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를 이용하세요.
하얀색 실크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대공저 안이 조금 조용해졌다. 오늘 아침, 여러 가지의 일이 동시에 벌어진 탓에 머리가 아팠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내놓았다. 이혼 서류, 이혼 재판. 아버지. 가넷 가문의 후계자. 후계자 교육….
‘후계자’
후계자라는 말을 읊조리며 펜을 움직이는 손을 멈췄다. 후계자,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라고 말했다. 대공 자리의 후계자. 후계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렇게 무뚝뚝한 아버지는 오빠인 로웬 가넷에게 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웬 가넷, 황실의 기사단장. 총명하고 무술에도 뛰어났다. 지휘력은 물론 선대 대공이신 루드베릴 가넷처럼 리더쉽 또한 좋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최연소 기사단장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웬이 대공 자리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공 자리에 앉게 된 건 나였다.
‘더 이상 참고 인내하는 황후가 아니야.’
속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날뛰었다. 분명 기쁨이었다.
“로젤리아님.”
“릴리?”
“밑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또 손님이? 나는 펜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인가? 아니지, 그러면 릴리가 굳이 나에게 손님이 왔다고 알릴 필요가 없을 텐데. 그리고 대공저에 방문한다고 미리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지금 세 영애께서 로젤리아님을 만나 뵙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만나고자 하는 거지?”
“플로트 가의 세르빈 영애와 바르셀민 가의 바르셀민 영애, 페르시안 가의 블랑쉐 영애께서 와 계십니다.”
“이렇게 미리 언질도 없이, 갑자기?”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플로트, 바르셀민, 페르시안.
페르시안은 이리저리 옮겨 붙는 것으로 유명하고, 바르셀민은 마력석 광산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플로트 가문은 이미 고아원 비리 사건으로 최근 사교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히 좋게 보지는 않은 가문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공저로 온 거지?
저택에 방문하기 전에는 항상 미리 언질을 주는 게 예의였다. 편지를 보내든가, 사람을 보내든가 그게 상대를 향한 배려였다.
“지금 내려가겠다. 가서 차와 작은 과자들을 가져오렴.”
나는 인상을 구기며 릴리에게 새 드레스와 장신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분명 그들이 예의도 갖추지 않고 온 이유는 내가 황후 자리에서 물러난 것 때문에 그러는 게 분명했다, 사교계에서 흔히 먹잇감이 되는 대상이 과부와, 이혼한 여성이었다. 더더욱 나는 귀족간의 이혼이 아닌 황실 간의 이혼이었다.
“어서 오세요, 세르빈 양. 세실리아 양 그리고 블랑쉐 양.”
나만큼 갖고 놀기 좋은 소재는 없다는 소리겠지.
“어머, 황후 폐하. 아, 아니지. 이제는 로젤리아 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황제 폐하와 이혼하신 몸이니.”
“아니죠, 세르빈 양. 이혼은 아직 하지 않았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지금 당장은 그저 영애일 뿐인데요, 로젤리아 ‘양’은.”
역시나, 나는 차를 마시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대놓고 험담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한심하게 느껴졌다. 황후 자리에 내려왔다고 바로 본색을 드러내다니. 만약 내가 이혼을 물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멍청한 건가……’
이혼한 여성이 가문 내에서 버려지는 게 흔한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분 차이가 있는데. 생각보다 멍청한 그녀들의 행동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세르빈은 고운 얼굴을 살짝 구기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로젤리아 양, 정부를 들이셨다면서요?”
아, 정부. 그래, 그것도 있었지. 찻잔을 내려놓고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답해줄 만한 물음이 아니라서 미소 지은 것뿐인데 세르빈은 그걸 오해했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외향이 특이하게 생겼다면서요. 게다가 엄청 더럽고,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걸 주웠다고 했나?”
그러자 블랑쉐가 기다렸다는 듯이 세르빈 말을 받아쳤다.
“맞아요,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걸 주웠다고 했죠! 엄청 흉측하게 생겼다던데요. 로젤리아 양, 눈이 생각보다 낮으시네요?”
말투가 참 천박하다고 느낄 때쯤 칼라일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거지꼴, 더러워? 눈이 낮다? 차를 호록 마시며 처음 만날 당시의 칼라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떠올렸다.
