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깊은 절망감.
‘흐릿한 꽃향기…….’
코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향기에 눈을 떴다. 좋은 향이다. 어디서 불어온 향이지? 칼라일이 피워놓은 정원에서 날아온 향인가?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창문 위로 달이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회색빛으로 빛나는 보름달, 슬슬 겨울이 찾아와서 그런지 어깨가 떨렸다. 새벽인 건가,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달이 오늘따라 유독 가까웠다.
멀리서만 보이던 달이 어쩐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작게 탄성을 질렀다.
등불을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분명 정원에서 보면 더 아름다울 것이다.
특히 칼라일이 꽃을 피워준 그 정원이라면.
혹여나 저택에서 머무는 시종들이 잠에서 깰까, 칼라일이 발소리를 듣고 일어날까 조용히 복도를 내려갔다.
내 발걸음은 저택 정원으로 향했다. 발목에 풀이 스쳤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들린 순간, 어디선가 영롱한 빛을 띤 꽃잎이 날아왔다.
연분홍색 꽃잎인데 어쩐지 반딧불이 마냥 흰색의 빛을 품은 듯했다. 나도 모르게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 꽃잎이 닿으려던 순간 등불을 놓쳤다. 비틀거리는 몸과, 중심을 잡지 못한 발이 꼬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바닥에 부딪히면서 생긴 통증은 없었다.
“아직 새벽이에요.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눈을 조심스레 뜨자 칼라일이 보였다. 그 뒤로 정원 나무가 보였다. 왜 벌써 정원이지? 분명 정원으로 가고 있던 길이었는데.
“새벽은 위험해요.”
“칼라일, 몸은 괜찮은 건가요?”
“이미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군요. 걱정했습니다. 열이 통 내려가지 않아서. 그리고 루치아노와 대화 도중 또 싸울까 봐.”
칼라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자 선명한 은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미세하게 흔들리던 눈동자는 이내 눈꼬리와 함께 호선을 그렸다.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돌아간 이후, 나는 루치아노와 칼라일을 만나게 해줬다.
그 둘은 밤늦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어쩐지 문 근처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다가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는 수없이 밤늦게까지 기다렸지만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를 상대했기 때문인지 몰려오는 피곤함에 결국 먼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매번 로젤리아님께 걱정만 받는군요.”
그때 눈앞으로 꽃 한 송이가 살랑거리며 떨어졌다.
“또 마법을 쓴 건가요, 칼라일? 몸이 더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로젤리아님이 꽃이 가득 핀 정원을 좋아하시니까. 마법으로 피워낸 꽃은 시간이 짧아요.”
칼라일은 내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조심히 손에 거둬냈다. 예쁘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칼라일은 기쁜 듯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칼라일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내 어깨 위에 걸쳐주며 나무 밑동에 나를 앉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잔디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나풀거리면서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루치아노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랬군요.”
“무엇을 얘기했는지,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물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따로 있죠. 다만 그대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네요.”
“아프지 않았어요.”
“대답이 과거로군요. 지금은요?”
은빛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말끝을 흐리는 칼라일의 뺨에 흐릿한 선 하나가 그어져 있는 게 보았다. 물이 말라붙은 것 같은 자국.
울었구나.
그때 루치아노와 칼라일이 함께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둘 사이에 있을지 모를 갈등을 풀었으면 해서 그런 것인데, 그리고 혹시나 칼라일이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잘못된 결정이었나.
“정말 아프지 않은 것 맞죠?”
“네?”
“그대가 운 것 같아서.”
“!”
칼라일은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꾹 눌렀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었다.
“왜 웃는 건가요?”
“그대가 걱정해주니 참 좋군요.”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데…….”
“그러니 말입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걱정을 해주십니까.”
“그대는 내 정부입니다.”
“저의 이기적인 의지로 된 정부죠. 동생을 찾기 위해, 제가 그날 그대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심지어 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잖아요. 이것도 제 욕심이죠.”
아무것도 해주지 않기는 계속 마법으로 구해줬으면서.
“나는 그대를 정부로 들인 것에 후회하지 않아요.”
“저 때문에 사교 모임에도 못 나가시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칼라일을 정부로 들인 것.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평가가 분분해진 건 맞았다. 사교계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도 ‘정부 칼라일’에 대한 관심을 두는 영애들 때문이었다.
그날 세피노와 칼라일의 싸움을 목격한 다른 영애들의 입단속을 시켰지만 칼라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빠르게 퍼져나갔다.
여러 부분에서 보자면, 특히 칼라일의 시점에서는 내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사교 모임에 나갈 상황이 아닌 탓이었다.
