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네가 왜 여기에.
티파티에서 돌아온 후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칼라일도 말없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열을 앓았다.
칼라일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 눈에는 몸을 가눌 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번처럼 심한 건 아니었지만 벌써 5일째 열이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로젤리아님, 루비 루레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렴.”
레이몬드 제국은 아침부터 크게 들썩거렸다. 루비 루레드가 단독으로 낸 세실리아 주최 파티에서 확인된 플로트 가의 만행과 관련된 기사 때문이었다.
「 플로트 가의 불법적인 행보와 끔찍한 협박이 드러나 큰 관심이 몰리고 있다. 마력석 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바르셀민이 몇 달 전, 그 소유권 및 채굴권을 플로트 가에게 넘긴 이유가 불법적인 마력 연구의 탓으로 생겨난 마법사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 」
나는 루비가 건넨 기사를 받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바르셀민에게 다시 마력석 광산의 소유권이 돌아갈 테고, 마력연구관은 해고되겠지. 그리고 후천적 마법사라고 떠들고 다녔던 세피노 그자도 천천히 마력을 잃어갈려나.
“로젤리아님, 기분이 좋아 보여요.”
“좋을 수밖에요. 루비 양이 잘 써주기도 했고, 특히 샤를로테, 아니. 황후라고 해야 하나. 황후로 인해 황실이 발칵 뒤집혔을 상황이 나름 즐겁거든요.”
“제가 그 부분 특히 열심히 썼어요! 여기, 황후 폐하가 오신 자리에 벌어진 상황...전 황후 로젤리아 가넷의 중재로 싸움은 더 크게 번지지 않았다!”
루비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기사를 톡톡, 두들겼다.
“현 황후 페하의 무능을 가리키는 부분이죠.”
“…마음에 드네요.”
현 황후 폐하, 샤를로테를 저격하는 기사.
어쩐지 입안에서 쓴맛이 감돌았다.
한때는 제국 내에서 가장 완벽한 황후라고 불리던 나였다. 하지만 황실에게 배신을 당했다.
샤를로테가 들어온 뒤로부터,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샤를로테에게 가버렸다. 내게 남은 사람은 릴리와, 오빠가 기사단장으로 있는 기사들뿐이었다. 사교계조차 내 편인 자들은 거의 없었다. 최근, 세실리아 바르셀민과 루비 루레드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황제. 만약 페르소나가 조금이나마 나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줬다면, 아마도 루비에게 그런 기사를 쓰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황후였고, 한때나마 이 제국을 다스리는데 일조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제국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기계부품이었다. 권력과 지위가 내장된, 얌전하고 어여쁜 부품.
이로 인해 황실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떨어질 것이다. 제국민의 신뢰가 떨어지는 것이야 말로 전쟁보다 더 큰 위기였지만….
이제는 어떤 위기가 오든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혹, 시 제가 이렇게 써서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마음에 듭니다.”
“아! 다행이에요!”
루비는 박수를 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기쁜 듯한 웃음이었다. 사랑스럽고 어여쁜 루비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루비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드레스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그게 뭐죠?”
“로젤리아님의 정부, 칼라일님의 기사에요.”
“칼라일의 기사…….”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저는 이 기사를 쓰는 걸 딱히 추천 드리지 않아요. 칼라일님은 마법사이고, 지난번에 제가 기사를 쓸 때 말씀해주신 것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이시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더더욱 쓰라고 한 거예요”
“네?”
“찾아야 할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칼라일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듣기 싫었어요. 분명, 내 정부라는 말에 사람들은 사실인 이야기,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떠들어댈 테지. 나는 그런 것들이 싫습니다.”
로젤리아는 조용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내 사람들을 건드리는 이들은 혀를 잘라내고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안겨주고 싶어요.”
그 순간 루비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꺄아, 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내 사람이래! 로젤리아님, 정말로 정부를 아끼시는군요!
“내가 정부를 아낀다고요?”
“네, 아끼는 거죠! 파티 때 칼라일님께서 위험에 처할 뻔하니까, 검을 들려고 하셨잖아요!”
그건 갑자기 공격을 하려니까 그런 건데.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에 커피에 설탕을 녹이며 티스푼으로 살짝 저었다. 내가 정부를 아꼈나? 내가 칼라일을, 아끼던가. 그래.
샤를로테에게 당한 기억이 있다 보니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가끔 그가 울 때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기는 하는데, 설마 이게 아끼는 마음이었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실….”
루비는 방 주변을 둘러보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폐하보다 칼라일님이 더 잘생긴 것 같아요.”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루비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칼라일님 관련 기사에 외모 이야기도 넣어야겠어요. 엄-청 잘생겼다고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시계를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는 가방에서 서류를 집어넣으며 집무실을 나갈 때까지 사랑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루비가 나가자마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똑, 네 번의 노크소리.
…뭐지?
릴리를 포함한 시종들은 언제나 두 번만 노크를 했다.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도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로젤리아님.”
문이 열리고, 릴리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문고리가 잠겼다. 릴리는 아주 천천히 느릿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릴리?”
“저번에, 헬리오도르 가문에 대해 조사하라 지시하신 것 기억하시죠?”
