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세실리아의 파티
세르빈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가문에서 버려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가넷 가문은 왜인지 모르겠으나 여러 소문이 돌던 가문이었다. 다음 대공으로 거론되었던 로웬을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 시켰다던가, 성년이 채 되기도 전에 기사단장으로 올리기 위해 일부러 황실과 거래했다던가, 그런 류의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세르빈이 생각하기에는 황후 자리에서 내려온 내가, 그것도 이혼으로 다시 영애의 신분이 된 내가, 가문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황후로서 쓸모가 없어진 로젤리아 가넷!
심지어 정부까지 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 중의 착각이었다.
“저, 정부가 농담을 재밌게 잘하는군요.”
“지금 제 정부의 말에 겨우 농담이라 한 겁니까, 세르빈 양?”
“네, 네?”
“제 말이 농담으로 들렸나봅니다, 로젤리아님. 너무 슬퍼요, 흑흑.”
칼라일은 내 품으로 파고들면서 우는 척을 했다.
“슬프니? 내가 어떻게 해줄까, 칼라일?”
“저들의 눈을 뽑아 꽃과 함께 장식해 저에게 선물해주세요.”
또다시 세르빈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그 표정을 감상했다.
세르빈이 아무라 후작가의 여식이라고 하더라도 가넷 가라면 후작가의 여식 하나 정도는 가뿐히 처벌할 수 있었다.
딱 하나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세르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실리아와 블랑쉐는 손을 덜덜 떨고 있는데.
'뒤를 봐주는 사람이라도 있나?'
나는 말없이 웃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후가 된 뒤로 사교모임을 간 적이 거의 없죠.”
“네, 네?”
“모임 하나를 주선해주시겠습니까?”
세르빈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사이 세실리아가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황후의 신분 때문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셨죠. 세르빈 영애와 함께 파티를 열겠습니다! 성대하게요!”
세실리아는 어떻게든 딱딱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를 썼다.
‘사람의 눈치를 잘 보는 영애로군.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는 다 마신 찻잔 모서리 부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미소 지었다.
“일주일 뒤, 티파티를 주선해주세요, 세실리아양.”
“네! 그럴게요, 로젤리아 양.”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볼일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제 곧 교육을 받을 시간이라서요,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죠. 아, 세실리아양은 잠시 저 좀 볼까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빈은 벌떡 일어나 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거리며 귀빈실을 나가버렸다. 블랑쉐도 잠시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급하게 세르빈을 따라 나갔다. 나는 어깨를 뻣뻣하게 굳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세실리아를 마주했다.
바들바들 떠는 게 작은 햄스터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세실리아가 바닥으로 주저앉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아니. 로젤리아님!”
“세실리아 양?”
“저, 정말 로젤리아님을 조롱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어요! 세, 세르빈 양이 따라오지 않으면, 나머지 광산도 빼앗아 가겠다고 해서!”
“일단 진정해요, 세실리아 양. 나는 그것 때문에 따로 보자고 한 게 아니었어요.”
덜덜 떠는 세실리아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어쩐지, 다른 영애들과 달리 나를 보는 시선에서 비아냥은 찾을 수 없었다. 비웃는 어투도 아니었다. 죄책감 어린 목소리에 일부러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런데 세르빈이 그렇게 시킨 거라니. 광산을 빼앗아 가다니?
“광산을 뺏는다니요? 광산이라면, 바르셀민 가의 소유로 있는 보석 광산과 마력석 광산을 말하는 겁니까?”
“네, 네. 이, 이번 마력석을 캐내는 광산이, 그 땅이, 이번에 플로트 후작가의 소유로 넘어갔어요, 그, 그래서……제가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바르셀민은 광산 채굴권을 이용한 사업을 가업으로 삼는 가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광산이 플로트 가문으로 넘어가다니요.”
순간 내 머릿속으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 한 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레이몬드 제국에서는 제국 내 모든 땅은 각자 자유롭게 사고파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혹시 모를 비리와, 불법적인 거래를 막기 위해 토지를 매매한 날을 기점으로, 일주일 이내로 소유지가 바뀌었다는 서류를 작성해 황실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황실에서 이를 인정해주면 그제야 토지의 소유자가 바뀌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마력석 광산은 칭제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바르셀민 가문의 소유였다.
“그, 그게……플로트 후작가로 광산 채굴권 독점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제 아버지와 동생이 갔었는데,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인지 싸움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동생이, 거기서 플로트 가문의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람이?”
“마법사였습니다.”
“…뭐라고요?”
옷을 추스르며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라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법사, 레이몬드 제국 내에서는 현재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마법사가 8대 황제에서 끊긴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법사라고?
“혹시. 그 마법사, 금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네? 아, 아니요. 플로트 가문 내의 특징대로 투명에 가까운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칼라일은 떨리는 손을 꾹 누르며, 안도인지 아니면 실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 마법사가 되는 경우는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었다.
