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선포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안케도니아 제국의 13황녀, 그 명칭은 내게 치욕적이었다.
제국 내에서 황녀 취급을 받는 건 오로지 1황녀뿐이었다. 1황녀의 이름은 모른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별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지냈으니까. 은빛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안케도니아의 황실의 황족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이 상징들은 내 목을 옥죄는 족쇄였다.
누가 감히 황족에게 귀족 따위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황태자가 아닌 이상, 1황녀가 아닌 이상 나는 이름만 황족일 뿐이었다. 그게 싫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하지만 내 분노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가슴 안쪽에서 썩고 또 썩어, 그렇게 삭아버린 무언가가 되어 언제부터인가 그저 괴로움으로만 남았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찾아온 이가 바로 칼라일 헬리오도르였다.
“저는 칼라일 헬리오도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영광입니다.”
금색 머리카락의 은빛 눈동자. 황실과 오래전부터 계약을 행해 온 마법사 가문.
칼라일은 대마법사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몸이 약해 방대한 양의 마력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퍽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약혼녀라며 진심을 다해 사랑해주려는 모습이 조금은 좋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가 내 몸속에 있는 소량의 마력을 찾아주었다.
선천적인 마력, 마력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은 황실에서 본래 가졌어야 할 내 지위를 찾아주었다. 본래 황녀로서 누려야 했을 지위를!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칼라일은 나를 좋아했고, 내 몸에는 마력이 있었다. 칼라일을 이용해 마력석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구용으로 만드는 마력석을 조금씩 빼돌려 복용하고, 칼라일의 연구에 관심 있는 척 쓸 만한 마법 정보들을 익혔다.
그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쓸모도 없는 마법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마법이었으니까.
그때가지만 해도 내 계획은 완벽했다. 완벽했을 거고, 분명, 완벽했어야 했는데…!
“….”
샤를로테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칼라일, 로젤리아. 샹들리에가 그 둘만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빛나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칼라일과, 미소로 응답하며 기품 있게 무도회장으로 들어오는 로젤리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줄 알아?’
페르소나의 손을 잡고 단상 위에 서는 샤를로테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드레스를 움켜쥔 손에는 핏줄이 돋아있었다. 그럼에도 샤를로테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로젤리아에게 해줄 말,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구겨질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무도회에 참석해준 모든 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오늘,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곱게 휘어진 눈꼬리, 섬뜩할 정도로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오로지 로젤리아를 향해 있었다.
***
“무도회 사람들 모두가 로젤리아님을 보고 있습니다. 역시 로젤리아님이 이 무도회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게 틀림없습니다.”
“칼라일? 내가 그렇게 예쁘지는 않아요.”
칼라일이 예쁘다고 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칼라일의 입이 어떻게 하면 다물지 생각하며 시종이 가져온 디저트를 집어 칼라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입에 들어온 디저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칼라일은 이내 조용히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나는 그제야 무도회 주변을 서서히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힐끗거리며 보지 않는 척 나와 칼라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붙이고 싶지만 못 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현 황후와 전 황후가 한 무도회장에 있는데 어떻게 말을 걸겠어.
그때 한 영애 무리가 보였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서로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칼라일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칼라일의 시선은 나에게만 향해 있어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몸을 돌려 칼라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쁜 얼굴이다. 무척 곱고 아름다운 외형이었다. 아셀라가 완벽하게 세팅해놓은 탓에 평소보다 더 잘생기고 예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은빛 눈동자가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라도 주는 건지, 영애들의 목소리 사이로 눈동자가 예쁘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로, 로젤리아님!”
그때 한 영애가 다가왔다.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른 건지, 뭔가 풋풋한 분위기를 퐁퐁 내뿜고 있었다.
“저, 저는 비온 가문의 영애, 테리사라고 합니다!”
“그래요, 테리사 영애, 무슨 일이죠?”
“저, 그. 그게, 춤을, 춤을 추고 싶어서요…!”
춤? 나는 아닐 테고, 그럼 칼라일을 말하는 건가?
“칼라일. 테리사 영애가 그대와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는데요.”
“저와 춤을 추고 싶다고 하신 겁니까?”
“아, 안될까요?”
가만히 테리사 영애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칼라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상관없었다. 문제는 칼라일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웃고 있었다.
“저는 춤을 잘 못 춥니다.”
“저, 저도 잘 못 춰요!”
“춤을 안 춘 지 오래되었고,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른 것 같은데 첫 춤은 다른 분들과 추는 게 더 나을 듯싶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요?”
칼라일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더니 약간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춤을 추지 못합니다.”
“네?”
“여자 쪽 춤밖에 추지 못하죠. 혹, 영애께서 남자 스텝도 가능하시다면, 그리고 로젤리아님이 허락을 해주신다면 함께 춤을 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칼라일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영애는 여자 스텝밖에 밟지 못한다는 말에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살짝 끌어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 여자 쪽 스텝 밖에 밟지 못해요?”
“네. 저희 가문은 무도회 같은 것은 중요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나가지 않았거든요. 춤을 배우긴 했어도 어릴 때라…그리고 여자 스텝도 제 동생이 춤을 배울 때 도와주던 것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테리사 영애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목 전체까지 빨개졌다. 부끄러웠을 것이다, 용기 내서 선택한 첫 춤 상대에게 거절당했으니까.
울먹이려는 테리사를 달래주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 꽤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펴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샤를로테 안케도니아, 사근거리는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랜만이네요, 가넷 영애.”
