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루치아노 엘렌.
소매로 황급하게 칼라일의 뺨을 닦았다. 흐릿한 피비린내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눈물이 아니라 피라니, 칼라일은 나에게 부축을 받으며 칼라일이 말한 루치아노라는 남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샤를로테와 꼭 닮은 얼굴, 샤를로테 안케도니아가 떠오르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 샤를로테와 관련된 사람인 건가?
칼라일의 눈은 핏줄이 터진 건지 점점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칼라일,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괜찮아요, 로젤리아님, 뒤로 물러나세요.”
내가 그의 팔을 지그시 누르자, 한참이나 떨리던 칼라일의 어깨가 잠시나마 멈췄다.
“칼라일, 저 사람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어요…미안해요, 저 때문이에요. 다 저 때문이에요.”
칼라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루치아노의 어깨에 박혀있던 가시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루치아노는 가시가 박혔던 어깨를 매만지더니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칼라일은 나에게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워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던 릴리를 보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루치아노.”
“칼라일님.”
쓰러진 릴리를 일으키다 말고 잠시 멈춰 두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
“….”
칼라일은 손에 힘줄이 돋아난 채 아무 말 없이 루치아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정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피눈물이 말라붙은 창백한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겨우 입을 떼고 말했다.
“네 누나가 페르소나 황제의 정부가 되었다.”
‘네 누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누나, 그럼 저 남자, 루치아노라는 사람이 샤를로테의 동생?
안케도니아 황실의 황자?
칼라일은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다급한 표정으로 무슨 소리냐고 말하는 루치아노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칼라일님, 누나, 아니, 샤를로테가 정부가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걸 알고 싶어서 나를 찾아온 거잖아.”
“아니에요, 일단. 일단, 제 얘기부터 들어주세요, 칼라일님.”
“아니, 순서는 네가 먼저가 아니야. 너는 가장 나중이다, 지금은 아니야.”
칼라일의 고개가 나로 향했다. 그가 루치아노의 이마를 툭 친 순간, 마법진과 함께 루치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치아노가 서 있던 자리에는 흐릿한 흰색 연기만 남아있었다.
“릴리 양.”
칼라일은 곧바로 나와 함께 릴리를 부축했다. 그러나 릴리는 도리어 칼라일의 팔을 세게 쳐냈다. 릴리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당장이라도 칼라일을 한 대 치려는 듯했지만 몸에 힘이 없어 팔조차 들지 못했다.
“순서가 틀렸잖아. 내가 먼저가 아니야. 로젤리아님이 먼저라고 말했어야지. 로젤리아님, 저는 괜찮습니다.”
“릴리, 땀을 이렇게 흘리는데, 일단 치료부터 받으렴. 의사를 불러줄 테니까….”
“전 괜찮아요. 지금은 제가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니에요.”
릴리는 바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났다. 그런 릴리의 모습에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릴리의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루치아노라는 남자와 샤를로테와 칼라일, 이 세 사람의 관계가 가장 중요했다.
칼라일의 상태는 안 좋았다. 피가 말라붙은 뺨, 빨갛게 변한 눈.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나는 드레스 소매로 칼라일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눈동자가 붉었다. 착각이 아니었나? 붉은빛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걱정을 해주시는 건가요?”
“걱정해주면 안 되는 거였나요?”
“묻고 싶은 게 많지 않은가요, 내가 그대였어도. 많았을 것 같은데.”
“많은 건 많은 거고, 일단은 치료가 급한 듯해서.”
급한 대로 칼라일을 침실로 데려갔다. 집무실은 바닥에 금이 가고 난장판이라 시종들이 집무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해두고는 릴리를 치료해줄 의사를 불렀다.
칼라일의 눈은 피가 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피처럼 붉었다. 의사에게 따로 받아온 의약용품을 옆에 두고는 칼라일의 눈을 살폈다. 칼라일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칼라일. 여기 봐야 해요. 아까 눈에서 피가 났잖아요.”
“눈은 괜찮아요. 마력을 과도하게 쓰면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요.”
마력을 과도하게 쓰면 눈에서 피가 난다고? 나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칼라일을 뺨을 일부러 힘주어 문질렀다.
“로젤리아님. 아, 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예요. 앞으로 정말 심각한 상황 아니면 마법을 쓰지 말아요.”
“화나셨어요?”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제가 집무실을 다 부숴놓아서…그래서 그런 건가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집무실이 부서진 건 그대의 마법 때문이지만, 원인은 루치아노라는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루치아노 엘렌이에요. 안케도니아 제국의 대사제였죠.”
“아까 샤를로테를 누나라고 부른 것을 들었어요. 왜 엘렌이죠?”
루치아노 엘렌. 루치아노 안케도니아가 아니라?
