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진심이에요?
“진심이에요?”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진심이냐는 물음에 칼라일은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은빛 눈동자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이에요.”
“…….”
“이 말만큼은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일 거예요.”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고는 나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뛰는 심장은 점점 가파르고 빠르게,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고백 비슷한 말이었지? 고백이었던 건가?
페르소나는 고백은커녕 사랑한다는 말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어서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낯설었다.
나는 뒤늦게 붉어진 뺨을 붙잡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고백이 아닌가? 그냥 한 말인 건가? 안케도니아 제국에서는 이런 말이 일상인 거야?
“로젤리아님?”
“아, 어, 네?”
“…제가 너무 부담스럽게 말했나요? 저는 그냥, 그대가 좋다고 한 말이었어요.”
“칼, 라일. 취기가 아직 덜 빠진 것 같아요. 취했죠? 취한 거예요.”
“취기를 빌려, 한번 해본 말입니다. 딱 너무 좋은 상황이거든요. 지금 이 상황이, 더 나은 상황은 없고, 저는 정말 행복하니까…그래서 지금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취기에 빌려 말했든, 진심을 담아 말했든 일단 달래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칼라일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살짝 수줍은 얼굴로 나를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만약 페르소나가 이랬다면 찻잔을 머리에 내려쳤겠지.
지금이 싫지 않은 건 확실히 칼라일이 편해서일까,
아니면 나도 칼라일에게 마음이라도 품고 있어서 그런 건가? 칼라일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뭐가 되었든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건 확실한 듯했다. 포근하다. 따뜻하고, 뭔가 익숙한 느낌….
“로젤리아님.”
“왜요, 칼라일?”
“로젤리아님은, 나를 좋아하나요.”
우뚝, 손이 멈췄다.
당황해서 멈춘 건 아니었다.
울렁거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의 물음은 의문형이 아니었다.
등을 토닥이던 손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나를 좋아하나요?’ 가 아닌, ‘나를 좋아하나요.’라는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체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없이 다정하고 잔잔한 그 목소리에 억눌린 감정이 담겨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칼라일은 재촉하듯 되물으며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미세한 떨림이 등 뒤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 떨림이 긴장을 해서, 꼭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떨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페르소나,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황후 이상으로 생각한 적 있습니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칼라일을 꽈악, 끌어안았다. 귓가를 스치듯 지나간 그 한마디에 방금 전 느낀 울렁거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칼라일.”
“네?”
“혹시 지금 슬퍼요?”
칼라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입술을 꾹 물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한때는 샤를로테에게만 향하는 페르소나의 애정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딱 한 번, 물었다. 나를 황후 이상으로 생각한 적 있냐고. 하지만 너무 슬픈 나머지 읊조리듯 말했다.
“그럴 리가요….”
칼라일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슬플 리가 없잖아요, 그대와 함께 있는데.”
중얼거린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분명 슬퍼하는 목소리였는데.
“나는 그대가 슬퍼하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요?”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어쩐지 뭔가 억누르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차마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로젤리아님은 어쩐지 좋아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는 아름다워서 이런 말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나는 다른 귀족들에게는 물론 페르소나에게조차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했습니까?”
“으음, 없어요. 뭐, 듣고 싶지도 않았고요.”
칼라일은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부부 생활이었는데 좋아한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페르소나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건 그가 샤를로테를 데려온 후부터였다. 샤를로테를 향한 말, 그 말 속의 들어있는 ‘좋아한다’라는 단어. 페르소나는 어느 면에서 봐도 쓰레기였다.
“태어나기를 원래 모자라게 태어났군요.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지.”
“칼라일? 진정해요.”
“진정 못 해요! 어떻게 그대 같은 사람을 두고, 이혼한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정말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더니 심각하게 페르소나의 눈 상태에 대해 고민했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더니 내 손을 꼭 잡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젤리아님, 제가 앞으로 계속 말해줄게요.”
“뭘요?”
“좋아해요.”
잠깐만.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고?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해. 좋아해요. 로젤리아님이 너무 좋아요. 그대가 저를 좋아하지 않아도 저는 그대가 정말 좋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빨개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다가 손을 뻗어 칼라일의 입을 턱 막았다.
그만 해요! 그렇게 말한 순간 어깨너머로 장미 덤불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민 채 한편에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세, 세실리아 영애?”
“아, 아! 죄송해요! 둘만의 시간을 방해해서! 그, 전할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꽃도 가득 핀 분위기를 방해해서 정말 죄송해요!”
세실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쩐지 나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실리아는 붉어진 뺨을 식히려 마구 부채로 빠르게 부채질을 하면서 무도회장을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 지금 로웬 경께서 무도회에 오셨습니다. 경께서 아까부터 로젤리아님을 찾으셔서…….”
