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왜 사랑하는지.
칼라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을 휘감고 있던 수갑은 떨어졌지만 기분 나쁜 마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칼라일의 뺨을 닦아주다 칼라일의 손목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로젤리아님!”
그 순간 검은색 번개가 내 뺨을 스쳤다. 루치아노가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번개에 몸이 뚫렸을지도 몰랐다.
산산이 부서진 벽을 보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함부로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안 됩니다. 로젤리아님은 현재 마력을 흡수 중 아니십니까.”
“단호하군요.”
“당신이 바란 일 아닙니까.”
루치아노의 손끝이 내 손등을 쓸자 횐 선의 문양이 떠올랐다. 로젤리아는 저 문장을 본 적이 있었다. 칼라일의 동생, 카렐리아의 펜던트에 있던 새겨져 있던 문양. 헬리오도르 가문의 문양.
그날, 내가 루치아노에게 제시한 세 번째 조건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자잘한 마법을 가르쳐줄 것. 물론 강요는 아니었다. 반 진담이자. 반 농담에 가까웠다. 마력을 흡수했으니, 꽃 한 송이 정도는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칼라일이 그렇게 쓰러지고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에 몰두한 탓이었다.
이혼 재판이 끝나고 루치아노가 찾아왔다.
‘마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가르쳐 드리는 것은 정화와 관련된 마법입니다. 그것은 칼라일님을 치료하는데 써주세요.’
나는 내 목에 걸린 마력석을 매만졌다. 마력석의 크기가 이전보다 작아졌다. 루치아노는 그 이유가 마력석을 조금씩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칼라일의 상태가 많이 나쁜 건가요?”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은 마력을 쓰려고 하면 할수록 좀 더, 강하게 속박하죠. 온몸에 있는 마력을 강제적으로 수갑에 속박시킨다고 보면 됩니다. 칼라일님의 마력이 지금 수갑에 속박되고 있죠. 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렇군요. 저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힘 써주시겠어요?”
“그러도록 하죠.”
가만히 칼라일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곁에 앉아있자니 괴로웠다. 분명 칼라일이라면 ‘그대의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죄책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로젤리아님.”
자하실을 나오자 뒤따라 나온 루치아노가 보였다.
“무슨 일이죠?”
“…산책, 하시겠습니까?”
산책이라는 말이 어색한 듯 삐걱거리다 말없이 뒷목을 쓸었다.
“위로라도 해주려고요?”
“위로를 잘 못 하지만 그래도. 칼라일님이 일어났을 때 힘없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 또 우울해할 것 같아서….”
어색함이 뚝뚝 묻어나는 거짓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밖으로 나서자 어둠이 짙게 깔린 것이 보였다. 밤이었다. 저번에 봤던 달은 은색이었는데 이번에는 금색이었다.
루치아노와 함께 뒤뜰을 걷다 문득 정원 앞에 멈춰섰다. 무의식적으로 정원에 왔다. 칼라일과 여기에 왔던 기억 때문인가.
“마법으로 피운 꽃이네요.”
“칼라일이 피워줬습니다.”
“여전히 신기한 마법입니다. 칼라일님이 생명을 피워내는 마법이라면 저는, 생명을 죽이는 마법이니까요.”
“흑마법을 말하는 건가요?”
루치아노가 조심스레 정원에 꽃에 손을 대자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이 닿은 꽃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손에 닿은 꽃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꽃까지 전부 다.
“칼라일님의 마법은 대체적으로 백마법 쪽에 가깝습니다. 헬리오도르 가문의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죠. 칼라일님께 들으셨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황실에서 버려지고 헬리오도르 가문에게 거둬졌습니다. 그곳에서 마법을 배웠죠. 하지만, 저는 헬리오도르 가문의 마법을 익힐 수는 없었습니다. 선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법. 저는 끝내 그런 마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제 마력이 개방된 건,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고 마법책에 둘러싸여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한밤중이었습니다.”
“….”
“제 주변에 있던 꽃들이, 전부 죽었더군요. 흑마법이었습니다.”
재가 된 꽃에서 매캐한 향이 느껴졌다.