“샤를로테 동생인 것은 맞지만, 루치아노는 안케도니아의 황자가 아닙니다. 어릴 적 황실에서 쫓겨났고, 이후 제가 그를 거둬 헬리오도르 가문의 일원으로 살게끔 보살폈어요. 이후 계속 도움만 받을 수는 없다면서 성인이 되자마자 신전의 사제로 들어갔지만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칼라일은 잠시 입술을 꾹 물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 당한 그날. 저희 가문은 타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포함한 숙부님과 다른 사람들도요. 원래는 루치아노도 함께 도망칠 예정이었는데…갑자기 저택 안으로 기사들이 들이닥쳤어요.”
그때의 일을 생각하기 힘든지 창백해진 낯빛으로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헬리오도르 저택은 마력으로 이중 보호되어 있어 기사들이 절대 뚫을 수 없습니다. 가문 사람이 아닌 이상 웬만한 실력 있는 마법사도 뚫기 어렵습니다.”
설마 그걸 뚫은 사람이 루치아노라는 건가?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렇게 많은 기사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었어요. 결국 숙부님이 혼자 기사들을 막았고 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지하실을 통해 빠져나갔죠.”
“….”
“그리고 지하실로 들어가기 전 저택 밖에 서 있는 루치아노와 눈이 마주쳤어요.”
기사들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저택 밖에 혼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저택을 감싸고 있던 마력 보호를 풀어버린 자는, 루치아노가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칼라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까 칼라일이 루치아노를 봤을 때 그렇게 화를 낸 것일까.
칼라일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손을 뻗어 내 목 부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목이 따가웠다. 아까 루치아노가 잡았던 부위에 멍이라도 든 건지 계속 욱신거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하려다 그만뒀다.
다만 샤를로테가 나타난 이후부터 내 일상이 조금씩 어지럽혀지고 있다는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로젤리아님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다치고, 집무실이 엉망이 되고….”
“그건 괜찮아요. 루치아노를 만날 건가요?”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또 로젤리아님 앞에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차라리 제가 먼저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칼라일은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내 목에 든 멍을 없애주며 조용히 말했다.
“만나러 갔다 와도, 될까요?”
“지금 나한테 허락을 받는 거예요?”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요. 제가 만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보여서요.”
만나지 않기를 바란 것은 맞다. 릴리를 다치게 했고 나를 위협했다. 그리고 칼라일이 말한 것처럼 정말 그날 타국의 기사들이 저택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마력 보호를 풀어버렸다면? 왜 뒤늦게 나타나 칼라일을 만나고자 했지?
아무튼 칼라일이 혼자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칼라일은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얼굴도 아직 빨갰고, 숨도 거칠었다.
나는 멍이 사라진 목을 천천히 더듬었다.
“루치아노를 만나도록 해요.”
“!”
”대신에 내가 먼저 그를 만나겠습니다. 그 뒤에 만나도록 해요.”
***
한순간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날려 보내졌다.
하루를 꼬박 기절해 있던 것인지, 루치아노는 욱신거리는 몸과 미약하게 남아있는 칼라일의 마력을 손으로 더듬었다. 소문을 듣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금발에 고운 미형, 은빛 눈동자. 그리고 마법사라는 소문까지. 칼라일 헬리오도르, 자신의 의형제.
누군지 모를 대공 여식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리에 억지로 붙잡혀 정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고 심지어 대공의 여식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마법으로 공격했다.
“칼라일님….”
루치아노는 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칼라일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가시가 박혔던 어깨는 통증이 심해 쉽사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아직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다시 가야 한다. 전해줄 게 남아있었다. 그날의 이야기를, 오해를 제대로 풀어야 했다.
“다시 가야 해….”
루치아노는 떨리는 어깨를 움켜쥔 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누군가에 의해 거칠게 로브가 벗겨졌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루치아노는 칼라일이 감싸던 그 여자, 로젤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 샤를로테와 똑같이 생겼네.”
“네가 여길 어떻게….”
“새벽부터 릴리와 기사들이 고생을 좀 했단다. 릴리, 찾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 순간 로젤리아의 뒤로 검을 찬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의 눈 위로 드러난 적의가 드리워져 있었다. 루치아노는 다시 한번 릴리에게 마법을 걸기 위해 손끝으로 마력을 모았다.
그러나 마법을 쓰기도 전에 목 뒤로 통증이 퍼졌다.
루치아노의 시야가 순식간에 점멸되었다.
그가 다시 깨어난 곳은 로젤리아의 집무실이었다.
***
나는 목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루치아노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샤를로테와 너무 닮은 얼굴에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치아노.”
“….”
“많이 아픈가요? 곱게 데려온다고 한 건데. 하지만 이해하시죠? 릴리에게 흑마법을 걸었잖아요? 릴리가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죽지 않고 기절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칼라일님은?”
“당신이 말하는 칼라일님은 다시 고열로 앓아누웠습니다. 마력을 많이 쓰면 그렇게 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루치아노는 잔뜩 경계한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상당히 샤를로테를 닮아 있는 탓에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칼라일에게 할 말은 제가 대신 전해주죠.”
“직접 만날 거야. 칼라일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루치아노에게 홍차가 담긴 찻잔을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다.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위협한 것처럼,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