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25화 (25/170)

#25화, 황실 무도회

“아셀라 영애.”

“로젤리아님.”

아셀라의 발밑에는 아주 커다란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 가방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하하, 웃으며 아셀라를 맞이했다.

설마 드레스인가? 오늘도 드레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입어야 하나? 벌써부터 온몸이 뻐근해질 것 같았다.

“로젤리아님.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때 제가 말리지 못했어요. 샤를로테의 얼굴을 보니 손톱이 뽑혔을 때가 다시 떠올라서……그, 칼라일님께도 사과드립니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아셀라는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아닙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셀라 영애께서 어찌 해주실 것이 아니었습니다.”

“맞아요. 아셀라 영애.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말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야말로 미안해요, 괜히 소란을 피운 것 같아서. 영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나요?”

“아닙니다! 방해는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걱정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어요.”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셀라를 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샤를로테, 도대체 네가 피해 입힌 사람만 몇 명인 거야.

“아, 이건 드레스입니다. 저번에 제가 미리 골라 놓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만, 로젤리아님의 미모나 위치에는 너무 뒤떨어진 패션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새롭게 제작을 했습니다.”

아셀라가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치마폭이 무척 풍성한 흰색 드레스를 꺼냈다. 대부분의 드레스가 어깨와 목을 다 감싸는 평범한 귀족 드레스였던 것과 달리, 어깨를 드러내는 거의 파격적인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실크 재질 드레스에 어울리는 콕콕 박힌 작은 비즈들과, 허리에서부터 치마 끝까지 뻗은 반 투명한 붉은빛 장미 모양의 보석 덕분에 기품 있으면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로젤리아님은 머리가 붉은빛이라 색감이 강한 옷보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드레스에 머리빛과 잘 어울리는 보석이 달린 디자인이 좋습니다. 제가 로젤리아님께 어울리는 보석 장신구까지 모두 준비했습니다.”

“아셀라 영애, 진정해요,”

“아니요, 로젤리아님! 로젤리아님은 복수를 해주셔야 합니다! 샤를로테 그 여자를 아주 눌러놓으셔야 해요! 로젤리아님은 비율이 너무 뛰어나고 아름답습니다. 미모는 더 이상 말 할 필요도 없어요. 자, 이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도!”

보석 장신구, 보통은 꾸미는 것에 관심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모르게 강한 관심을 드러낼 정도로 아름다운 장신구가 많았다. 특히 귀걸이가 가장 아름다웠다. 물방울 모양으로 커팅된 금색 보석에 작은 크리스탈로 꾸민 귀걸이.

조심스레 귀걸이를 매만졌다. 예쁘다, 작게 중얼거리자 아셀라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쁘죠, 제 걸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섬세하게 장식된 귀걸이…하지만 보석이 너무 아쉬워요! 너무 색이 진하잖아요! 옅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칼라일님의 머리카락 색 정도요.”

“칼라일의 머리카락이요?”

옅은 햇살 같은 저 머리카락? 하긴, 귀걸이에 달린 보석의 색이 조금 진하긴 했다.

“제 머리색 정도면 괜찮다는 건가요?”

“네. 딱 좋은데!”

팔찌랑 목걸이도 다 좋은데 말이죠. 아셀라는 귀걸이를 자꾸만 로젤리아의 귀에 댔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이 보석으로 똑같은 귀걸이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때 칼라일이 아셀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제 머리색을 닮은 보석이죠.”

아셀라는 입을 딱 벌린 채 보석을 로젤리아의 머리카락에 대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과 귀걸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아셀라 영애?”

“저는 지금부터 새롭게 귀걸이를 만들러 갑니다. 드레스는 꼭 그걸 입으셔야 해요, 아셨죠?”

“그, 그럴게요.”

아셀라는 깨끗한 손수건에 아주 소중하게 보석을 감쌌다.

마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아셀라를 보며 칼라일이 아셀라에게 건넨 보석을 생각했다.

보석이라니, 무슨 보석?

“저건 무슨 보석이에요?”

“……헬리오도르.”

“헬리오도르, 그 보석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만 헬리오도르는 저것보다 더 광택이 흐르고 진한 금색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칼라일은 뭔가를 생각하듯 눈을 크게 떴다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헬리오도르……가문에서 내려오는 마력석입니다.”

헬리오도르에서 내려오는 마력석?

“중요한 건가요?”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 안하면 무도회 파트너 바꾸겠어요.”

칼라일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라일?”

“구해주고, 정부로 세워주고, 아껴준 보답으로 생각해주세요.”

상스러운 말들이 입술 언저리까지 차올랐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력석이라니, 그것도 헬리오도르 가문에서 내려오는 마력석이라니!

“그 귀한 것을 지금 귀걸이로 만들어 달라고 줘버린 거예요?”

“괜찮아요. 마법사가 되었다는 징표로 받은 거니까요.”

“그게 아니라, 헬리오도르 가문에서 내려온 거면 가족이 준……그런 거……아니에요?”

가문에서 내려온 마력석, 그렇다면 그건 헬리오도르 가문을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유품이나 다름없을 텐데. 그걸 겨우 무도회 귀걸이로 만들라고 줘버렸다니.