“웃기지 않나요? 기껏 개방한 마력으로 사용한 첫 마법이 흑마법을 사용하다니. 저를 거둬준 헬리오도르 가문에서 배운 게 흑마법이라니.”
“칼라일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저는 성인이 된 날, 흑마법을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곧바로 성전에 사제로 들어갔습니다.”
루치아노의 눈은 서글퍼 보였다. 사실 나에게 ‘루치아노’라는 남자는 악독하고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칼라일이 말하길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이 도망칠 때, 저택에 걸어놓은 마력 보호를 그가 풀어줬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칼라일이 루치아노를 만난 이후의 모습, 둘이 장난도 치며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오해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심성은 착한 사람일까.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가만히 올려두었다.
“그래도 잘해주려고 했네요.”
“네?”
“나는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칼라일을 도와주려고 했잖아요? 동생을 찾아주려 하고, 오해를 풀려고 그를 계속 찾아다녔고. 뭐, 그 방법이 조금 과격하기는 했지만…지금은 그를 살리려 애쓰고. 착한 사람이네요, 당신.”
“생명을 죽이는 마법을 쓰는 사람이 뭐가 착하겠습니까?”
“악의를 담아서 죽였나요?”
루치아노는 몸을 흠칫 떨며 고개를 저었다. 꽃 한 송이를 죽이는 것조차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만, 마법이 사람을 규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흑마법을 쓴다고 심성까지 악하지는 않죠.”
“!”
“그거면 된 겁니다. 그거면. 잘했어요. 잘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네요.”
일부러 더 그를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한 오해를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조심스레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 루치아노의 손에 올려놓았다. 꽃잎의 부드러운 결이 루치아노의 살갗과 닿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괜찮다고 토닥였다. 그러자 검은 빛이 두둥실 떠올랐다가 이내 새하얗게 그 색을 바꾸었다. 재가 될 거라 생각했던 꽃이 다시 생기를 띄웠다.
“시들었던 꽃잎이 살아났네요.”
“….”
“생명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어요?”
마법이라는 것은 참 어렵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루치아노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가 작게 중얼거린 순간 꽃이 더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시든 꽃잎에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부분에 푸르른 줄기가 자라고 다시 한번 생을 이어나가려는 듯 꽃봉오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의 손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
아무리 봐도 칼라일이 쓰던 마법과 비슷한 것 같은데?
놀라서 꽃을 뜯어내려고 했지만 루치아노가 먼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꽃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괜찮나요? 당신의 손에 뿌리를 내렸는데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루치아노는 꽃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저에게도 그대라고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대라고 불러달라니?
“칼라일에게만 그대라고 부르시더라고요.”
“아, 그랬나요?”
“저도 그대라고 불리고 싶어요.”
“그래요, 그대라고 불러주죠.”
나는 작게 웃으며 ‘그대’라는 말을 내뱉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졌다. 그 덕분에 루치아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뺨이 붉은 것 빼고는.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칼라일님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겠네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이 춥습니다, 로젤리아님.”
가시죠, 루치아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아, 그리고.”
“?”
“나는 샤를로테가 저지른 악행을 싫어하는 겁니다.”
“네?”
“그러니 모습, 풀고 있어도 됩니다. 이 집에서는 자유롭게 있어줘요. 그대가 원해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적어도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괜찮습니다.”
그 순간 루치아노의 손에 피어난 꽃이 붉게 물들었다.
***
“업무가 너무 많아요, 로젤리아님!”
방대한 양의 서류를 처리하다가 문득 눈을 문질렀다. 그러다 뺨에 잉크가 묻었다. 벌써 사흘 밤낮을 잠도 자지 않았다. 급하게 물려받은 대공의 자리인 탓에 빠르게 일을 익히고 처리해야 했다.
무역과 상단 일, 루비에게 맡긴 신문소에서 내보내는 기사, 각종 가문에서 보내온 선물들에 대한 감사의 편지. 칼라일에게 가본다거나 약속한 마법을 배울 시간도 없었다.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고는 거의 하루를 기절하듯 침대 위로 엎어졌다. 대공의 품위, 그런 걸 신경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도 너무 피곤했다.
