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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22화 (22/170)

#22화, 마력 제어 수갑

나는 루치아노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칼라일이 생각보다 유순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치아노? 지금 뭐하는 것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사과입니다. 칼라일님 손 매운 건 아시나요? 저는 칼라일님께 맞을 바에야 허리 숙여 사과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허리를 그렇게까지 숙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정성스럽게 사과 안 했다고 화를 내서요.”

들고 있던 서류로 얼굴을 가렸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해야 하면 좋을지, 나는 급하게 손을 휘적거렸다. 사과를 받겠다는 신호였다. 루치아노는 그제야 숙였던 허리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운 흔적이 남아있길래, 대화하는 내내 울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어제 얘기를 나눴다고 했는데, 그때 맞았나 보네요.”

“로젤리아님과 릴리 양을 위협했다고, 솔직히 많이 맞았습니다. 마법으로 패대기 당하신 적 없으시죠. 많이 아픕니다.”

“이렇게 말이 많을 줄은 몰랐네요.”

“말이 많을 수도 있죠. 그때는 어떻게든…칼라일님을 만나야 해서요.”

“일부러 협박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정말로 뻔뻔한 사람이군요. 나는 뒷말을 삼킨 채 서류를 넘겼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죠?”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부탁?”

“이 집에서 머물게 해주십시오.”

“머물게 해 달라?”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왜 머물게 해달라는 거죠?”

루치아노는 잠시 망설이더니 품에서 작은 팬던트를 꺼냈다. 금빛 줄과 연결된 은색 팬던트. 그 팬던트는 어쩐지 밝고 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는 루치아노가 건네준 팬던트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이게 무엇이죠?”

“카렐리아님의 펜던트입니다.”

“카렐리아?”

“칼라일님의 동생입니다.”

칼라일이 말했던 잃어버린 그 동생?

“칼라일님은 자유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는 몸이 아니니, 제가 대신 카렐리아를 찾아보려 합니다.”

“찾을 수 있나요?”

“보시다시피 저는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능통합니다. 그 주변을 계속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펜던트에는 마력이 남아있습니다. 그 마력과 비슷한 마력을 역 추적해 찾으면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력이라. 그럼 아까부터 팬던트를 두르고 있는 이 하얀 띠 같은 게 마력인 건가?

“이 얇은 빛 같은 게 그 마력인 건가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상한 빛, 이 하얀색, 이걸 뭐라고 부르죠?”

루치아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혹시 이 가문도 마법사 가문인가요?”

“아닙니다.”

“…지금 로젤리아님이 말씀하신 것 마력 맞습니다. 하지만 마력을 감지지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뿐입니다.”

마법사만 감지할 수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잠시 펜던트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계속 세실리아가 준 마력석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마력석인 것을 떠나 세련된 디자인도 좋고 드레스에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스타일이라 계속 걸고 있었는데.

“이게 마력석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목걸이를 건네주자 루치아노는 한참동안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이중 마법이 걸린 마력석은 상당히 희귀한데, 이걸 어떻게 가지고 계신 겁니까?”

“저희 제국에는 마력석을 캘 수 있는 광산이 있습니다. 그 광산을 소유하는 가문의 영애에게 받았죠.”

“이 목걸이를 계속 차고 있었다면 소량의 마력이 몸으로 흡수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마력석을 오래 품고 있다가 마법사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였나 봅니다.”

마법사라, 목걸이를 손으로 굴렸다. 손에 마력석이 닿자 살짝 반짝이듯 환해졌다. 그 순간 칼라일의 손에서 작은 빛과 함께 꽃이 피어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마법을 쓰는 것이 부러웠던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했죠?”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요?”

“첫째, 칼라일의 동생을 찾는데 있어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카렐리아의 행방을 찾아주세요. 둘째는 카렐리아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일을 나와 당신 둘만이 알고 있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력석을 손에 쥔 채 살짝 웃었다.

“마법사 가문 소속이었다면, 마법에 대해 잘 알겠네요?”

***

“로젤리아님. 정말 괜찮은 건가요? 시선이 다 집중되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서요. 뭘 그렇게 어색해 해요, 칼라일.”

