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더없이 아름다운.
제국 내의 3대 상단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면서 눈으로는 서류를 읽었다. 릴리가 옆에서 돕지 않았다면 아마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손은 멈출 수 없었다.
무역에 대해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운영하니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다.
현재 바다를 끼고 있는 레이몬드의 제국의 모든 항구는 가넷 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 또한 루드베릴 대공이 황제에게 대공 자리와 함께 요구한 사항이라, 항구는 오래전부터 가넷 가의 담당 소유지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무역을 하려면 무조건 가넷 가의 항구를 사용해야 했다.
상단에서 몇 명의 조직이 어떤 물품을 어느 대륙으로, 또 어느 제국으로 수출 및 수입하겠다는 서류를 가넷 가에 제출하면 이를 승인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문제는 가넷 가에서만 승인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승인을 받았다는 서류를 다시 한 번 상단에 제출하고, 상단 쪽에서도 승인을 받아야 항구를 이용할 수 있다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총 두 번의 승인, ‘상단-가넷 가문-상단’이라는 절차였다.
이 과정에서 돈이 오고 갔다. 상단에 뇌물을 주지 않으면 서류를 보내주지 않거나, 무역 순서를 뒤로 미루거나 일부러 빼버리니, 피해 받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고민하던 찰나, 상단을 직접 설립하기로 했다.
가넷의 이름으로 세우는 무역 상단. 애초에 항구는 가넷 가의 소유지였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상단을 거쳐 가넷 가에 서류를 보낼 필요 없이 항구 근처의 무역 상단에 서류를 제출하기만 하면 담당 상단주가 승인을 내려, 곧바로 항구 사용을 허가해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전에는 무조건 상단을 통해 총 두 번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과정을 한꺼번에 축소하자는 게 로젤리아의 제안이었다.
릴리는 로젤리아가 건네는 서류를 검토하고 빠르게 정리했다.
“도대체 이런 규모의 일을 어떻게 준비하신 거예요? 이제 막 대공의 일을 배우신 거 아니었어요?”
“이건 내가 황후 시절일 때도 고민하던 방안이야. 이제 대공이 되었으니 실행할 것이고. 더 사람들이 피해 받게 둘 수는 없어. 지금 당장 루비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 사실을 기사로 내게 해.”
“그런데 상단 설립 자체는 황실의 승인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차피 나는 그 전에도 유령 상단을 하나 가지고 있었어. 이미 내가 황후일 시절에 다 끝낸 사안이야. 그 서류도 전부 내가 갖고 있어.”
릴리는 아픈 손목을 부여잡으며 막대한 양의 서류를 묶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무역 건과, 상단 설립 서류, 항구에 대한 담당 소유지 서류와 기사로 내보낼 것들, 세금, 그리고…….
‘상단 운영방식 및 체제.’
릴리는 문득 서류를 정리하다 손이 멈췄다. 이 서류는 상단주가 다루게 될 서류다. 간략해 보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서류.
“릴리. 그 서류는 정리할 필요가 없단다.”
“네?”
“상단주는 릴리 마그렛트, 너니까.”
릴리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들었나, 눈을 깜빡였다.
“상단주 자리를 맡을 사람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알고 있잖아.”
“하지만 저보다는 로젤리아님이 하시는 게 더 나아요. 아시잖아요. 저는 시녀입니다……그리고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그럴 듯하게.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시녀이자 한때 이름을 날렸던 대상단주의 딸이기도 했지.”
“!”
“물론 며칠간은 내가 상단주 일을 겸할 거란다. 그전까지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렴.”
깃털 펜을 내려놓고는 허리를 쭉 폈다. 길고 긴 서류 지옥이 끝이 났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쉴 수 있겠지, 하면 또 다른 일들이 밀려왔고, 겨우 끝냈다, 싶으면 숨어있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쉬었던 건 아셀라가 드레스를 봐주러 왔을 때 그날뿐이었지.’
그날로부터 또다시 삼 일이 지났다.
페르소나가 무도회를 미루지 않았다면 무도회에서도 일을 했을지 모른다. 그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게다가 칼라일과 화해하지 않은 상태로 삼 일이 지났다. 릴리의 말에 따르면 차와 간식을 가져온 채 집무실 앞에 머물다 그냥 가버린 적이 많았다는데….
‘빨리 화해해야겠지.’
손으로 대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서류 지옥에서 탈출한 건 좋았지만 칼라일과 어떻게 화해하는가에 대한 난관을 또 맞닥트렸다.
“로젤리아님.”
그때 시녀장이 서류를 이리저리 피하며 들어오다 우리를 보고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설마 지금까지 일하신 겁니까? 릴리, 안 말리고 뭐 했니?”
“하다 보니 또 재밌어서……그런데 왜요?”
“아셀라 영애께서 와 계세요!”
“아셀라 영애가 왜, 드레스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고 하니?”
“아니요! 오늘이 무도회 날이니까요!”
무도회? 릴리와 로젤리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오늘이 무도회 날이니? 잠깐, 무도회는 언제 시작이지?”
“저녁 6시부터인데…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어요?”
“계속 일만 하시고 방에서 나오시질 않으시니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어서 나오세요!”