“대공입니다, 폐하. 호칭은 제대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하라고 했는데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
“아아, 그때 이혼 재판에서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고만 말하고 즉위식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아 무산된 줄 알았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머, 그런 가요? 아니면 혹시…가문에서 즉위식을 치러주지 않겠다고 했나요? 하긴, 그 명예 높은 황후 배출 가문인데, 사사로운 감정 하나 못 잡고 이혼을 해버린 영애에게 즉위식을 해주고 싶겠어요? 대공의 자리에는 어떻게 오른 건가요?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니죠?”
천사 같은 얼굴에 뱀 같은 혀. 독사 같은 여자다, 어떻게든 물고 뜯으려 발악하는 꼴이 우스우면서도 가여웠다.
이런 얘기는 주변 사람들이 많을 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부끄러워 할 줄 알았나?
기가 죽을 줄 안 건가?
페르소나나 샤를로테나 둘 다 똑같구나.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저는 이미 대공의 자리에 오른 상태입니다. 이미 저희 아버지, 루벨라이트 전 대공께 즉위식 대신의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나요? 그 ‘전’ 황후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죠.”
샤를로테가 부채를 핀 채 얼굴을 가리고 웃자, 다른 영애 몇 명이 나서기 시작했다.
“마, 맞아요. 즉위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대공이 아닌 거죠, 그저 영애인 거죠!”
“그 가넷 가문인데 말이죠! 이혼한 전 황후를 대공으로 세운다는 것도 말이 조금 이상하잖아요.”
샤를로테를 거드는 두 영애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아, 저 영애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샤를로테와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이다. 그때 꼬드김을 당했나 본데, 기분 나쁘기는커녕 샤를로테한테 붙잡히고 설득당한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증거가 필요한가요? 증거라면 일단….”
칼라일을 향해 고개를 돌자, 칼라일은 기다렸다는 듯 고혹적이게 웃었다.
“제가 증거죠. 정부인 제가, 그때 루벨라이트 전 대공께 직접 들었는걸요. ‘로젤리아 가넷을 대공의 자리에 앉히겠다’라고 말이죠.”
칼라일이 내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하자 입을 연 영애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겨우 정부 따위의 말을 어떻게 믿죠?”
“겨우 정부니까 제가 나선 겁니다, 황후 폐하.”
나를 바라보는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경이로움, 존경, 사랑 모든 게 담겨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마저 놀랄 정도로 적극적이고 적나라한 감정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로젤리아님이 왜 증거를 말해야 하는지, 굳이, 여기서? 저는 쓸데없는 말을 대신 해드린 것뿐입니다, 폐하.”
“정부 주제에 말이 많군요.”
“정부 주제라….”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으며 꽤나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칼라일의 말이 맞습니다. 이 즐겨야 할 자리에서 제가 대공이 되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왜 밝혀야 하죠?”
“지금 영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것도 그렇게 명예롭다던 가넷 가문의 영애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올렸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야 저는 황후니까요. 황후로서 거짓말과 분란 조정은 확실히 다스려야 하는 황후, 그대는 영애고요.”
“아아, 그렇죠. 그럼, 말씀드려야겠네요. 저는 아버지께 직접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겠다는 공식적 서류와 함께 편지를 보냈고 그에 따른 허락이 담긴 승인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걸로 즉위식을 대체했고요. 비공개적으로 허락을 받은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왜 제 말을 이해 못 하시죠, 로젤리아 영애?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제가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서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가져와보시죠, 그 서류.”
“지금 저에게 공식적인 서류를 가져오라 명하셨습니까? 설마, 저희 아버지도 모셔오라 하실 건가요?”
“좋네요. 이 자리에 데려와요. 전부. 그 조작일지 모를 서류와 루벨리아트 가넷 모두요.”
샤를로테의 한마디의 모든 소리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샤를로테만 응시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황후에게 필요한 공부는 한 것일까? 역사학 서적에도 명시되어 있을 게 분명할 텐데. ‘가넷 가문이 제국을 세우는데 아주 큰 공을 세웠다’ 뭐 이런 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황후가 한 말을 제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럼 지금 제 말이 농담으로 들리십니까? 분위기 파악을 하시죠, 영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고회로가 점점 멈추는 것만 같았다.
가넷 가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과, 이렇게 대놓고 망신을 주려는 것과, 이쪽을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방관하고 있는 페르소나까지.
가장 화나는 건 칼라일을 겨우 정부라고 칭한 점이었다. 이 상황이 오게 만든 원인이 본인이면서.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황후 폐하의 말씀은 지금, 대공저의 저택에 따로 보관되어있는 공식적인 서류와 저의 아버지, 루벨라이트 가넷을 모셔오란 의미군요, 지금 당장. 직접 개입하겠다는 소리인가요?”
“그렇죠, 현 황후인 저는 그럴 권한이 있으니까요. 거짓으로 분란을 일으킬지 싹을 미리미리 잘라낼 그런 권한이요.”
냉정하게 생각해. 침착해. 침착하자. 그러나 머리와 달리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기에는 이미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죠. 황후 폐하, 그리고……황제 폐하!”
이때껏 내본 적 없던 위협적이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크게 터져 나온 음성. 황제는 물론이고 이 사태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귀족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
“황후 폐하의 뜻은 모두 황제 폐하의 앞날을 위한 것. 그러니….”
나는 느릿하게 샤를로테를 훑고 페르소나를 바라보았다.
“황실이 직접 가넷 가문에서 이뤄지는 모든 절차에 개입하겠다, 라는 선포.”
마치 칼을 겨누듯 날카롭고, 또 서늘하게. 그럼에도 예의를 갖추며 우아하게.
“…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의 웃음기는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