그게 말 같이 되나요! 칼라일은 주변에 몰려드는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전 황후, 그리고 그 옆에는 기사로만 나오던 그 황후의 정부.

나는 자연스럽게 걸으라며 허리를 툭 쳤다가 칼라일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봐야 했다.

“칼라일, 그렇게 부끄러워요?”

“그, 그게 아니라! 로젤리아님. 지금 가는 곳이 아셀라 의상실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아셀라 의상실에서 내 옷과 그대의 옷 모두 맞출 겁니다.”

“그, 근데, 내일 모레가, 이혼 재판이잖아요….”

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건가.

그제야 칼라일이 왜 그렇게까지 주변 눈치를 살피는지 알 수 있었다.

루치아노가 찾아오고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이틀 뒷면 이혼 재판이었다.

그 사이 페르소나는 협박인지 아니면 설득인지 모를 편지를 보냈지만 그대로 난로에 던졌다. 미안하다는 말 한 줄도 없었다. 뭐,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끓는 건 맞았다. 뻔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태도. 얼마나 거만한 태도로 꾸역꾸역 편지를 썼을까, 웃기면서도 화가 났다.

“칼라일, 내가 눈치를 봐야 하나요?”

“그건 아니에요, 이 이혼 재판에 당신의 잘못은 없으니까. 다만 그대가 저를 걱정했던 것처럼, 저도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수군거리는 소리, 그대를 헐뜯는 소리, 좋은 소리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 칼라일 그대가 더욱 도와줘야 하죠.”

“네?”

“나의 잘생기고, 키도 크고 마법사인 정부 칼라일. 안 그런가요?”

알아들었으면 팔짱 끼는 것까지는 허용해줄게요. 그의 팔을 잡고 속삭이자 칼라일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사람 놀리는 게 재미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알아서 안 될 무언가를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나를 걱정하느라 계속 주변을 살피는 게 상당히 귀여웠다.

“그럼…저도 로젤리아님의 정부처럼 행동해야겠네요?”

“?”

칼라일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장난 반으로 내밀었던 팔에 팔을 걸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칼라일의 귀처럼 내 얼굴도 점점 붉어짐이 느껴졌다.

“로젤리아.”

“!”

“오늘은 얼마나 더 예쁠까? 사랑스러운 나의 로젤리아.”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시선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맞닿은 부분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칼라일은 무척 당당한 태도였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거지? 어색해하던 모습은 전혀 없었다. 얄미워서 볼을 쭉 잡아당기고 싶었다.

“로젤리아님!”

그때 어디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리아였다.

“세실리아 양.”

“로젤리아님, 지금 어디 가시는 길, 앗! 칼라일님도 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세실리아 양.”

“설마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중인데, 제가 방해한 건가요?”

오붓한 시간? 익숙하지 않은 낯간지러운 말에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칼라일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무척 오붓한 시간이었지만 그건 세실리아 영애가 와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어머나!”

방금까지의 칼라일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말없이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칼라일은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세실리아 양, 저희는 지금 아셀라 의상실에 가고 있었습니다. 로젤리아님의 새 드레스를 맞추려고요.”

“아, 저는 아셀라 의상실에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이번에 새로 출시된 초록색 드레스를 보셨나요? 얼마나 예쁜지, 이번에 꼭 황실 무도회에 입고 가고 싶어요! 로젤리아님도 황실…무도회….”

세실리아는 뺨을 감싼 채 황실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늘여놓다가 돌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도회는 이혼 재판 다음날이니까.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이 새파래지기 전에 빠르게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혼 재판을 끝낸 날 기념으로 작게 파티를 열 생각입니다. 세실리아 양도 꼭 올 거죠?”

“그럼요! 불러만 주세요! 파티 케이크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진 세실리아는 어서 돌아가 케이크를 준비해야겠다며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무도회를 이혼 재판 다음날로 잡아버린 페르소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겨우 참았다.

그때 칼라일이 내 팔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어쩐지 시무룩해보였다.

“저랑 나오신 거잖아요, 저한테 더 신경써주세요.”

“세실리아 영애가 와도 오붓한 분위기는 깨지 않는다면서요?”

“파티 한다는 건 못 들었어요.”

“서운했어요?”

“아니요.”