시녀장은 내가 못 살아! 하고 외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시녀와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 집무실은 그대로 둔 채 로젤리아님을 욕실로 옮겨, 아셀라 영애를 로젤리아님의 침실로 모시고, 칼라일님을 불러. 로젤리아님 단장하실 때 릴리를 씻기고 곧바로 올려 보내!”
“시녀장님, 저는 왜요……?”
“그야 너도 무도회에 참석하니까.”
“어째서죠?”
“네가 먼저 말을 놔줬고. 나도 편해서 반말을 쓰기는 하지만, 너도 귀족이잖니. 로젤리아님이 널 이번 무도회에 데뷔탕트를 치르게 한다고 하셨어.”
데뷔탕트라고? 내가? 왜?
시녀의 손에 끌려가는 릴리의 얼굴에는 의문스러움에 가득 찼다. 그러다 장미 꽃잎을 가득 띄운 욕실에서 하녀들 손에 씻겨 질 때쯤에야, 릴리는 문득 자신이 시녀가 아니었을 시절을 떠올렸다.
지난 8년간 시녀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맞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네…….’
자신이 이제는 거의 몰락한 백작 가문의 영애라는 것을.
***
“로젤리아님 이건 미쳤어요. 이런 말 쓰기는 뭐하지만 미쳤다는 말 밖에 안 나와서 죄송해요, 그런데 진짜 미쳤어요. 세상에는 단어 수가 이렇게 적답니다.”
나는 가만히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응시했다. 차분한 붉은빛 머리카락에 깨끗한 흰색 드레스. 그 위로 꾸며진 붉은 보석들과 비즈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수수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보기만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풍성한 치마나, 너무 과하지 않고 딱 알맞게 꾸민 보석들이 오히려 귀족적이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로젤리아님, 마음에 드세요?”
“무척 마음에 드네요.”
“다행이에요! 아 맞다! 이거, 그때 칼라일님께 받은 보석으로 세공한 귀걸이입니다. 한번 착용해보시겠어요?”
그 말에 정돈한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귀걸이.
아셀라가 벨벳색의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자 육각형으로 커팅한 햇살빛의 마력석에 장미색 비즈들로 꾸민 귀걸이가 보였다. 너무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들어 올리자 마력석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마력석을 삼킨 루치아노의 눈동자가 빛났던 것처럼 반짝였다.
한참을 귀걸이를 들여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닫았다.
너무 아름다운 귀걸이라, 이대로 착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셀라 영애, 칼라일의 준비는 끝났나요?”
***
마차를 타기 위해 내려가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녀 몇몇이 쪼르르, 달려와 내 팔을 잡고 어서 내려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셀라는 옆에서 무척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시녀들이 왜 그렇게 수줍은 얼굴로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칼라일?”
오늘따라 유독 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듯했다. 흰색과 금색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제복. 저렇게 차려입은 건 처음 보는 듯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두꺼운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로젤리아님.”
“오늘 아주 멋지네요.”
“네, 그대도요. 오늘 아주 아름다우시네요.”
칼라일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한다더니. 아셀라가 꽤나 고생했을 듯싶었다.
그때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칼라일이 나를 보고는 움찔거렸다. 그러다 뭔가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숙여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칼라일의 손을 잡았다.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시녀 한 명이 다가왔다.
“로젤리아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릴리는?”
“릴리는 준비되는 대로 바로 무도회장으로 보내겠습니다.”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칼라일은 들어오지 않고 마차 밖에 서 있었다. 칼라일?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라일은 왜 부르냐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왜 들어오지 않아요?”
“저도 마차에 타는 건가요?”
“그럼 안 타나요? 무도회까지의 거리가 꽤나 될 텐데.”
“아, 저는 항상 마법으로 이동해서…….”
“마법은 쓰지 말아요. 아직 마력 제어가 다 풀린 게 아니잖아요.”
로젤리아는 칼라일의 손목을 휘감고 있는 기분 나쁜 마력을 힐끗, 보다가 칼라일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서 타요.”
그러곤 우물거리는 칼라일에게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귀걸이를 직접 착용할 줄 모르니까.”
“!”
“해줄 수 있죠?”
그 말에 칼라일은 잠시 어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역시 귀걸이 때문에 시무룩했던 건가?’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로젤리아는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어 귀걸이를 보여줬다.
“무척 아름다운 귀걸이네요.”
“그대가 직접 만든 마력석으로 만든 거니까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그대가 걱정할까 봐 그랬어요.”
“나도 차갑게 말해서 미안해요.”
칼라일은 조심스레 내 옆에 앉았다. 한 손으로 귀걸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는데,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떨림에 그를 곁눈질로 살피자 너무도 심각하게 집중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귀걸이를 모두 착용하고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거울이 없어서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리아는 칼라일에게 어울리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 어울려요?”
“어울려요. 너무 잘 어울려서….”
칼라일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황궁으로 가는 내내 칼라일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칼라일을 보며 말없이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귀걸이를 빼야 하나 고민을 할 때쯤 마차가 멈췄다. 칼라일은 빠르게 내려 로젤리아의 손을 잡아줬다.
황궁에 도착하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향기와 함께 잔잔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칼라일이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로젤리아님.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오늘 너무 아름다워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하나에, 천장에 걸린 고풍스러운 조각과, 보석이 박힌 기둥들, 아름답게 춤을 추는 귀족들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더없이 사랑스러워요, 로젤리아.”
환한 샹들리에 빛이 아닌 수줍게 웃는 칼라일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