붉은 로브를 쓰고 있었다지만 그렇게까지 소문이 변질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처음에 만났을 때는 먼지나 이상한 게 잔뜩 묻어있어 더러운 거지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흉측하지는 않은데.
‘상당히 고운 얼굴이지. 아름답기도 하고, 특히 그 금발….’
칼라일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째서인지 홍조를 띄우며 정원에서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면서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갑자기 그때가 왜? 나는 릴리에게 차가운 물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세르빈은 내 붉은 얼굴이 수치심을 느껴서라고 생각한 것인지, 천천히 비소를 흘리며 말했다.
“로젤리아 양, 언제부터 정부랑 놀아나신 거예요?”
그 말에 부채질을 하던 로젤리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놀아나? 내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머릿속에 가만히 세르빈을 응시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블랑쉐가 조용히 세르빈의 허리를 찔렀다.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세르빈은 오만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황후였을 시절에도 그랬나- 하고. 아시다시피 로젤리아 양은 정부에게 황제를 뺏겼잖아요? 멍청하게도.”
“멍청하게도?”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다살다 이런 소리도 다 듣는구나.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세 명의 영애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 모습에 세 영애가 어깨를 굳혔다. 특히 세르빈의 어깨가 가장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세르빈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이혼을 했으니까. 가넷 가문이라는 뒷배가 사라졌으니까.
‘내가 황후는 아니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세르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악연이었다. 고아원 후원 제도 관련해서나, 황후였던 시절 악의 담긴 소문을 퍼트리거나 이렇게 뒤에서 조롱하거나. 참았던 인내심이 당장이라도 펑하고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세르빈 플로트가 가장 먼저 사교계에 샤를로테의 관한 이야기를 퍼트렸다. 사교계에 도는 소문 중 반은 아마도 세르빈이 만들어낸 게 분명했다.
주먹을 꽉 쥐고 싶었지만 겨우 버텼다.
내 반응을 살피느라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동자들이 까만 유리구슬처럼 느껴졌다.
무턱대고 찾아와도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줬더니 이게 무슨 짓인지.
“로젤리아님.”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올랐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칼라일?”
“로젤리아님. 저만 두고 가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일어났는데 그대가 없어서, 무서웠습니다.”
아침과 달리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방금 자다 깬 사람처럼. 그리고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검은색 실크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칼라일을 위아래로 훑다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검은색 바지까지는 정상적이었다. 가디건이 많이 투명했다. 무늬도 화려한데 반투명했다.
물론 반투명한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살이 다 비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란제리 형식의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목에는 누구의 것인지 목걸이와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야했다. 이제 막 잠자리를 끝내고 온 사람마냥 얼굴에 왜인지 모를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로젤리아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법을 쓴 건가? 나는 칼라일에게 저런 옷을 준 적이 없다. 포엣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이, 칼라일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목을 가볍게 깨물고, 볼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춘 부위가 화끈거렸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영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칼라일은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가 다시 한 번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 로젤리아님의 친우 분들이십니까?”
영애들을 향해 살짝 곁눈질을 하자 세 영애 모두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 중 세르빈은 홍조를 띄운 채 칼라일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칼라일에게 반하기라도 했나? 나는 조심히 칼라일의 뺨을 쓸어주며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맞춰보기로 했다. 덕분에 머릿속이 좀 진정하기도 했고.
“먼저 가버려서 속상했니?”
“네, 저번 밤에 그렇게 괴롭히셨잖아요. 그런데 혼자 내버려두시면 어떡해요, 로젤리아님.”
내가 어떻게 괴롭혔는데?
세실리아는 입을 가린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가디건 위로 비치는 속살이 너무 적나라했다.
칼라일은 살짝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꼬옥 끌어안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다간 정부와 화려한 밤을 보내는 전 황후 로젤리아, 이런 소문이 퍼질까 약간 두려워졌다.
그때 칼라일이 영애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저를 이용하세요.”
“!”
“이성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대응하세요. 릴리 양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사실 잘한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일부러.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 네가 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칼라일의 뺨을 감싸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칼라일의 팔이 굳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칼라일과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라일, 내가 요즘 너무 바빴단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그대. 그런데 최근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아아,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세르빈을 향해 눈꼬리가 휘어질 정도로 황하게 웃어보였다.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이성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대응하자.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기에는 아직 이르다. 벌써부터 죽여 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대공의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듣기에도 정말 싸늘한 목소리였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블랑쉐가 숨도 쉬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세르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