“서운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삐졌어?”

“아니에요!”

그러더니 세실리아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간다.

그쪽이 아니라고 외치자 우뚝 멈추다가, 다시 옆으로 쪼르르 와 내 옆에 와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페르소나를 향한 원망이 누그러졌다.

대신 ‘귀엽다’는 말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

“화, 황후, 폐하, 아니, 로젤, 아니….”

“로젤리아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아, 네! 로젤리아님. 이쪽으로.”

나는 아셀라의 안내를 받으며 의상실 안쪽에 있는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에는 귀족들을 위해 따로 구비해놓은 수 백 벌의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확실히 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의상실다웠다. 드레스에 관심이 없는 나조차 확실히 ‘입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드레스들이 가득했다.

“아셀라, 오늘은 황실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사러 왔어요.”

아셀라가 또다시 혼란스러워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이혼 재판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드레스를 골라줄래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젤리아님.”

아셀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레스가 가득 쌓인 곳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이 의상실 주인과 친하신가요?”

“아, 내가 황실에 있을 때 드레스를 맡아주던 전담 디자이너였어요, 샤를로테 때문에 쫓겨났지만요.”

아셀라 드리젤린. 제국에서 제일가는 디자이너이자, 모든 영애들이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드레스를 만드는 의상실의 주인.

처음에는 내 드레스를 전담하던 디자이너였으나, 이후 샤를로테가 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녀는 한순간에 황실 디자이너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유는 ‘실 하나가 튀어나왔기’ 때문에.

페르소나는 황후 전담이었던 그녀를 정부의 드레스마저 함께 만들게 했는데, 샤를로테의 무리한 요구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작업에만 몰두해야 했다. 그러다 샤를로테가 처음 파티에 참석한 날, 드레스에 실이 빠져나온 걸 한 영애가 알아차렸고, 비웃음을 당했다.

아셀라는 결국 황실 디자이너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아셀라 자신의 의상실을 열수 있도록 손을 썼다.

그리고 지금까지 의상실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참 잔인한 여자예요.”

“그대의 말이 옳아요. 잔인한 여자죠.”

나는 칼라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렇게 말해서 불편한가요?”

“그럴 리가요, 나는 이제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문제는 저와 샤를로테가 아니라, 저거겠죠?”

칼라일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아셀라가 드레스를 가득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드레스가 도대체 몇 벌인 거야? 내가 기겁을 하자 아셀라는 환하게 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이거 전부 입으셔야 합니다.”

뒤에서 칼라일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

정신적으로 피곤함을 느끼며 스물네 번째 드레스를 들고 나왔다. 드레스가 하나같이 예뻤지만 이렇게 연속해서 입는 건 힘들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레이스가 많이 달린 건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정돈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아셀라와 칼라일이 보이지 않았다.

“칼라일, 아셀라……?”

그러다 의상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황실 마차.

“오랜만이군, 황후.”

귀빈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보였다.

드레스라도 사 온 건가? 이렇게 황제와 황후가 직접?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생각도 잠시, 로젤리아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피를 보며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케도니아 제국 출신이더군.”

칼라일은 황실 기사단한테 붙잡힌 채 손목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법사 가문 출신, 그러나, 황후. 우리 레이몬드 제국은 다른 제국의 마법사가 거주할 경우, 일시적으로 제한을 가한다.”

“레이몬드 제국에는 그런 법 따위는 없습니다.”

“내가 만들었다면 사정은 달라지지.”

칼라일의 손목 위로 수갑이 채워진 게 보였다. 그 수갑에는 기분 나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뱀처럼, 칼라일의 손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손목을 본 그 순간, 그 마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딱 한 번이지만, 그때는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던 때였고, 다만 존재 자체로도 기분이 나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력 제어 수갑!’

피식, 어디선가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안을 제안해낸 게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칼라일에 대해 잘 알고, 칼라일의 부모님이 마력을 찾아준 여자.

루치아노가 말한 것처럼 목걸이에 달린 마력석이 몸으로 흡수된 것인지, 어디선가 기분 나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혼 재판을 앞두고 드레스라니, 정말 주변 눈치를 보지 않으시군요?”

그 기분 나쁜 마력은 샤를로테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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