“로웬 경이?”
군사 지원을 나갔던 오빠가? 나는 곧바로 정원을 나와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로웬은 실력 좋은 기사단장이었다. 그만큼 여러 제국들의 전쟁과 군사적 지원을 나갔다.
이번에는 꽤 오래 걸렸다. 2년. 하지만 문제는 2년 만의 해후가 아니었다. 아직 로웬에게 이혼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가넷 가문은 황실에 맞먹는 권력을 쥐고 있지만 때때로 그 사실을 잊고 가볍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가넷 가에 의해 크게 다치지 않았던 이유는 가넷 사람들이 일 크게 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르빈 사건과 루레드 후작 때도 적당히 기만 눌러놓은 것도 다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냉정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나 로웬은 달랐다. 평소에는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차분했지만 가넷 가문을 건드리는 사람들은 보면 참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성격을 고려해 일부러 이혼 소식을 보내지 않았다. 나중에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빠, 아니, 로웬 경!”
무도회장 밖에서 단검을 만지고 있던 로웬을 보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혹시라도 난리를 필까 봐, 당장 황궁으로 쳐들어가 페르소나에게 주먹질을 할 것 같아서, 안 돼,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가넷 대공, 아니. 로젤리아.”
“로웬 경, 진정하고. 일단 내 말부터 들어요.”
“네가 대공이 된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황후의 일과 별개로 네가 똑똑하고 냉정하니, 대공의 일도 잘 해내리라 믿었던 탓이었다.”
차갑게 식은 로웬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그가 이미 이혼 소식을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대공이 된 이유가, 이혼 때문이었어?”
“로웬, 진정해요.”
“무도회를 오니 귀족들이 전부 내 눈치를 보더군. 심지어 폐하의 곁에 못 보던 여인이 있고. 들어보니, 네가 이혼을 했다고 하던데.”
“오늘 무도회입니다, 로웬 경. 오늘은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죠.”
“조용히 하라고?”
로웬는 말없이 단검의 칼날을 쿡쿡 만졌다.
“네가 내 동생의 정부인가?”
“로젤리아님, 이 분은?”
“내 오빠, 로웬 가넷이에요. 현재 황실 기사단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내가 이혼 소식을 말하지 않았어요. 오빠의 성격이 생각보다, 터프하거든요. 황제 얼굴에 주먹을 날릴지도 몰라요.”
“…기사, 단장이요?”
내 입에서 ‘기사단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칼라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이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본 듯한 표정에, 나도 당황하고 로웬도 적절히 당황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순간 드러난 원망 어린 표정, 살기. 칼라일의 그런 표정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적의였다.
로웬은 천천히 칼라일에게로 다가와 칼날이 겨누었다.
“방금 그 표정은 뭐지?”
“…….”
“내가 정부라고 지칭해서 화라도 난 건가? 우습군.”
그러나 칼라일은 눈앞에 드리워진 칼날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로웬의 뒤를 가리켰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닙니다. 다만, 저는 당신의 뒤에 있는 모습을 보고 살짝 얼굴을 굳혔을 뿐입니다.”
“뒤?”
칼라일이 가리킨 방향에는 뒤에는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호위를 두른 채 걷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아이를 가진 배를 쓰다듬고 있었고, 페르소나는 살짝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로웬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기사를 뒤로 물렸다.
“로웬 경.”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로웬은 어느 정도 예법을 갖추며 인사를 하고는 샤를로테에게 눈을 흘겼다.
“보고 받으셨다시피 군사적 지원은 무사히 끝냈습니다. 기사단은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렇군. 수고 많았네, 로웬 경.”
로웬이 인사를 생략하자 샤를로테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왜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죠?”
“….”
“지금 황후를 무시하는 건가요?”
“생각 중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황후 폐하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뭐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르고 난 뒤에 제 주먹이 황제에 뺨에 닿아있을 것 같아서…죄송합니다.”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말 안 하려는 거였는데.
“지금 황제 폐하를 주먹으로 치겠다고 입 밖으로 말한 건가요? 이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글쎄요. 지금 막 오긴 했지만 저도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제 동생’에게 하신 행동을 일일이 따져보면 사실상 한 대로 끝날 게 아니라서 말이죠.”
“하! 뭐? 동생? 지금 동생, 아니 가넷 대공의 일로 이러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로젤리아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최대한 절제 중 입니다. 그리고 제 위치에서, 제가 몸담고 있는 가문에서, 이 한 마디를 못할까요? 황제 폐하께서 저지른 일도 있는데?”
로웬은 샤를로테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페르소나도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페르소나는 천천히 샤를로테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페르소나가 중재를 하려던 순간 일이 벌어졌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간 로웬의 고개.
샤를로테가 로웬의 뺨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