“그랬지.”
“방금 전, 조사를 부탁한 사람에게 안케도니아 제국에 대한 서류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가 등 뒤로 다가왔다.
릴리가 조심스레 팔목의 소매를 걷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팔위로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게 보였다.
“마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릴리. 대답해.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저는 어떻게든 그자를 떼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요. 현명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로젤리아님.”
릴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충혈 된 눈동자로 나를, 정확하게 내 등 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로젤리아는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누군가 내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네 시녀가 생각보다 멍청하구나. 아무리 흑마법을 걸었다지만, 두려움에 못 이겨 곧바로 제 주인에게 나를 데려오다니.”
“….”
“꽤나 멍청한 시녀를 두었어.”
“멍청한 쪽은 너 같은데. 이렇게 당당하게 기습 공격을 하다니.”
성인 남자인가. 마법을 걸어두었다고 했으면, 일단 이 제국 사람이 아니야. 제국 내 현재 존재하는 마법사는 칼라일뿐이야. 게다가 흑마법.
차를 마시는 척 찻잔을 들었다. 새하얀 찻잔에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보였다. 눌러쓴 로브 사이로 은빛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샤를로테와 똑같은 머리카락 색이었다.
“칼라일 헬리오도르. 이 이름을 알고 있겠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지? 대답해라.”
“…칼라일을 찾으러 온 건가?”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네까짓 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따끔, 목에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릴리는 남자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갑자기 팔목의 문양이 까맣게 빛나더니 덤은 빛줄기가 뿜어 나와 릴리의 몸을 옥죄고 목을 비틀었다.
“릴리!”
“칼라일님이 어디 계신지 말해.”
“내가 왜 말해야 하지? 내 시녀를 위협하고, 함부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심지어 타지 사람인 너에게. 내가 왜.”
“말하지 않으면 저 시녀를 죽이겠다.”
릴리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저대로 두면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찻잔에 비쳐 보이던 은빛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은빛 머리카락.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은빛 머리카락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샤를로테 안케도니아 뿐이었다. 이 자가 만약 그 여자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면.’
릴리는 숨을 겨우 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릴리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이를 꽉 문 채 찻잔에 비친 남자를 보았다. 목에 댄 칼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긴장한 사람처럼. 게다가 칼을 잡는 방법도 이상했다. 사람을 위협해본 적이 없는 것 마냥 무언가 엉성했다.
무엇보다 ‘칼라일님의 위치를 말해라.’라는 말이 이상했다. 릴리를 위협하고, 나를 찾아와 위협을 한 것을 보면 분명 제국 내에 떠돌고 있는 ‘칼라일이라는 남자가 로젤리아 가넷의 정부가 되었다.’라는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나에게 위치를 대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흑마법까지 다룰 수 있는 남자인데.
“말하지 않겠다.”
“그럼 너희 둘 다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죽여보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현재 이 남자에게 내 정보가 필요한 건 확실했다.
“날 죽이면 칼라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나는 일부러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맞받아쳤다.
“릴리에게 걸어둔 저 이상한 마법을 풀어.”
“어디 있는지부터 말해.”
그 순간 나는 목에 드리워진 칼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남자는 당황하며 칼을 빼려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칼날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풀어.”
“…….”
“아니면, 나에게도 마법을 걸 텐가? 아, 혹시 마법을 걸 수 있는 인원이 제한 되어있는 것인가? 걸었다면 진즉에 걸었겠지.”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주춤거렸다.
그 틈을 노려 찻잔을 책상 위로 내려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 찻잔 조각을 들어 남자의 눈앞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복부를 발로 걷어차며 곧바로 바닥으로 제압했다.
그 순간 남자가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로브가 벗겨졌다.
남자의 얼굴을 본 나는, 한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금빛 눈동자에 은발의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고운 외형.
‘샤를로테 안케도니아……?’
그는 샤를로테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정말로 샤를로테가 보낸 건가?
사흘 전에 들었던 칼라일과 샤를로테의 대화가 다시금 생생하게 들려오면서 온갖 부정적인 상상이 온몸을 휘감을 때쯤, 바닥이 쩌억 금 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바닥에 손을 대고 묘한 검은색 연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크게 흔들리는 바닥에서 균형을 잡기 위하여 허리를 숙인 순간, 남자는 바닥에서 손을 떼고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 칼로 나를 찌르지는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뾰족한 보랏빛 가시가 남자의 어깨에 박혔다. 그 가시들은 나를 보호하려는 듯, 내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다.
“로, 로젤리아님.”
소란을 듣고 달려왔는지, 칼라일은 얼굴이 붉어진 채 숨을 간신히 쉬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칼라일은 다 낫지 않은 몸으로 마법을 써서 그런지 겨우 벽을 짚고 서 있었다.
그러나 가시에 박힌 남자를 본 순간, 칼라일은 정말로 쓰러지듯 비틀거렸다.
“루, 치아노?”
루치아노?
그 사람이 누구지?
하지만 저 괴한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칼라일의 눈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칼라일의 눈에 흐르는 건 눈물 따위가 아니었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