“겨우 무도회 귀걸이입니다. 보석은 모조품으로라도 구하면 되는 거예요.”

“저한테는 아닙니다. 무도회에서……그대가 가장 빛났으면 해요. 그러니 받아주세요.”

“싫어요. 이번에는 아니에요.”

내가 가장 빛났으면 했다는 마음에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은 이제 루치아노와 칼라일, 그리고 그의 동생밖에 없을 텐데. 가문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 중 몇 안 되는 것일 텐데. 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빛났으면 해서 준다고?

“아셀라에게는 모조품으로 보석을 대체하자고 말하고, 다시 가져와야겠어요.”

“로젤리아님. 그럴 필요 없어요.”

“가문에서 내려오는 거라면서요. 칼라일이 그러는 거, 저는 불편해요.”

“…불편해요?”

칼라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입술을 꾹 물었다. 불편한 건 맞았다. 칼라일이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뭔가 스스로를 짐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런 점들이 불편했다는 것이었다.

“칼라일 나는 그대가 불편하다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너무 많이,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 느낌이라 그래요.”

칼라일은 입술이 파르르 떨려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마력석은 다시 찾아올게요.”

로젤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칼라일의 입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요. 제 마력석은 그대를 빛낼 귀걸이가 될 겁니다.”

“칼라일.”

“저는 어쨌든 그대에게 드리고 싶어요. 불편하면 착용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어쩐지 상처받은 표정에 붙잡지 못했다.

그대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칼라일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분명 그 마력석으로 만든다면, 무척 아름다운 귀걸이가 탄생할 거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칼라일님이나 로젤리아님이나, 둘 다 솔직하지 못하네요.”

“루치아노?”

“그 마력석, 헬리오도르 가문에서 내려온 거 아닙니다.”

루치아노는 천천히 손을 펼쳐 무언가를 보여줬다. 흑요석 비슷하게 생긴 조각들이 루치아노의 손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제 마력석입니다.”

“마력석은 광산에서만 캘 수 있는 게 아니었나요?”

“마력석 광산은 그 땅에 마력이 품어져 있기에 생겨난 겁니다. 마법사는 작지만 순간 강하게 마력을 응축하면 마력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게 루치아노의 마력석인가요?”

“그렇죠.”

“칼라일의 마력석은 상당히 컸어요.”

“맞아요. 귀걸이를 만들 수 있는 양의 마력석이었죠.”

루치아노는 만들어낸 마력석을 도로 삼켰다. 마력석을 우드득, 십더니 꿀꺽 삼키자 눈이 금빛으로 반짝이다 가라앉았다.

“만든 마력석을 다시 먹으면 마력은 원래대로 돌아오죠. 마력석을 만들면 그만큼 마력이 줄어들고요. 칼라일님은 아마 로젤리아님이 자신의 마력이 줄어들어서 걱정할까 봐 그랬을 거예요.”

“그럼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가문에서 내려온 마력석이 아니라니, 안도감부터 들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걱정시키기는 싫었겠죠, 다른 사람 눈에는 마력을 돌 형태로 굳혀 몸에서 떼어낸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하지만 로젤리아님. 칼라일님은 마력이 많습니다.”

“얼마나요?”

“그의 몸이 따라줬다면 대마법사가 되었을 정도의 마력이죠. 귀걸이를 만들 정도의 마력석을 뽑아낸 건 그렇게 큰일이 아닙니다. 마법을 쓰는 게 문제지.”

“그렇다고 해도 걱정이에요.”

루치아노는 아주 잠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칼라일이 만든 마력석의 크기는 다른 마법사들이 보자면 꽤 많이 뽑아낸 거겠지만 그에게는 아니다. 마법사가 아니다 못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칼라일에게 사과해야 하는 걸까요.”

“칼라일님이 거짓말을 해서 일어난 일이니 사과는 필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둘 다 솔직하지 못해서 일어난 게 더 크다고 봅니다. 불편한 게 아니라 걱정한 거라고 말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죠. 아마 칼라일님 지금쯤 그대에게 차갑게 말한 것에 대해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머리 쥐어뜯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세게 말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도움이 되려고 뭐든지 할 것 같았어요.”

“어쩔 수 없죠. 칼라일이 그대를….”

루치아노는 저번처럼 또다시 뒷말을 끝맺지 못한 채 가슴 안쪽에서 몰려온 통증에 입을 다물었다.

“루치아노?”

“…뭐가 되었든 칼라일님께도 말해놓을 겁니다. 둘 다 솔직해지세요. 있는 그대로 말하면 훨씬 상황이 나아질 테니까.”

***

아, 기분 나쁘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 루치아노는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저 걱정스러운 표정, 루치아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었다. 뭐지? 어쩐지 저 표정이 나를 향했으면 좋겠다.

루치아노는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에 온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달이 떠올랐을 때, 그렇게 손에 꽃을 피워낸 날, 그때 어느 정도 눈치챈 감정이었다. 하지만, 하지만……아직 낯설었다.

루치아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귀에 걸린 귀걸이의 보석들이 부딪히면서 청아한 소리를 냈지만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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