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공이 되어야겠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드레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에게 맞설 때가 아니었다. 칼라일의 손목에서 자꾸만 피가 흘렀다. 금방이라도 그의 얇고 새하얀 손목이 깔끔하게 잘려 바닥으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릴리! 릴리!”
“로젤리아님, 무슨 일이예요, 왜 이렇게 급하신….”
릴리는 말끝을 흐리며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칼라일의 손목을 보고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칼라일의 손목을 꾹 눌렀다. 칼라일이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루치아노는 어디에 있지? 지금 당장 루치아노를 데려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할 틈도 없었다. 칼라일은 식은땀을 흘려가며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당황한 나를 먼저 진정시켰겠지. 하지만 칼라일은 어떻게든 수갑을 벗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수갑이 절그럭거릴 때마다 칼라일은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로젤리아님?”
그때 잠시 외출을 했던 것인지 저택으로 루치아노가 들어왔다.
그리고 칼라일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왜 칼라일님 손목에…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이잖아요!”
마력 제어 수갑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용이라니?
“이걸 누가 채운 겁니까, 마법사에게 이 수갑을 채우는 것은 거의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요.”
루치아노가 수갑에 손을 대자 검은 빛이 번쩍였다. 칼라일은 고개를 축 숙인 채 자신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샤를로테가 채운 거야. 갑자기 기사들이 오더니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고, 순식간에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어.”
그 말에 루치아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수갑 위로 검은색 보호막 같은 형체가 떠올랐다. 철을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자꾸만 루치아노의 손을 튕겨냈다. 루치아노는 몇 번이고 튕겨나간 손을 문지르며 칼라일을 부축했다.
“로젤리아님, 지하실을 써도 될까요?”
“이 저택의 지하실을 말인가요?”
“네,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이 수갑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칼라일은 부축을 받았음에도 심하게 비틀거렸다. 손목이 점점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숨을 겨우 몰아쉬더니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는 심장 부근을 움켜잡았다.
“흐윽, 으…!”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습에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을 칼로 찌르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죄책감이 온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잘 봤어야 했는데, 내가 먼저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죽으려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칼라일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나는 이제 황후가 아니니 황제가 만든 법에 이의를 제시하지 못한다.
마법에 대한 지식도 얄팍해, 도움을 줄 수 없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루치아노가 수갑을 풀 수 있을까?
그래, 만약, 내가.
이혼을, 무른다면….
“로젤리아.”
뺨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칼라일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붉은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겨주었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챙기고 있었다.
“로젤리아, 머리를 맑게, 집중하세요. 현명하게 생각하세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대는 로젤리아 가넷입니다. 현명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줄 알고.”
“그대답지 않은 생각을 했겠죠.”
그에게서 느껴지는 흐릿한 피 냄새에,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대공의 서재로 갔다.
루벨라이트 대공이 내게 가르칠 교육과 업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서류들과 서적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버지. 지금 당장 후계자 교육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말이냐?”
내가 이혼을 무른다고? 내가? 아니, 난 이혼을 무르지 않아.
“네. 지금 당장이요.”
페르소나, 샤를로테.
네가 감히 누구를 건드린 건지 똑똑히 보여주겠어.
”대공이 되어야겠습니다.”
***
이혼 재판 당일이 되었다.
제국 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날, 재판은 신전에서 진행되었다. 이혼이라는 전례가 없던 탓에 사제들과의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특히 대신관의 얼굴이 가장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와 페르소나에게 부부로서의 축복을 내려주었던 탓일까.
나는 신전 한 가운데에 서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칼라일에게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을 채운 날, 그날 나는 한순간 황후로 돌아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황후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페르소나가 바라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페르소나는 내가 ‘내 사람’을 끔찍이 챙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전부 할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 정부인 칼라일을 건드린다면, 지금의 불편한 상황이 이전처럼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주변 사람을 위협하면 내가 다시 고분고분해질 거라고 생각했나?
“지금부터 이혼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멍청한 페르소나.
나는 페르소나의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황후.”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지금이라도 이혼을 무를 생각 없소?”
“제가 왜 물러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제 주변 사람을 위협하면,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내가 차갑게 대꾸하자 페르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앞을 응시했다.
대신관은 헛기침을 하자 신전 안을 가득 메우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렇게 이혼 재판을 맡게 되어서 꽤 유감이군요. 그럼 지금부터 이혼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레이몬드 제국의 황제, 페르소나 레이몬드. 황후 로젤리아 레이몬드.”
대신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로젤리아 황후의 소송서에 따르면 황제 페르소나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바로 어제, 페르소나 황제가 이혼에 동의했습니다.”
이혼에 동의를 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황후였을 때나 지금이나, 그는 내게 제대로 된 속마음을 말한 적이 없었다. 답답했던 적도 많았다.
