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새삼스럽게 반하네요.
무도회장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샤를로테를 제외하고 모두가 날카롭게 신경을 세웠다.
뒤늦게 페르소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샤를로테 쪽으로 걸어왔다. 레이몬드 황제로서의 기품과 품위를 갖춘 걸음이었지만 그 속에 초조함만큼은 숨겨지지 않았다. 특히 로젤리아에게는 그 모든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페르소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섰다. 멍청한 황제와 오만한 정부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며 예법에 갖춰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칼라일이 페르소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칼라일 헬리오도르라고 했나, 이게 무슨 무례지? 감히 황제의 앞을 막다니.”
“막은 것이 아닙니다. 로젤리아님 대신으로 폐하의 앞에 선 것이지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한낱 정부 주제에 대공의 대변인이 되겠다?”
“저는 한낱 정부가 아닙니다. 물론 정부가 그런 뜻으로 쓰이는 것 맞습니다만 저는 조금 특별한 정부라고 생각됩니다.”
안 그런가요, 로젤리아님? 제가 한낱 정부인가요? 상냥하게 물어오는 말에 나는 그 어느 것보다 다정하게 대답해줬다.
“어찌 네가 평범한 정부겠어. 나한테는 보다 특별한 존재인걸.”
실제로 나는 칼라일에게 자잘한 업무를 부탁하기도 했고, 급하게 인원이 부족할 때는 행정관들이 할 법한 일을 맡기기도 했다.
그도 귀족이었던 터라 일 처리능력이 뛰어났다. 심심하면 보라며 쥐어준 ‘무역학의 기초와 친선과의 상관관계’라는 어려운 책을 단번에 이해한 걸 보면 여간 머리가 똑똑한 게 아니었다.
“나는 대공과 대화할 것이니, 너는 빠지거라.”
“저는 폐하와 대화할 것이 없습니다. 굳이 하실 말씀이 있다면 칼라일을 통해 해주십시오.”
“말씀 들으셨으면 저와 대화해주실까요, 폐하? 그리고 계속 한낱 정부라고 하시는데…황후 폐하도 정부 출신 아니십니까?”
칼라일의 비웃음에 페르소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나 칼라일은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나는 다 마신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쳤다.
“폐하. 이 좋은 무도회 날. 달은 높이 떴고, 샹들리에는 무척 아름답습니다. 농담 정도는 허용될 수 있는 그런 날 아닐까요?”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청아하고도 위협적인 소리가 모든 이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황실이 가넷 가문에 간섭을 한다는 선포! 이 얼마나 재미있는 농담인가요? 저는 국정으로 바쁘실 텐데도, 이렇게 성대한 무도회를 치러주신 황제 폐하께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입니다. 제 농담이 재미가 없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래. 농이었군. 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나보오. 그대는….”
페르소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칼자루를 잡았던 손에 천천히 힘을 뺐다.
“레이몬드 황실에 큰 공을 세우고, 함께 성장해온 명예로운 가넷 가의 대공이니.”
“과찬이십니다, 폐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게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해서 떨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내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실의 개입, 그것도 가넷 가문에게 개입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도래하는 일이었다.
루드베릴의 대공은 충분히 레이몬드 제국의 초기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기존에 있던 왕족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대공의 자리와 가넷 가문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예전에 한 약속이니 소용없지 않느냐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실이 권력을 쥔 채 성장해왔듯이, 가넷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무역과 군사. 가넷 가문의 소유로 있는 항구와 기사단장으로 있는 로웬 가넷. 더구나 로웬은 다른 기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가넷 가문이 항구를 닫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로웬이 황실에 반감을 가진다면?
뭐가 되었든 가넷 가문은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렇기에 페르소나는 나에게 명예로운 가문의 ‘대공’이라고 말했다. 황후가 아닌, 가넷 대공이라고,
***
‘대공’의 이름을 말한 순간 페르소나는 심장 부근을 움켜잡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절대 죽지 않는 자존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넷 가문의 여식, 황후가 될 여자라는 꼬리표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로젤리아. 눈을 똑바로 뜬 채 황후로서의 기품이 유지하고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던…….
결혼 생활을 하면서 하던 생각은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부드러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조금 더 상냥했으면 좀 좋아?
그럼 분명 황제와 황후 생활뿐만이 아니라 부부로서의 생활도 좋았을 거야. 잃은 아이도 무사히 태어났을 텐데. 로젤리아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얌전했다면, 조용하고, 황후의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부라는 놈을 본 순간 화가 치밀었다. 놈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황후의 자리에서는 절대 짓지 않았던 그 웃음.
나에게는 지어주지 않았던 그 미소. 그래서 놈에게 마물용 구속 수갑을 채웠다. 워낙 제 사람을 아끼던 그녀이니, 수갑을 풀기 위해서라도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그러나 로젤리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황실이 직접 가넷 가문에서 이뤄지는 모든 절차에 개입하겠다, 라는 선포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충분히 위협적인 말, 명백하게 대공으로서 권력을 쥐었음을, 그걸 앞으로 이용하겠다는 말.
