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똑똑히 말했다.
“손찌검이라. 뺨 맞아본 건 로젤리아의 쿠키를 뺏어 먹었을 때밖에 없는데.”
로웬은 무덤덤하게 말을 뱉었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페르소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샤를로테의 팔을 강압적으로 당겼다.
지금 로웬의 뺨을 때린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로웬의 뺨을 때려?
로웬의 말에 틀린 게 있었나? 틀린 것은 없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오빠의 뺨을 때려?
이성을 차렸을 때는 나도 똑같이 샤를로테의 뺨을 때린 후였다.
“어딜 감히, 멸망한 제국의 황녀 따위가 내 오빠의 뺨을 때려.”
힘주어 때린 탓에 샤를로테는 고개가 돌아간 것도 모자라 비틀거렸다.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지. 멸망한 제국의 황녀는 노예가 되는 게 대부분인데 이렇게 운 좋게 황후 자리에 올라왔으면 적어도 최소한의 상식을 갖춰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지금 내 뺨을….”
“역사학 첫 줄에 나오는 내용이야, 레이몬드 황실은 내 가문 선조, 루드베릴의 공이 가장 컸다고! 그로 인해 하사받은 직급이 대공이며 가문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교환한 것이 황제의 자리다. 아직도 모르겠어? 레이몬드 황실이 아닌 가넷 황실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어찌 이리 함부로 행동하는 거지? 내가 더 어떻게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뺨을 때린 손이 얼얼했다. 나는 손을 감싼 채 넋이 나가있는 샤를로테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13황녀를 1황녀라고 속인 주제에 까부는 것도 적당히 해.”
그 순간 샤를로테의 눈이 칼라일을 향했다. 다 말했구나! 샤를로테가 등 뒤로 솟아오른 소름에 어깨를 떨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내 주변의 사람을 건드린다면 그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하겠다고.
나는 죄책감 따위 없는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저희는 무도회를 조용히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디, 황후 폐하의 경거망동한 행동을 붙잡아 주십시오.”
***
로젤리아는 황궁 뒷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페르소나와 샤를로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돌멩이 하나를 발로 퍽 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를 다스리려는 로젤리아의 눈치를 보던 로웬은 그 순간 칼라일과 눈을 마주쳤다.
칼라일이 로웬을 보는 표정은 차가웠다.
로웬은 로젤리아에게 지었던 것과 전혀 딴판인 표정에 헛웃음이 내뱉었다. 역시나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를 보고 지은 표정이 아니었군. 칼라일이라고 했나?
로웬이 인상을 쓴 채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벌린 순간, 또렷하지 않은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망쳐, 칼라일! 어서 숲속으로 뛰어!
소리를 지르며 이상한 마법을 쓰는 금색 머리의 노인과, 젊은 남자가 자신보다 어린 소녀를 안고 뛰는 모습.
“혹시.”
“…….”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나?”
칼라일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가만히 로웬의 붉은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것 참.”
“?”
“로젤리아님과 무척 닮으셨네요.”
“뭐?”
“이러면 당신을 볼 때마다 로젤리아님이 떠오를 텐데.”
문득 그 표정이 너무 슬프게 보여서 로웬은 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면 울음을 터트릴 눈동자로, 한편으로는 한껏 화가 난 듯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칼라일은 로웬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는 로젤리아가 있었다.
***
“로젤리아님, 칼라일님!”
화를 식히고 돌아오자 귀족들이 무도회장 한쪽에 북적하게 몰려있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릴리였다. 릴리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더니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 로젤리아님, 사람들이 갑자기 막 몰려들어요!”
릴리는 나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햄스터처럼 떨었다. 갑자기 시선이 몰려서 당황한 것이겠지.
“릴리, 너는 백작 가의 영애란다, 지위로만 보자면 기죽을 필요 없어.”
“하지만 한동안 시녀 일만을 계속 해왔잖아요, 그래서 뭔가……이렇게 귀족 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불편하단 말이에요.”
릴리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교계에 나갈 일이 많을 텐데 계속 이 상태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릴리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귀족 분들이 아닌, 귀족. 앞으로는 경어를 줄이도록 하렴. 그리고 오늘은 너의 데뷔탕트야.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고.”
릴리 마그렛트, 한때 대상단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그렛트의 백작의 막내딸. 지금의 거의 몰락한 상태이며 마그렛트 가의 마지막 남은 일원이 릴리였다. 한마디로 몰락 위기의 가문이지만 뭐가 되었든 릴리는 귀족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8년간 전속 시녀로 두기는 했지만 이렇게 귀족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게 어색할 지경에 이르렀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데뷔탕트를 치르게 하는 건데.