분명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분노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왜 그딴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바라는 순간이었는데, 왜 이러는 거지?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페르소나 황제, 이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젤리아 황후. 그대 또한 이 이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어서 이 재판이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럼 이로써 두 사람의 이혼 사실을 공표합니다.”
그리고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 커다란 탄성,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신전을 가득 메웠다.
무사히 끝이 났다.
다행이다.
재판하기까지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보냈다거나 긴 시간을 기다린 게 아닌데도 ‘이제야 끝났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페르소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순간, 샤를로테가 신전 한 가운데로 난입했다.
“그럼 이혼 재판이 끝난 건가요?”
“이혼 재판은 끝이 났습니다,”
“그럼 제가 한 가지 사실을 발표해도 될까요?”
페르소나는 ‘제가 왜 저러지?’라는 얼굴로 샤를로테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득 모이고 내 평판이 떨어지고 있는 이 순간만큼 좋은 상황은 없을 테니까.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샤를로테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샤를로테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 이내 천사처럼 웃으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 뱃속에, 폐하의 아이가 들어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가졌다고?
“이것 참, 축복할 만한 이야기군.”
“맞아요, 축복할 이야기죠. 폐하를 닮았으면 좋겠네요.”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이혼을 한 날, 바로 황후의 회임 소식을 듣게 되다니.
하지만 페르소나의 얼굴은 생각보다 떨떠름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가 네 아이를 가졌잖아. 더 기뻐하지 그래?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저렇게 배를 쓰다듬으며 기뻐하던 순간이 있었는데….
“로젤리아 영애. 그대에게 축복이 담긴 말을 듣고 싶은데요.”
샤를로테는 고운 미소를 지르며 내게 다가왔다. 저 여유 만만한 미소, 별처럼 웃는 샤를로테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똑같이 웃었다. 그러자 샤를로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샤를로테 레이몬드.”
내 입에서 레이몬드라는 표현이 나오자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안타깝다는 반응, 비웃는 반응, 화가 난 듯한 반응.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샤를로테의 배를 쓰다듬었다. 샤를로테가 움찔거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축복하죠. 당신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겠습니다.”
다시 한 번 신전 안이 조용해졌다. 대신관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샤를로테가 했던 것처럼 잠시 뜸을 들이다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아기를 축복했다.
“레이몬드 제국의 ‘가넷 대공’으로서.”
로젤리아 영애가 아니라 한 제국의 대공으로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아이를 축복합니다.”
샤를로테의 아이를 축복했다.
“가넷 대공으로서의 축복이 마음에 안 드나요, 샤를로테?”
내가 상냥하게 되묻자, 신전은 이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할 때보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났다.
가넷 대공.
황실과 맞먹는 가문의 대공 자리를 이혼한 황후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로젤리아는 싱긋, 웃으며 샤를로테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기를 축복한 것은 진심이었다. 아기는 죄가 없으니까. 죄가 있는 건 샤를로테와 페르소나 너겠지.
샤를로테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 예쁘던 눈이 저렇게 독하게 변한 것에 감탄하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걸 어쩌니, 주목받는 건 네 아기가 아니라 나인 것 같네.”
“네가 감히!”
“감히라고? 아직도 모르겠니? 지금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다는 것을.”
팔을 뻗어 샤를로테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끌어안았다.
이로서 수도에는 나를 비난의 목소리보다는 가엾다, 안타깝다, 이혼했음에도 황제의 아이를 가진 정부를 축복해주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돌게 될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내 뒤에 있는 귀족들의 눈에 샤를로테가 보이지 않도록 몸으로 가렸다. 그리고 샤를로테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배를 감싸 쥐었다.
그때 페르소나가 내 팔을 잡고 말렸다. 말린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자기 아이를 가진 샤를로테를 보호하기 위해 막아선 것인지. 하지만 페르소나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등 위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꽉 쥐고 있었지만, 그의 눈앞에 서있는 여성은 이제 이혼한 황후도 가넷 가의 평범한 여식도 아니었다. 대공이었다.
새 황후가 될 여자의 임신과 황실과 맞먹는 권력을 쥐게 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신전이 시끌벅적해졌다.
“당신은 참 독한 여자로군.”
“독하게 만든 게 누군지 목 위에 머리란 것이 달려있다면 생각해보십시오.”
“로젤리아!”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이더군요.”
나는 붉은색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신전으로 오기 전, 지하실을 찾아갔다가 칼라일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 문도 두드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물용 마력 제어 수갑 때문에. 페르소나, 샤를로테. 너 때문에….
나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협박성이 짙은 어조로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어디 한번 계속해보십시오. 제 사람을 계속 위협해보세요. 제 사람을 건드린 대가는 똑똑히 치르게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