‘가넷 대공이라.’
황후보다 대공이 더 맞는 자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내 옆이 아니라, 제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로젤리아.’
여전히 놔줄 생각은 없었다.
“제 농담으로 인해 분위기가 내려앉았군요. 그럼 다시 무도회를 시작할까요?”
대공의 자리에 오른 이상, 손에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곁에 두는 건 불가능하다. 건드릴 수도 없다.
방금처럼 언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혼도 했으니, 예전처럼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마물용 마력 수갑은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면 못 푼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푼 거지? 스스로 푼 건가?
아니면 샤를로테의 말대로 보이지 않도록 마법으로 감춘 건가?
‘폐하, 사실 칼라일과 저는, 약혼 사이였습니다. 안케도니아 제국이 무너질 때, 그때 함께 도망을 쳤어요. 하지만 칼라일은 저에게 마법을 이용해 폭력을 사용했고, 저는 못 견디고 그를 떠났어요. 그러다 황제 폐하를 만났고요. 칼라일과 길에서 만났을 때도 저에게 칼로 위협을 했어요. 말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폐하가 절 버릴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서….’
칼라일 헬리오도르, 샤를로테의 약혼자. 그럼에도 그녀의 곁에 붙어있다니 그렇게 뻔뻔할 수가.
샤를로테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그랬군’ 딱 이거였다. 1황녀니 당연히 정해진 약혼자가 있었겠지, 로젤리아도 모르는 놈의 풀네임을 알고 있을 때도 그냥 넘어간 이유도 하나였다. 바람을 피웠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아는 놈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놈이 로젤리아의 정부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고 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으나 나중에 생각해도 정말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거리는 게 꽤 재밌을 뿐이었다.
그러니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샤를로테를 내 칠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정보는 유용했으니까. 마법사라는 것, 방대한 양의 마력이지만 몸이 약해 무리가 간다는 것. 이 두 가지만 해도 로젤리아와 칼라일을 떼어놓는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샤를로테는 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더 많겠지.
페르소나는 다시 무도회를 이어나가는 귀족들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샤를로테의 어깨를 감싸 쥐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샤를로테가 함부로 일을 벌인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서 호통을 칠 순 없으니까. 일단은 샤를로테를 아끼는 것처럼. 뒤따라오는 로젤리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준비한 것을 보고, 로젤리아가 어떻게 나올까…….’
직접 손을 대지는 않는다. 손을 대지 않은 척, 상관이 없는 척, 나는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척.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갔다.
시선의 끝에는 유리 공예품으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있었다.
***
“사실 저 술 못 마셔요.”
“그런 것 같네요, 겨우 한 잔 마신 거 아닌가요? 이렇게 비몽사몽 되어있으면 어떡해요.”
“네, 미안해요. 좀 더 노력할게요. 저는 그대의 특별한 정부니까.”
칼라일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테라스로 나왔다. 칼라일은 살짝 취한 상태였다. 잠시 세실리아에게 다녀온 사이 그의 앞에 놓여있던 술잔은 비워져있었다.
몇 잔 마셨냐고 묻자, 한 잔 마셨다고 말하는데 눈이 살짝 풀려있었다. 술을 마시고 헤롱거리는 칼라일을 보며 실수로 술을 먹고 취한 강아지를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몸이 약해서 술을 못 마셨어요.”
“술을 마시면 쓰러지는 건가요? 그럼, 돌아갈까요?”
“아아, 그건 아니에요.”
테라스 정원 근처의 벤치에 칼라일을 앉혔다. 칼라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 채 손가락을 들어 공중에 꽃 한 송이를 피웠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꽃을 시작으로 내 머리 위로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법은 되도록이면 쓰지 말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이건 소량의 마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는 기초 마법이니까요.”
“그래요?”
“그럼요. 이렇게-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마법을 썼을 때 펼쳐질 모습을 상상하는 거예요.”
칼라일은 내 손바닥 위로 마법진과 유사한 이미지를 그렸다. 손 위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감촉을 따라 머릿속으로 어떤 문양을 그려냈다. 그다음에 마법이 펼쳐질 모습을 상상하라고 했나?
“마법사들이 똑똑한 건 오랫동안 연구해서, 수행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얼마나 또렷하게 떠올리느냐에 몰두하느라 그렇죠. 선명하고, 자세하게, 또렷하고도 보다 명확한 이미지를.”
내 눈을 손으로 덮어주는 칼라일을 보며 그가 내려준 꽃비를 떠올렸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그리고……마법을 쓸 때마다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던 손목의 멍.
내가 마법으로 그의 상처를 낫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툭, 그때 뭔가 머리 위로 눈을 뜨자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가 떨어졌다.
“어? 왜 꽃이…?”
칼라일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니 붉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로젤리아님, 마력을 가지고 계셨어요?”
“아, 세실리아에게 받은 마력석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보니 그렇게 되었나 봐요. 루치아노가 그 마력석이 제 몸에 흡수되었다고….”