“릴리 양.”
“칼라일님, 세상에…꾸미니까 사람이 되었네요.”
“으음, 그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가요?”
“그렇게 잘생기지는 않았으니까요!”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자존감이 무척 강하시네요, 칼라일님.”
“그런 건 사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릴리가 칼라일과 사이좋게 투닥거리는 사이,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릴리에게 말을 걸려고 기다리는 귀족들이 보였다.
릴리 마그렛트는 사교계에서 꽤 유명했다.
어딜 가든 항상 데리고 다닌 것뿐만 아니라 친동생처럼 아꼈던 탓일까.
나는 썩 좋지 않은 기분에 혀를 찼다.
이번에 릴리가 데뷔탕트를 치르기 위해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파트너는 없는 상태로. 그러니 릴리의 파트너가 된다면 가넷 가문과의 연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어떻게든 내 가문과 연을 맺으려는 욕망들이 그대로 읽혔다. 본래 파트너를 미리 지정하고 오는 게 맞았다. 그러나 릴리에게 파트너가 없는 건 미리 진즉에 차단을 시킨 탓이었다.
릴리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면 여간 불편했다. 릴리에게는 정말 고르고 골라서, 릴리를 정말 아껴줄 사람만 붙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릴리에게 다가왔다.
“릴리 양. 오랜만입니다.”
“세상에, 로웬님, 돌아오신 건가요? 전혀 몰랐습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웬님이라니요, 그렇게 격식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로웬이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왜 저래? 로웬이 다른 귀족들을 모두 밀어내고는 가장 먼저 릴리에게 말을 걸었다. 한참을 뒤에서 머뭇거리던 이유가 릴리 때문이었나?
“피곤하실 텐데 어찌 무도회에 참석하셨어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그나저나 드디어 데뷔탕트를 치르시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칼라일이 내 곁으로 조용히 와 둘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았다.
“로젤리아님, 혹시 로웬 경이…?”
“안됩니다.”
“네?”
“어찌 우리 귀염둥이 깜찍이한테 저런 놈이, 저는 반대입니다.”
제 성격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놈에게 어떻게 릴리를 주겠어.
“로젤리아님. 일단 진정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릴리 아가씨는 파트너도 없지 않습니까? 로웬 경께서 해주시면…….”
“안돼요.”
“그럼 다른 귀족들은요?”
“….”
“로웬 경이 릴리 양의 파트너가 되어주신다면 다른 귀족들이 접근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긴 했다. 이상한 귀족을 옆에 붙여둘 바에야 차라리 로웬이 낫기는 했다.
분명 몇 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파트너가 없다면 저에게 릴리 양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로웬이 한쪽에 무릎을 꿇고 릴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지만 않았다면.
“아, 어, 어서 일어나세요!”
릴리가 당황하며 로웬의 손을 잡자,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허락해주시면 일어나겠습니다.”
“무도회에요, 사람들 많은데! 무릎 꿇지 마시고!”
“부디.”
“아, 으…네, 네 그럴게요. 저의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한참을 당황하던 릴리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하는 로웬을 보고는 살짝 홍조를 띄웠다.
로웬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가넷 가와의 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고 생각했는지, 모여들었던 무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보세요, 저런 사람들이 릴리 양의 파트너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니까요?”
“….”
“로젤리아님?”
“일단 한 대만 치고 보죠.”
정말 한 대 칠 생각이었다. 무도회에서 부끄럽게 뭐하는 짓이야. 릴리가 당황해했잖아!
하지만 칼라일이 뒤에서 다급하게 끌어안으며 말린 탓에 때리러 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로웬은 릴리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로웬은 떨리는 손으로 릴리의 허리를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혹시나 발을 밟을까 걱정하는 릴리와 달리 로웬은 능숙하게 릴리를 리드했다.
“전장에서 릴리 양의 생각만 했습니다.”
“네?”
“오늘 데뷔탕트를 치를 줄 알았다면 더 멋지게 입고 올 걸 그랬습니다.”
그 말에 릴리는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배시시, 웃으며 로웬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돌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로웬님께서 전장에 나가시는 동안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어요.”
“!”
“그리고 로웬님은 이미 충분히 멋지십니다, 언제나 완벽하신 분이니까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음악이 멈추고 마지막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발을 뒤로 뺀 채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야 했고, 여자는 양쪽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야 했다.
그 때문에 릴리는 이미 붉어질 때로 붉어져버린 로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