ 이런 식으로, 모두 내 탓으로 돌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샤를로테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런데 샤를로테의 뺨이, 붉었다.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까 내가 뺨을 때린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붉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그때는 입술이 터지거나 하지 않았는데. 지금쯤이면 가라앉았어야 할 뺨이, 왜 저러지?
‘설마 페르소나가 때린 건가?’
나는 이상하게도 조용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때린 게 미안해서 그렇게 조용하게 화를 낸 거였나?
샤를로테는 뺨을 맞아도 시원찮은 일들을 계속 벌인 것은 맞았다, 뻔뻔한 태도를 일관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뺨을 때리는 사람이 페르소나인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도회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방관만 하던 사람이, 샤를로테가 일을 내기 전에 먼저 중재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고 나 몰라라 한 사람이, 그녀의 뺨을 때린다고?
우스웠다.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페르소나는 샤를로테가 사랑스럽고 누구에게나 애정을 쏟아 부어주는 모습이 좋다고 칭찬했었다. 본처 앞에서 정부의 좋은 점을 늘여놓는 것을 들으면서 참으로 지독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뺨을 때리다니. 조용히 화를 낸 게 아니라, 때린 게 미안해서 차마 성을 내지 않은 것인가? 설마 벌써 마음이 식은 것인가?
페르소나가 샤를로테를 두고 가버리자, 샤를로테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마구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쪽 손으로 뺨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 샤를로테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복도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내가 불쌍해?”
그 순간 뼛속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나를 덮쳐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 나와 샤를로테 주변을 에워쌌고 있었다. 하지만 에워싸기보다는 가둔 느낌이 더 강했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샤를로테의 눈이 점점 짙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그 순간, 샤를로테로부터 기이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마력이었다. 칼라일이 샤를로테와 싸우면서 했던 말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네게 미약한 마력이 흐른다는 것, 그 능력을 밝혀준 분이 우리 어머니야. 네가 황궁에서 무시 받지 않게끔 힘을 써주신 분은 우리 아버지라고!’
샤를로테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칼라일과 루치아노. 심지어 세실리아가 내게 선물로 준 마력석의 마력보다도 그 힘이 미약했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불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장막 같은 것은 마법인가?
“불쌍할 리가요. 다 자업자득이신걸요.”
“자업자득이라고?”
“그러게, 진즉에 공부하셨으면 좋으셨잖아요. 폐하께서 우수한 교사들을 붙여줬음에도 파티에 참석하고 다른 영애들과 노느라 시간을 허비하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쇠를 긁는 듯한 샤를로테의 목소리에 귀가 아팠다.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예법에 더 신경 써야 하신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는 것입니까? 황궁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변에 조언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나 봅니다.”
샤를로테의 얼굴이 기괴했다. 장막이 파도가 출렁이듯 흔들렸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점점 까맣게 변했다. 분위기는 침착했다. 감정을 숨기기는커녕 뚜렷하게 드러나던 전과 달리, 침착했지만 마치 짐승 같았다.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틈을 노리는 그런 짐승 같았다.
“조언해주는 사람이라, 그래. 네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넘쳐나나 보지?”
“….”
“나는 조언하는 사람이 없지, 마음을 터놓는 사람도 없어, 하지만 대놓고 이용당하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너도…나와 똑같다고 보는데.”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샤를로테는 싸하게 웃었다.
“칼라일은 너를 이용하고 있어.”
“….”
“너는 그걸 바보같이 못 알아차리고 있고.”
칼라일이 나를 이용하고 있다고? 내가 그걸 못 알아차리고 있어?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하마터면 ‘뭐?’라고 되물을 뻔했다.
샤를로테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침착한 게 아니라 반쯤 이성을 놓은 상태였다. 뺨을 맞은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인지, 샤를로테는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녹색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맞은 뺨은 부어올라 붉은 멍이 생겨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칼라일이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말로 이간질이라도 하실 셈이신가요? 이제 와서?”
낮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성이 나간 사람의 말을 굳이 믿을 필요 없었다. 게다가 칼라일과 좋지 않은 관계로 얽혀있지 않은가? 심지어 암살단까지 보낸 샤를로테가 칼라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숨쉬기보다 쉬울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칼라일이 당신 곁을 떠나가서 아쉽습니까? 하지만 안타깝습니다, 황후 폐하. 당신은 칼라일을 버렸잖습니까?”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번쩍이는 금색 눈동자를 보며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자면 샤를로테는 약혼자의 가족을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보냈다. 그리고 칼라일이 죽지 않고 나타나자 자신의 위협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울었고, 지금은 마력 제어 수갑에 이간질까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사람이 저렇게까지 악독할 수가 있을까.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죠?”
칼라일에게 그 일을 묻지 않았다. 세실리아의 파티가 열렸던 날. 샤를로테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으려 해도, 자꾸만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 탓에 묻지 못했다. 괴로운 기억에 짓눌려서 숨도 쉬지 못한 채 떨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모습을 봤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일부러 묻지 않았다. 내가 묻는다면 그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힘들었을까. 샤를로테는 남의 고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도대체 왜?
너로 인해 다친 사람을 보고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왜 칼라일의 부모님에게 암살단을 보냈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제 말에 대답부터 해주시죠, 황후 폐하. 왜 그러신 겁니까. 약혼자였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했던 사이 아닌가요? 왜 위협을 하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샤를로테는 내가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죄책감이나, 반성 따위의 얼굴이 아니라 내가 그 사실을 말해버릴까 걱정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 경계하는 눈빛.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래서 흔들리는 얼굴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입 밖으로 단어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물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습해지고, 속은 답답해졌다. 목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오른 숨 막히는 체감이었다.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뭐가 있겠어.”
“….”
“황제의 정부가 되었는데 약혼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안 되잖아? 내가 13황녀인 것을 까발리면 어떡하라고?”
“…지금 그걸 이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황후만큼은 아니지만 황제의 정부도 어느 정도 권력이 있지. 대귀족의 여식으로 살아와 누릴 거 다 누리고 산 너는 모를 거야. 13황녀가….”
샤를로테는 잠시 입을 꾹 다물다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사랑 대신 권력을 선택한 것뿐이야.”
“권력? 황제의 사랑을 받으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그 위치가 권력이라고?”
권력을 위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칼라일과 그의 부모님을 죽이 했다고? 진정한 권위도 힘도 아닌, 겨우 정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니. 너는 그냥 네가 차지한 위치, 정부라는 위치에 딸려오는 부속품들을 좋아했던 거야. 관심, 재산, 보석, 드레스. 안 그래? 네가 정말 권력이 탐이 났다면 칼라일이 아니라 나에게 암살단을 보냈겠지.”
사랑 대신 권력을 택했다는 말이 참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