“그럼 이건 로젤리아님의 마력으로 탄생한 꽃이겠네요.”
칼라일은 툭툭, 꽃봉오리를 건드렸다. 한참으로 그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손으로 조심히 감쌌다.
“이 꽃봉오리 저 주시면 안 되나요?”
“칼라일이나 루치아노나, 둘 다 꽃을 좋아하시는군요.”
“이건 특별하잖아요. 로젤리아님의 마력으로 생명을 품은 꽃이니까요.”
칼라일은 집요하게 재차 물었다. 가져도 되냐고. 정말 꽃을 좋아하는구나. 친구끼리 닮는다는 게 이런 건가?
“대신 궁금한 거 있어요. 답해주면, 줄게요.”
“무엇이죠?”
“치료 마법은 어떻게 쓰나요?”
“치료 마법은 자신이 가진 마력을 조금 나눠주는 과정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방식이죠. 어느 정도의 마력이 있어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적은 사람이 치료 마법을 쓰다가 마력을 다 쓰면 수명을……그런데 그런 건 왜 물어봐요?”
“나도 치료해주고 싶어요. 칼라일의 손목에 있는 이거.”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칼라일의 손목을 쓸었다. 마법으로 감춰뒀다던 수갑이 만져졌다. 너무 차가워서 닿은 손끝이 아플 지경이었다. 루치아노가 조금씩 낫게 해줬다는데, 그래도 나은 게 이 정도인 건가?
마치 얼음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칼날이 박힌 얼음. 손가락으로 살짝 건들자 차가운 느낌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까 꽃비가 내렸을 때처럼 따뜻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손에 꽃이 아닌 햇살이 내려앉은 것만 같은 온기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으로 그려버린 이미지. 이 근처가 꽃으로 뒤덮여 칼라일이 온기에 미소 짓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실현되었다.
“?”
테라스 정원에 눈이 내리듯 새하얀 꽃들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칼라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꽃봉오리를 꽉 쥐었다. 테라스 화단뿐만이 아니다, 정원 전체를 뒤덮었다. 황실의 정원은 꽤 넓을 텐데, 로젤리아는 당황스러워하며 얼마나 많은 꽃이 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칼라일이 내 두 손을 꼬옥 잡았다.
“그대는 정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꽃잎에 말을 이어나가지 못한 칼라일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딱 한 번만 설명해줬을 뿐인데도 이렇게 멋진 마법을 펼치다니.”
“우연이에요. 나도 모르게 쓴 마법이에요.”
“우연이라도 대단해요. 역시 그대에게 황후의 자리는 너무 작았을지 몰라.”
칼라일은 중얼거리며 꽃잎을 매만졌다. 칼라일이 꽃잎을 만지자 빛이 점멸하듯 꽃잎도 사라졌다.
“그대를 황후의 자리에 묶어둔 황제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대공의 자리조차 그대를 채우기에 부족한 것일지 몰라.”
“카, 칼라일?”
“어쩜 이리도 사랑스럽고 완벽한 사람인지….”
“칼라일, 취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나 보네요, 어쩌다가 된 마법인 거잖아요.”
“그럼 더더욱 대단한 것입니다. 가능성 거의 없을 이 범위의 마법, 그걸 깨버리는 그대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야.”
칼라일은 살짝 이마를 맞대며 미소 지었다. 간지러워서 쿡쿡, 웃자 칼라일도 나를 따라 웃었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따라 일어났다.
귀여웠다. 나를 따라하는 행동이.
나는 칼라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한 쪽 발을 뒤로 뺐다. 오른팔로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로젤리아님?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천천히 로젤리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칼라일은 내 몸짓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남자 스텝도 밟을 줄 알아요.”
“로젤리아님, 새삼스럽게 또 반하네요. 너무 멋져요.”
“새삼스럽게?”
꽃잎들 사이로 춤을 추며 나는 농담하듯 살짝 속삭였다.
“정말 새삼스럽네요. 그대는 원래 날 좋아했잖아요.”
“그러니까요.”
분명 농담이었다.
“이렇게 또 반할 수가 있군요. 몇 번이나 더 반할 수 있는 걸까요?”
가까이 거리에서 마주한 칼라일의 눈에는 열기가 서려있었다.
나는 그대로 춤을 멈췄다. 하지만 칼라일은 멈추지 않고 내 허리에 단단하게 팔을 감은 후 다리를 움직였다. 남자 스텝 못 춘다는 거 거짓말이었나?
“또 좋아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이미 충분히 그대를 좋아해요.”
샤를로테와 대치할 때 보았던 그 감정. 존경심, 동경, 적나라할 정도의, 마치 사랑 같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춤도 멈췄다.
취기가 아직 안 빠졌나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칼라일이 나를 저렇게 사랑에 빠진 눈으로 볼 리가 없었다.
꽃잎이 흩날리면서 따스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더 좋아하게 되면, 나는 그대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