내가 다시 일어난 건 새벽이었다. 깨어나게 된 건 뺨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따뜻한 온기에 좋았는데 손길이 오래 닿아있을수록 몸이 점점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프던 어깨도 풀리고, 울리던 두통도 사라졌다.
잠시 그 온기에 기대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칼라일?”
“로젤리아님.”
잠시 칼라일의 모습이 환영인가, 싶다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환영이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칼라일의 손을 잡았다.
손목에 머물던 기분 나쁜 마력이 많이 사라졌다.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이 잠잠해졌다.
로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라일의 얼굴이 빨개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젤리아님, 소, 손 좀!”
“가만히 있어요.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아픈 곳은 또 없어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진정하세요.”
“방금 나한테 마법을 썼어요? 몸이 나아졌는데, 쓰러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마법을 써요?”
“이 정도 마법은 괜찮아요!”
칼라일은 얼굴이 빨개진 채 잡힌 손목을 빼려고 애썼고, 나는 그런 칼라일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루치아노는 그런 칼라일과 나의 모습을 한심하게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시죠?”
“아, 루치아노.”
“루치아노, 나 좀 도와줘….”
“로젤리아님 말이 맞아요. 몸 나은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마법을 써요?”
루치아노는 내가 잡은 칼라일의 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묘한 표정 차이가 일어났다. 루치아노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가가 칼라일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때 루치아노의 머리카락 사이로 무엇인가 밝은 빛이 반짝였다. 루치아노의 귀에 붉은색 보석으로 장식된 귀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보석을 중심으로 수수한 은빛 장식과 함께 끝에 작은 장미꽃잎 형태의 보석이 살짝살짝 흔들렸다.
어제 본 그 꽃이었다.
“그 꽃으로 귀걸이를 만들었어요?”
“네, 만들었어요.”
“잘 어울리네요, 루치아노.”
“그대가 원하면 비슷한 걸 하나 만들어드리죠.”
그대라고? 살짝 중얼거린 칼라일이 표정이 살짝 굳어버렸다.
표정은 웃고 있었는데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듯 애매했다.
“로젤리아님. 아까부터 밖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님?”
“그, 아셀라 드리젤린? 이라는 분께서 오셨어요.”
“아, 아셀라 양이 와줬군요.”
아셀라가 왔다는 말에 겉옷을 걸쳤다. 드레스를 갈아입을까 했지만 어차피 내려가자마자 몇 분 안 지나 여러 벌의 드레스로 갈아입어야 할 게 분명했다.
“칼라일, 몸이 괜찮으면 같이 내려가 줄 수 있어요? 그대가 이번 무도회의 파트너니까.”
“….”
“칼라일?”
“아, 아. 네, 그럼요.”
칼라일은 로젤리아의 손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루치아노가 잡았던 손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팔을 쓸어내리듯 감싸 쥐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어지러워서. 팔을 잡아도 될까요?”
“어깨에 기대도 괜찮아요.”
“아아, 고마워요, 로젤리아님.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어지럽다 하기에는 멀쩡해 보여 이상했지만, 곧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칼라일의 모습에 말없이 등을 쓸어내렸다.
아닌가, 아직 아픈가? 몸이 다 안 나은 건가.
어깨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머리를 쓰다듬자 칼라일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하….’
루치아노는 로젤리아에게 기댄 채 밖으로 나가는 칼라일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잡은 부위에 똑같이 칼라일이 손을 대었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내듯 쓸어내렸다. 그러곤 마치 보란 듯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게 의도한 건지, 아니면 눈을 마주친 것뿐인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말한 이야기들을 눈앞에서 마주해야 할 때, 나는 분명 괴로워해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동시에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루치아노. 나는 그래, 지금이 가장 편한 것 같아. 지금이 가장 좋아, 지금이….’
문득 루치아노는 칼라일과 단둘이 남았을 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때 지었던 표정이 절망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나?
루치아노는 귓가에서 찰랑이는 귀걸이를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