하지만 두 경우는 모두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선천적인 마법사는 애초에 마력을 소유한 채 태어나는 것. 후천적인 마법사는 무언가를 계기로 각성하는 경우. 하지만 각성은 정말 몇백 년 만에 있을까 말까한 경우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 마력을 옮겨 받는 경우라던가. 아니면, 마력석을 꾸준히 먹는 정도였다.
“각성이 아니라면, 마력석을 복용한 것이겠네요.”
“네? 하지만 마력석 복용은 금지되어 있지 않나요? 그리고 마력석을 빼돌리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 새로 마력연구관으로 임명된 사람이라면 사정이 달라지겠죠.”
현재 마력 연구관은 플로트 가문의 사람이었다.
찜찜하면서도 제국의 번영을 위해 승인 내렸던 사안이었다. 마력연구관은 개인이 마력석을 소유한 채 연구를 하는 게 가능했다. 연구하는 척 마력석을 가져가 소량을 빼돌려 누군가에게 계속 먹였던 거라면….
‘그게 이렇게 될 줄이야….’
마법사를 다치게 하면 처벌을 받는다. 심하면 사형이었다. 마법사가 없는 상황이니까, 또한 귀한 인재기도 하고.
아마도 플로트 가문은 이를 빌미로 바르셀민의 가문을 협박하고 광산 소유권을 얻어낸 거겠지. 그때 바로 옆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칼라일이 과자가 담긴 그릇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세르빈 양은 티파티를 하는 날에 그 마법사를 데려오겠네요.”
“그걸 어떻게 알죠?”
“저희 가문도 그랬으니까요.”
칼라일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세실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헬리오도르 가문에서 연달아 마법사가 태어났을 때 곧바로 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마법사 가문인 점을 밝힌 건 황제의 즉위식 파티 때였죠. 우리 가문에서 마법사가 나왔다, 이제 너희가 쉽게 건드릴 가문이 아니다, 이런 의도로요.”
플로트 후작가는 종종 안 좋은 일에 휘말리곤 했다. 그래서 황실이 나서서 플로트 후작가를 예의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칼라일의 말대로라면 세르빈은 티파티에 그 마법사를 데리고 올 가능성이 컸다.
“세르빈 영애는 티파티 때 마법사를 데리고 올 겁니다. 오늘 그대에게 모욕을 받았으니, 분명 그럴 겁니다.”
“내가 대공의 딸이고, 후계자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그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가문 내 마법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군요.”
칼라일은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세실리아에게 고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초대장, 저에게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제가 세실리아 양의 복수를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세실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나와 칼라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천적 마법사는 선천적 마법사에게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나는 칼라일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칼라일.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에요, 미리 기를 눌러놓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대는 이제 대공의 후계자이고 나는 그대의 정부니. 그리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마법사가 된 자가 계속 오만하게 구는 것을 가만 놔둘 수는 없죠.”
칼라일은 조심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은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정부로서 하는 첫 번째 일이 되겠네요.”
***
세실리아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꾹 눌렀다.
세르빈 영애가 따라오라 했을 때는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는데, 로젤리아가 남으라고 했을 때는 정말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혹시나 벌을 내릴까, 모함을 뒤집어쓰게 하여 바르셀민 가문을 멸문시킬까,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생각과 달리, 로젤리아는 친절했다. 상냥했다. 세르빈에게 광산의 소유권을 빼앗겼다고 말하자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광산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잠시나마 로젤리아를 무서워 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은 선물이라도 해드리자.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마차에 올라타려는데, 세실리아는 누군가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가지 않으셨군요. 세실리아 양.”
세실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로젤리아의 정부가 왜 여기에?
그는 세실리아를 내려다보며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햇살 아래서 보니 그의 얼굴은 훨씬 더 아름다웠다. 세실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칼라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세실리아를 호위하는 호위기사마저 칼라일의 외모에 잠시 넋을 놓은 상태였다.
“아, 미안합니다. 세실리아 양.”
칼라일은 놀라며 세실리아의 팔을 놓았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아, 아, 아니에요. 무슨 일이신가요, 칼라일님?”
“작은 부탁을 하나 하려고요.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살짝 볼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모습에 세실리아는 뭔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바람이 불어 칼라일의 긴 금발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은빛 눈동자가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세실리아는 그에게서 풍겨오는 싱그러운 풀향기에 감탄을 내뱉었다.
사람이 너무 아름다우면 정신이 몽롱해지는구나. 세실리아는 칼라일이 ‘부탁’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티피티가 열리는 날에….”
그 순간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부드러운 미소라기보다는 서늘한 미소에 가까웠지만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샤를로테 황후를 함께 초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