곧 열릴 이혼 재판, 대공의 후계자 교육. 아버지의 일도 슬슬 배워야 한다. 모임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
“그때 그대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고, 도와준 것뿐입니다. 만약 내게 불리한 상황이었다면, 그랬다면 저는 그대를 그대로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을 뿐, 칼라일 때문이 아니었다.
“충분히 도와줘도 되는 상황이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래도, 그대는 전 황후입니다. 제가 비록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계속 떠돌고 있다는 걸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죠?”
“제가 그대의 정부이기 때문에요. 목숨을 위협받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기꺼이 안아주고 도와준 분이 로젤리아님이고, 제가 그대를….”
칼라일은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
귀가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점 얼굴 전체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하려고 더듬더듬 단어들을 내뱉더니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숙인 칼라일을 보며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뭐지? 갑자기 왜 이래? 또 열이 오른 건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아무튼! 그러니까! 저를, 정부로, 후회하지, 않으시는, 거죠?”
“후회해드릴까요?”
“아니요, 후회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칼라일도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하지만?”
“그게, 루치아노가 말해 줬는걸요.”
“루치아노가요?”
어쩐지 상스러운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칼라일님, 칼라일님, 하고 노래 부르더니 또 무슨 말을 했길래 이러는 걸까.
“루치아노가 저를 찾을 때,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했어요. 어떤 남자가 로젤리아씨의 정부가 된 뒤로, 평판이 엄청 나빠졌다고, 좋은 황후였는데 이상한 놈이 붙어서 그걸 다 깎아먹는다고...”
“….”
“그놈이 저잖아요….”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눌러놓은 채 칼라일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뜨겁다고 생각될 정도의 열기가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로, 로, 로젤리아, 님?”
“저는 그대를 정부로 들인 것에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 소문은 듣지 마세요. 칼라일, 그대가 나를 도와준 것은 생각하지 않나요? 그대는 나를 많이 도와줬어요. 마법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간다고 했는데도, 나를 여러 번 구해줬어요. 한 번만 더 그런 생각하면 정말 화냅니다.”
“!”
뺨을 놓아주자 칼라일은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 하며 칼라일을 토닥였다. 어쩌지, 화낸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칼라일이 울음을 그칠만한 주제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굴렸다. 최근 황후 시절처럼 머리를 굴린 적이 없다 보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며칠 전에 받은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떠올랐다.
“아, 무도회.”
“네…?”
울음을 그치게 할 소재를 찾다보니 문득 그 초대장이 생각났다.
“칼라일, 내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주지 않겠어요?”
“무도회 파트너요?”
“황실 무도회, 저는 전 황후니 참가해야겠죠. 남들에게 이혼을 했다면서 눈치가 보여서 안 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상관없어요. 저야 영광이죠. 하지만 이혼 재판이 일주일 뒤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칼라일은 어느새 울음을 그친 채 얼굴을 이상한 형태로 구겼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칼라일의 얼굴을 꾹꾹 눌렀다. 이혼 재판과, 무도회. 무도회를 하고 이혼 재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페르소나는 왜 그때 무도회를 준비한 것일까. 아마 페르소나도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이미 준비를 다 한 무도회를 취소하지는 못하겠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칼라일은 ‘설마’하고 중얼거렸다.
“무도회가 언제예요?”
“재판하고 바로 다음 날이에요.”
무덤덤한 내 말에 기껏 펼쳤던 그의 얼굴이 다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황제 제정신인가요?”
“제정신이 아니니까 내가 이혼을 했죠.”
***
루치아노는 창문에 기댄 채 어깨에 있는 상처를 붕대로 압박했다. 창문 너머로 칼라일과 로젤리아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칼라일님도 대단하네. 나 같으면 저렇게 태연하게 있지 못할 텐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루치아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있었던 일들, 내가 가지고 도망친 물건들, 그리고 나의 누나, 샤를로테 안케도니아까지. 그리고….
왜 하필 로젤리아 가넷일까. 우연도 이렇게 끔찍한 우연은 없다.
그때 칼라일이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제대로 확인 한 거 맞아? 어떻게 그래?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어?
그의 눈에 깊은 절망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어쩐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 하필, 저 여자인 것인지.
이혼한 황후였다니. 페르소나 황제의 반려라니.
도저히 잘한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전해야 하는 말이었다. 해야 하는 말이었지만, 분명 그래야 했지만.
-그럴 리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는 이제 뭘 해야 해?
루치아노는 자신의 눈을 꾹꾹 눌렀다. 전해야 할 말은 다 전했다. 그러니 그 이후의 선택은 전부 칼라일의 몫이었다. 그 사실을 혼자 죽을 때까지 품을 것인지, 아니면 전부 털어놓을지.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둘을 향했다.
멀리서 보이는 칼라일의 얼굴에는 여전히 절망이 남아있었다.
억지로 짓는 웃는 낯이 그것을 겨우 가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